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HWAN)〕
"약속을 지켜주어서 고마워."
루갈이 내 곁에서 사라지자 마자 나는 사고현장으로 내달렸다. 나는 장소 위치를 기억한다. 내가 처참하게도 누워있던 길거리 한 복판에 도달했다. 그 때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전과 같이, 내게 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알려줘. 그 날의 내 사고는 당신네들과 전혀 관계 없는 일 아니야? 당신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았어. 그냥 운이 없는 사고였던 거 같아. 어떤 지나가는 정신 병자가 날 밀치거나 그랬겠지.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날 구해주었고 날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그리고 때가 된다면 날 반드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했어."
"에리얼이 그래?"
그가 그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인상을 풍기며 그녀의 이름을 친근하게 언급하였다.
"널 지켜주겠다고.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녀가 그랬어?"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분명 그랬겠지.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라고, 그저 편히 몸을 쉬게 하는 데 집중하라 뭐 그런 식으로 널 꾀었겠지. 원래 뱀들이 하는 말은 늘 귀에는 달콤하게 들리거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셔츠 단추도 다 채 채우지 않아 속이 훤히 드러내 보이는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나를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바닥을 빼내어,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 한 채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굉음이 들리며 건물 꼭대기 층의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끝을 따라 콘크리트 더미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수직 낙하한다. 두 손을 크게 휘저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루갈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가 나를 해친다!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환아."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 내가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떠보았다. 건물에서 일부 떨어져 나간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내게 닿으려는 일순에 가루가 되어 퍼져나갔다. 매캐한 먼지에 목이 막혀 잔기침을 했다.
"네가 뭐라고 에리얼이 널 이렇게까지 감싸고 도는 걸까? 왜 널 그곳에 누가 발견할 새라 숨겨두는 것일까. 그녀 스스로에게 걸어둔 가호를 희생하여 네게 걸어주었던 것도 몰랐었군. 아도니스? 하! 웃기지도 않지. 정작 마음은 딴 곳에 있으면서. 환아, 그거 알아? 심지어 나도, 그 어떤 것도 널 해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엔 없어. 이상하지? 왜 그녀는 너에게 이상하릴 만큼 네게 집착하지? 널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우습게도."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순간 뺨이 화끈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려 마귀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내가 그녀 대신해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야!"
내가 발끈하며 그에게 되받아 쳤다.
"에리얼이 내게 도와달라고 했어! 내가, 아주 긴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그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예언의 꿈을 꿀 수 있다고 했어. 그리고 그 말이 맞았지. 그것도 바로 어젯밤! 아스타르테에게 물려 환각처럼 꾸었던 꿈 속에서 언약의 끝을 보았어! 그리고 물론 난 그 내용을 네게 알려주지 않을 거고. 네가 말했다시피 넌 내게 손 하나 대지 못하니까 무서울 것 하나 없지. 나는 당장 루갈에게 돌아갈 거야."
"예언이라고?"
그가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과장된 몸짓으로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불쾌하다.
"더 이상 네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아니, 넌 들어야 할거야. 왜냐하면 난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거든."
나를 해칠 뻔한 이의 말을 들을 성 싶으냐.
"그런 거라면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아!"
"겨우 나를 불러내어 한다는 말이 그것 뿐이야?"
내가 쏘아붙였다.
"잘 들어 봐. 우리 가장해보자. 에리얼에겐 사실 저 본거지에서 도망쳐 나와 할 만큼 중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의 무리들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말 다 한 거 아냐? 내가 만약 그녀라면, 천사가 아니 너희들이 지칭하던 마귀라면 말이야, 빼앗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는 가히 도미나의 자리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거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두려울까. 이기적이기도 하지."
"원하던 능력? 그게 뭐지? 죄다 거짓말이지?"
"지금까지 역대 도미나 중에서 예언의 능력이 없는 이는 없었어. 말이 안 되거든. 그거 알아? 아스타르테의 독에 환각을 보며 예언을 볼 수 있는 이만이 도미나가 될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인데 그녀가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도미나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런데 그 예언의 능력을 한낱 네가 가지고 있었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를 통해 나는 확신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줄곧 궁금했어. 그녀는 그녀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쥐굴에서 왜 나왔는지. 나는 줄곧 궁금했어. 그곳에서 나와야만 할 어떤 필연적 이유이기에? 그래서 그 비밀을 들킬까 봐 저를 사랑하는 무리들도 믿지 못해서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
그가 큰소리로 웃어 젖힌다.
"특별한 너를 발견한 그녀는, 너를 이용해 먹는 거야. 가끔 정작 자신에겐 쓸모 없지만 우리에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들이 있어."
"증거가 없잖아!"
귀를 틀어막고 싶어진다.
