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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NEMESIS)
작가 : HANNAH
작품등록일 : 201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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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NEMESIS) 9
작성일 : 17-07-31     조회 : 292     추천 : 0     분량 : 4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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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얼 ARIEL〕

 

 

 

 

 

 "그에게 왜 그랬었어?"

 

  당분간은 그와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때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동안은 정말 보고 싶어도 보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했었다. 우린 서로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아니까, 당분간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만남은 없을 거라고 내가 먼저 제안했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늘 그렇듯 어리광 부리는 듯한 제안을 하는 것은 나였고, 깨는 것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나의 단점을 늘 잘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환이의 한 마디에 비로소 뿌옇게 안개같이 흐린 단서 조각조각들이 커다란 그림의 실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솔직히 당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환이를 둘러싼 모든 너무도 당신스러운 달콤하고도 가슴 아픈 덫이기에 날붙이가 발목에 파고드는 동안에도 나는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되려 나는 당신을 내 용의 선상에서 밀어내려 했었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의던 타의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환이에게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고 널 그렇게 만든 이는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은 환이에게 당신을 끌어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내가 아니었던가.

 

  그가 내게 건네준 향 주머니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향 주머니의 주인을 나는 알고 있다.

 

 "보고 싶었어."

 

  장난스러운 내 눈 앞의 이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항상 내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 내 귓가에 속삭인다. 그의 커다랗고 매끄럽게 빛나는 손이 뺨을 어루만진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사랑하는 이상의 여인을 조각으로 새기는 피그말리온의 손길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나의 사람. 그러나 나와 그는 늘 달조차 뜨지 않아 바라던 내 사랑인지, 내게 상처 입힐 아군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날만을 신중히 고른다. 우리는 그런 장막 안에서 몸을 숨겨야 한다. 우리는 물가 근처에서 하는 불장난이라면 손에 데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근방의 초원을 다 태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진정한 아도니스, 아티스이자 바알인 나의 사랑스러운 이여. 아, 이 모든 것이 죄악이라면 우린 이보다도 더 밑바닥을 경험할 수 없으리라.

 

 "그에게 왜 그랬었어?"

 

  나는 다른 주제로 돌리려는 듯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그의 이마와 나의 이마를 맞대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조금은 원망하듯.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지. 굳이 당신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나는 해안가의 빛나는 물빛처럼 옅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그가 당해낼 수 없다는 듯이 장난스런 함박 웃음을 터뜨린다. 비겁하기도 하지. 당신은 내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잘 인지하고 있다. 아무런 걱정 없을 듯한 천진난만한 웃음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에게 약해졌었던가.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내가 때 맞춰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환이를 어떻게 할 셈이었을까. 당신은 내가 그토록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싫은가요?

 

 "네가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잃고 나면 영원히 내게로 올 줄 알았으니까."

 

 "내가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너는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오늘은 질문이 많네."

 

  그가 나의 턱을 살짝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품 안에 안길 때마다 그의 옷자락에선 늘 같은 향기 배어 나온다. 우리가 사랑하는 무리들의 갈라놓고 어느 이는 저 하늘 가까이 산 높이 위로, 다른 이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단 하나의 것. 뱀은 여인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였다. 내가 머물렀던 성전 안에 커다란 무화과 나무가 탐스럽게 열매를 맺듯이 늘 당신이 앉은 자리 옆은 하늘을 감히 뒤 덮여 보이지 않도록 가지를 높고 길게 늘어뜨린 사과나무가 썩지 않고 영원토록 머물러왔을 것이다. 설욕의 패전을 잊지 않으려는 듯, 그에게서 나는 향은 분명 달콤했지만 담즙을 맛본 듯 씁쓸했다.

 

 "그 후의 생각은 해 본적 없어."

 

  그가 대답했다.

 

 "네가 톨로이를 떠난 후, 단 한번이라도 너의 시야에서 그가 사라진 적이 없었으니까."

 

 "질투하는 거야?"

 

  부정을 저지른 걸 들키기라도 한 듯, 그의 한 마디가 못이라도 되어 날아와 가슴 한 편에 박혀버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난 어떤 말로 이어야 할지 망설인다. 환이에 대한 나의 감정을 그가 모를 리 없었고, 또 잘못 짚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그를 위해 변명만을 머릿속에 되뇌어 본다.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미련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때가 잠시나마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었기에 아직은 여린 내 마음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었다. 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그가 조금은 불행해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필연 혹은 우연의 결론으로 이렇게나 지치고 힘들고 도망가고 싶은데 너는 내 것이었던 것으로 행복해하고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를 내가 있는 곳으로 잡아 떨어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말이다.

