〔환(HWAN)〕
"나의 아도니스 환아,"
에리얼이 미끄러지듯 나에게 다가왔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금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내가 제멋대로 군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제멋대로 구는 건 그녀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리를 통솔하는 도미나다. 엔투나 루갈 모두 그녀는 친구라고는 했으나 그들 사이에서도 엄연히 상하관계가 존재함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일부가 아니다. 나를 구해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도 들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후, 아니, 딱히 그와 한 약속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왜 여기까지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든다. 우연한 사고를 당한 나는 그녀에 의해 다시 소생했다. 그리고 나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그녀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이 곳으로 날 데려와 그녀에 대해, 그녀의 무리들에게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 네가 도미나의 연인이란 이름 아래 나의 능력 중 일부를 네게 주었어. 내가 네 머리맡에서 이야기를 했었지. 이 세상 어떤 것도 널 해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에 어떤 비유라도 있는 건 아니야. 글자 그래도 받아 들여도 돼. 하지만 더더욱 그렇기에 네가 저들에게 있어 너의 가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테지. 부탁이야, 환아. 네 예언에 대해서는 너무 고마워. 그런데 조금만 날 기다려줄 순 없겠니?"
그녀가 나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한다. 그녀의 짙은 체리 색의 입술은 나의 마음을 돌리려는 우는 소리를 하나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미동 없이 없다.
그녀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널 제 곁에 묶어둘 거야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순간 소름을 돋게 한다. 나는 무례하지 않을 선에서 그녀의 팔을 내게서 밀어내었다.
"환아...."
그가 내게 했던 모든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인정한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그러했듯, 또 빛나던 그라 그러하듯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니까.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들어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양 극단의 사이에서 중용의 절충점을 찾아보자. 나는 지금 그녀에게 너무 가까운 것 같으니, 이제 그녀에게 한 걸음 떨어져 그에게로 한 번 다가가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최소한 그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에리얼이 내게 주는 확신에 과감한 움직임을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 한 무리의 수장 그 옆자리를 잠깐 만난 나에게 넘겨준다? 그녀가 나를 그녀 무리 가운데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왜? 내게서 얻을 다른 이득이 있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수상쩍긴 했지만, 일단 그는 나를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내게 더 다가오려 하지도 않고 머리털 하나 건들지 않은 채 온전히 에리얼에게로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나는 모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에리얼이나 그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그는 나를 에리얼의 손아귀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나를 꾀어다가, 환심을 사기 위해 정보를 주는 것인 거다.
본디 대가 없는 호의란 성립될 수 없는 법이지.
그녀가 돌연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어느새 하늘은 이미 반 이상 가로질러 갔다.
"... 아직 떨어질 시간이 아닌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뭐가 아직이라는 거지? 설마 그 효과?
"너, 누군가 만나고 왔니?"
등줄기가 빳빳해졌다. 그녀가 눈을 흘겨 엔투와 루갈이 어디에 있는지 잠시 확인해본다. 그들은 그녀 곁에서 떠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잠시 날 떠보는 것 같다. 그녀는 모른다. 내가 누구와 만나는 지 그녀는 자신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덜 어색한 목소리 톤으로 지체 없이, 망설임 없이 대꾸한다.
"아니? 루갈이나 엔투 외에도 또 누가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에도 에리얼의 의심의 눈초리가 내게서 가시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어? 두통은?"
"많이 괜찮아졌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리얼."
나는 아주 괜찮다는 듯 양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녀가 슬며시 입술을 깨문다. 역시 조금 이상했다. 순수하게, 진심으로 내가 염려되기 때문에 붙잡는 것일까.
"아주 잠시, 단 한 시간이라도 좋아, 아니 오늘이 그렇다면, 내일 아침이나 점심 즈음에 다녀올게. 정 위험하다면 루갈이랑 함께 다녀오면 안될까? 그럼 괜찮은 거 아니야?"
루갈이 퍼뜩 고개를 들어 에리얼과 내게 소리친다.
"도미나! 싫어요. 제가 왜요! 저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에요. 전 처음부터 저 사람이 싫었다고요!"
"루갈! 그런 말 하면 못 써!" 엔투가 그를 나무란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엔투 말이 맞아, 루갈. 그런 말 하면 환이가 상처 받잖아.당분간은 같이 지내야 하는데. 환아, 오늘, 아니 혹은 내일 꼭 돌아가야 할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난,..!"
숨을 한 번 고르곤 감정에 북받치듯 털어놓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외하고서.