"어리석은 사람인 너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너희 족속들은 우리를 신의 사자라며 천사라고 불러왔지. 인간을 착하고 바르게 인도하며 죄악의 수렁에서 구해주는 역할을 하는 건 그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그녀는 그 예전의 신의 언약이든 뭐든 우리의 아름다움과 힘을 질투하여 단체로 망상에 빠진 위험한 무리들이야. 원래 최면을 건 사람보다도 더 최면에 빠져든 사람은 없다고들 하잖아. 그런 존재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근거도 없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거야. 때론 진실은 쓰지. 도망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어쩌면 에리얼이 그녀와 나의 무리들에 대해 언질 해주었다시피 항상 기억해, 그들의 타고난 특성을. 고난과 역경과 아픔을 주는 것은 그들이고 그걸 이겨내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역할은 하는 나와 같은 무리들이지. 고작 해봐야 꿈 밖에 꿀 줄 모르는 네가 옆에서 숨만 쉬는 것으로도 점점 괴롭게 될 거다."
얼빠진 채, 내가 그에게 구걸이라도 하듯 다가갈 때마다 그는 마치 신기루처럼 멀어진다. 그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게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그것이 내 발 끝으로 떨어졌다.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듯 그것을 잡아든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악과. 그것을 풀면 네가 그것을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네 사고 당시, 너를 밀었던 그에 대해 감각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그 때였다.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루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괜찮아요? 방금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는데. 분명 내가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여기에 있는 거에요? 한참을 찾았어요."
상공에서 루갈이 날아와 내 왼편으로 착지했다. 다시 돌아본 그 자리엔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건물들 사이에서, 수없이 지나쳐가는 사람들 가운데에 그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반응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그도, 심지어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게 초점을 정확히 맞추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인지하기도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피해 걸어간다. 에리얼, 당신은 이것을 보호라고 부르는 것인가.
나는 그에게 받은, 빨간 리본이 묶인 향 주머니를 루갈에게 보였다. 그리고 이것을 아냐고,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물었다. 루갈이 향 주머니를 집어 들어 둘러본다.
"잘 모르겠지만, 주머니에 도미나의 문장인 장미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무리네 일원들 중 하나의 것인 것 같습니다."
"그럼 에리얼 거라는 거야?"
"확답은 할 수 없습니다. 에리얼의 약학 지식은 극히 제한적일 뿐더러 아무런 효능 없이 향만 좋은 식물은 다루지 않습니다. 이 근방을 지나가던 톨로이 일원이 떨어뜨린 것일 확률이 더 높아 보이군요, 왜 그렇습니까? 도미나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놀란 가슴을 조금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쓸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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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얼, 이거 네 거야?"
루갈이 날 우리가 있던 곳으로 내려주자 마자,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 엔투와 이야기하고 있는 에리얼에게 곧바로 달려간다. 엔투가 대화에 끼어들어 방해한 나를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올려다본다. 엔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여력이 없었다. 궁금했다. 빨리 당장 물어보고 싶었다.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마음만은 편했을까. 취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이번에 먹게 된 사람은. 뱀의 역할을 도맡아 날 유혹을 했던 건 이번 극에선 정체 모를 그이고, 또 이번에도 결국 그것을 베어 물게 되는 사람은 나이게 되는 걸까. 무지한 삶은 낙원이요, 나는 깨달음으로서 낙원에서 추방될 것이다. 아니야. 아직 아무것도 몰라. 지레 벌써 단정짓지 말자.
나는 그에게 건네 받은 그 엄지손가락만한 향 주머니를 손바닥에 올려 내보였다. 미세하게 손이 떨린다. 그녀가 나의 안색을 살피며 갸웃한다. 그녀가 내게 사뭇 의아하면서 내게 되물었다.
"이걸 어디서...?"
"사고현장 구석에서 발견했어. 루갈에게 보여줬더니 네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그 때 네가 날 데리러 왔을 때 실수로 떨어뜨렸나 봐."
나는 이곳으로 돌아 오는 내내 그녀가 이것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물을 때를 대비해 변명을 하나 연습했었다. 나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연습한 그대로 대답했다. 조금 말을 빠르게 한 감이 있었다.
"맞아. 내 거야."
안락사 같은 한마디였다. 아니기를 바랐다. 그가 빨간 리본을 그녀 앞에서 풀어 해쳐 보면 그 날의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허락도 없이 리본가락을 풀러 던져버렸다. 마치 연꽃이 피어 날아오르듯, 다섯 개의 꽃잎 문양이 새겨진 천 조각이 풀어헤치면서 크기에 비해 그토록 진한 향이 그녀와 나 사이의 허공을 물든다. 향이 너무 독하여 코 안 속이 얼얼해진다. 수십 미터 밖에서도 진동할 것 같은 향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선가 맡아 본 향이었다. 난 그 잔향을 기억한다. 아니라고, 다르다고, 아니 적어도 비슷한 향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향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살의가 끓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