 

 "너를 위해 그를 네 곁으로 데려왔어."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그러니까, 이젠 네가 할 일을 그가 할 수 있어. 또 해야만 하는 일을 네가 할 수 없으니 이젠 모든 것을 내려두고 내게로 와. 그 누구도 널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내가 데려가 줄게. 넌 원래 그곳의 일부가 아니잖아. 넌 완전히 그들이 아니잖아. 가능해. 도망칠 수 있어. 나와 함께 영원토록, 이런 장막 속에서가 아닌 낙원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그가 담담히 내게 속삭인다. 그의 제안은 눈물이라도 날 만큼이나 달콤하였고, 내 두 어깨를 짓누르며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부터 해방된 듯 솔깃하였다.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나의 두 눈을 가리는 그를 따라 어디로든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먹었던 선악과의 과육은 달콤했을까? 잔인하다. 당신은 너무도 잔인한 사람이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만을 내게 심어준다.

 "너를 따르고, 너를 사랑하며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들도 내가 돌봐줄 수 있어."

 

  꿈에서 강제로 붙들려 깨어나지는, 벼락의 균열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그래, 내가 도망치지 않은, 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

 

 "너의 바람은 누구를 위한 거야?"

 

  정말 나를 위했던 거라면, 그는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겠지.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 머리 위의 수놓아진, 헤아릴 수 없이 빛나는 작은 별들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듯이 그거 거기서 가만가만 신의 창조물들의 역사를 지켜만 볼 것이다. 맨발에 와 닿는 여린 초록 풀들이 간지럽다. 가벼운 풀 내음에 희미하게 섞여 들어오는 야생화 꽃 향이 밤하늘에 실처럼 흩날린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고 다시금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를 발견해준 이여. 나를 맨 처음 찾아준 이여. 내가 가장 누군가를 원했을 때 곁을 지켜준 나의 사랑하는 이여. 왜 내가 당신의 마음을 모를까요. 하지만 당신만큼이나 내겐 저버려선 안 되는, 나 밖에 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당신 또한 당신의 의무를 나 때문에 저버리지 못하듯 나 또한 당신과 다를 바 없어. 우린 결국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런 당신이라서, 또 그런 나라서 서로를 한 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발꿈치를 들어 그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말을 잇지 않았다. 다만 나를 말없이 안아줄 뿐이었다.

 

  우리들의 끝은 매일 밤 기도해도 대답 없는 신만이 알 뿐이겠죠. 그러나 그것은 오늘 밤이 아님은 확신해요. 봐요, 달조차 없이, 그 옛날 모두가 함께였을 때의 다비드의 별처럼, 오늘의 우리들의 밤은 이제 시작이라 속삭이네요. 내겐 내 신분을 말해줄 어떠한 장신구도 없고 당신 또한 마찬가지죠. 자, 아직 우리의 밤은 기니까 내 손을 놓치지 말고 따라와요. 밝은 낮의 태양 아래선 우리는 함께 있을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당신이 준비해둔 그곳을 알고 있어요.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의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내가 사랑하는 무화과 나무 줄기가 세워진 기둥마다 얽혀있는 그 곳은 만발한 작약과 석류 그리고 장미 다발이 나를 위해 장식하였네요. 정갈히 준비된 하얀 천 위에,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그 곳에 나를 데려다 줘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 같은 이. 나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구나. 세상 이 많은 이들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이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와도 같아서 내가 그 그늘에 앉아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도 달았네.

 

  내가 당신을 안을게요. 있는 힘껏 두 팔을 벌려 내 위의 당신을 껴안을 때면 하늘 위 별을 의미 없이 세보기도 하죠. 해가 뜨기 전, 당신이 내 옷 꺼풀을 하나씩 리본 푸르듯 할 때마다 사과 대신 석류 몇 알을 입에 문 채 당신에게 숨도 쉴 수도 없이 긴 나의 사랑을 드립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어드릴 것입니다. 당신은 나란 죄악의 수렁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겠죠. 하지만 당신은 기꺼이 기뻐합니다. 그러니 우리 서두르기로 해요.

 

  새벽이 오기 전에, 해가 뜨기 전에.

  우리가 다시는 마주볼 일 없을 듯, 등 돌려 고개조차 돌아보지 않고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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