"솔직히 난 너무 무서워. 비록 네가 날 구해줬다고는 하나 나는 너와 처음 만난 사이고, 루갈이나 엔투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지만, 나는 아니야. 철저하게 이방인이지. 너희의 사적인 사정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된 것도 아니잖아? 에리얼, 네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나도 또다시 사경을 헤매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네게 예언을 알려주었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니야? 특히 루갈은 내가 뭘 실수라도 했는지 저렇게 이를 세우니,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에리얼이 루갈을 향해 눈알을 굴린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서워. 내가 어떤 곳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머릿속이 흐릿해져 잘 떠오르지 않아. 두 다리가 디딜 것 없이 공중에 불안정하게도 떠 있는 것 같아. 너는 내게 네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원래 알던 사이만큼이나 편할 수 있을까. 집에라도 잠깐 날 데려다 준다면, 아니 적어도 사고 현장에 단 30분이라도 가게 해준다면 뭔가 떠오를 것 같아. 날 걱정하는 네 맘 잘 알아.그러니까...."
진짜 집으로 돌아가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반은 알맹이 없는 과장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길게 잡고서라도 범인을 찾아내어 그 면상이라도 보고 싶었다.
"알았어. 내일 아침에 해가 뜰 때 즈음 다녀와. 대신 금방 돌아와야 해. 루갈이 데려다 줄 거야."
"도미나!"
그가 언성을 높였다.
"도미나께서는 늘 그렇듯 저 사람에게 약하세요."
"루갈, 이건 부탁이 아니야."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잠시, 늘 내게 약했다라는 뜻이면.
"저기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환아, 내가 네 편의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루갈.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도록 해."
그녀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며 잘라 먹었다. 마음이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에리얼의 단호함에 루갈도 뭐라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예, 당신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
시간이 되었다.
루갈은 한 층 더 까칠한 표정으로 내 곁으로 어슬렁어슬렁 발을 끌며 걸어온다. 엔투는 아직 저 구석에서 자고 있다고 들었다. 에리얼도 긴 하품을 늘어뜨리며 로프도 걸치지 않은 채 나를 나른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엔투가 자기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하더라. 올 때 부탁해."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집까지 갈 수 있지?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거기까지... 어어?"
그 때였다. 루갈이 양 팔 가득 나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나를 안아 들어 놀란 것도 있지만 소스라치게 차가운 체온에 나는 거의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 소스라쳤다. 내 머리맡에 수건을 올려줬던 엔투도 그랬던 것 같았다. 뱀처럼, 이들도 과연 냉혈동물이라 이건가.
좌우간 내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얌전한 공주님처럼 안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잠시. 그게, 그러니까!"
"잘 매달려 계세요. 저는 떨어져도 모릅니다."
그의 등 뒤에서 그래, 날개다. 그의 몸집보다도 커다란 날개가 기지개를 피었다. 엔투의 홍채 색보다도 조금 더 짙은 회색이었다. 새삼 이들이 어떤 존재인가 실감이 난다.
"어, 루갈 날개는 오래간만에 보네."
벽과 가까운 장의자 사이에서 엔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전 제 날개 싫어요. 엔투 누나나 다른 사람과 같은 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의 날개 색깔은 짙은 회색이었다.
"난 네 그런 색깔이 좋아."
에리얼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귓불까지 벌게 진 그는 쑥스러웠는지 그저 말없이 나를 알았다. 그리곤 힘찬 발 구름과 함께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먼 구름 위의 창공까지 날아오르다 그가 비행 고도를 점점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가 따로 가르쳐준 적이 없었음에도 그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내 장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다. 그가 고층 아파트 복도 창문을 직접 열어 나를 그 안으로 일단 밀어 넣는다. 우리 집이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가 따라 들어오려고 한다.
"저기, 루갈!"
내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의 왼쪽 눈썹꼬리가 올라갔다.
"난 여기에 있을 거야.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 가져도 될까?"
"안 돼요."
그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분만 줘. 그 사이에 엔투가 먹을 거 어디서라도 가져오든 사오든 하도록 해. 그럼 서로 시간이 단축 되잖아. 너도 나와 오래 있고 싶은 건 아니지."
그가 잠시 고민을 한다.
"네. 당신 말이 맞네요. 하지만 절대 집 밖에서 안 나가겠다고 약속해줘요."
"아무렴."
건너편 하늘 위로 루갈이 긴 날개를 펄럭이며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내 내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나는 당장 집에서 뛰쳐나와 서둘러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