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HWAN)〕
내가 이곳에서 누렸던 평화의 파란을 고하듯 검은 먹구름이 뱀처럼 뒤틀려 똬리를 트는 것 같았다. 그리곤 다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할 작정인양 눈 깜빡 할 쉼조차 주지 않고 그토록 찬란하던 태양을 게걸스럽게 집어 삼켜버렸다. 오래된 유적지 같은 성당의 창문의 유리가 불꽃처럼 터져버렸다.
불길하다. 새삼 내가 지금 어떤 이들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 실감이 난다. 성당 안 을씨년스럽게 수놓은 가닥가닥의 촛불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주저 앉아 어둠이 무서워 벌벌 떨어버릴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에리얼은 어디에 있지?
아니, 내가 애초에 왜 그녀를 찾고 있단 말인가.
그녀와의 만남 이후, 나의 일상은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나를 그렇게 만든 이가, 적은 결국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어느 옛말과 같이 내 모든 일의 원흉은 그녀였었다는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전말이 내 머리를 강타한다. 처음부터 난 그녀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이다. 나를 위한 섬세하고 고운 거미줄을 촘촘히 엮어두고는 내가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구해준 척, 아끼는 척, 지켜주는 척. 그 동안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얼마나 내가 갖잖고 우스워 보였을까? 하, 하긴야 우연찮게, 마치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는 듯 그 타이밍마저 기가 막혔더라지. 역겨운 그녀의 이중성에 난 다짐을 한다. 언젠가, 이 가까운 시일에 넌 날 끌어들인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라고. 가장 네가 바닥을 기어 다니며 절실할 때에 너의 목을 물어 뜯으며 네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리라. 통한을 토해내게 하리라. 그녀를 생각해본다면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구걸하듯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게 사과 그 비슷한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적어도 죄책감 비슷하게나마 느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내게 돌아온 것은 내 가슴 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내 안 어디로 향할지 모르게 날뛰는 비수 같은 그녀의 비웃음이었다.
그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인해 난 내가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이 모든 고난에도 그리고 영원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 분명 불행했었음에도 이제까지는 그래도 평화로웠던 것이다, 앞으로 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등 떠밀려 걸어야 함을 감지한다.
땅이 흔들린다. 대지가 요동을 친다. 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아서는 듯 땅에 균열이 생기며 솟아오른다. 귀를 틀어막아버리고 싶은 울림은 마치 땅이 울부짖는 것 같다. 불길하다. 가히 중심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잡을 것 하나 없어 마치 광대가 춤을 추듯 촛불처럼 비틀거린다. 어디선가 장대빗소리 같이 시끄러운 날개 짓 소리가 들린다. 지진에 창문이 깨져 그 틈 속으로 새카만 벌레무리들이 파고들어왔다. 본능적 혐오감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이었다.
멍청하게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루갈이 날아와 나를 채어갔다. 양 팔 가득 그의 목을 감싸며 꼴사납게 그에게 안겨 옮겨지는 처지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당 천장이라도 닿으려는 듯 높이 떠오르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틀린 땅의 균열 사이사이로 뱀 떼가 기어올라와 득실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너도 그녀와 똑같아."
놀라지도 않고 태연한, 네 얄미울 정도로 무덤덤한 너를 보니 이런 기현상이 이럴날 줄 너는 미리 알고 있었어. 내게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그리고 사지(死地)로 놀아넣고선 구해주는 척하며 생색을 낸다. 그의 모습에서 그녀가 겹쳐보여 구역질이 났다.
"왜, 아직 내가 죽으면 곤란하기라도 하나보지?"
"사실 나는 그다지 상관 없네요."
성당 제일 안 한 가운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던 무화과 나무를 지나 에리얼이 늘 삐딱하게 반쯤 누워있곤 했던 자리 안쪽 빈 공간으로 날 피신시켰다. 에리얼의 의자 뒤로 이전에는 없었던 팔걸이와 길이 높은 등받이가 있는 나무의자가 줄이어 늘여져 있었다. 사람이 앉는 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도 오래되어 바랜 고동색에, 그 재질이 투박해 보였으나 공들인 세공은 가히 만든 이가 얼마나 애정 들였는지 느껴진다. 상단에는 다섯 장의 꽃잎이 새겨진 장미와 등받이엔 하나의 장면 같은 그림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아 모르겠지만 세 의자 각각의 세공은 달라 보였다.
나의 것은 해안가에서, 어느 어린 딸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부축을 받으며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의자 손잡이는 이곳 성당의 어느 장식물이나 그러하듯 뱀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 좌우간, 신기하게도 무화과 나무와 작은 계단 위 강단만큼은, 내가 있는 이 곳만큼은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 고요하고 안전했다.
"거기 앉아."
"아악!"
루갈이 날 중앙에 있는 의자로 던져 떨어뜨렸다. 쟤는 내가 지랑 똑같다고 생각하나? 이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놈.
"쟤는 에리얼 외에 너무 하다 할 정도로 배려심이 없단 말이야. 괜찮니, 환아?"
엔투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분명 이 강단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돌아본 그곳엔 엔투가 인기척도 없이 내 곁에 서있었다. 귀신 같은 것들. 너희들은 귀신이라 돌 맞아도 할 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커다란 감자칩 봉투를 한아름 안은 채 우물거렸다. 익숙하다고 여겼던 이 곳이 순간 낯설게만 느꼈으나 내가 과연 지금 어디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너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쿠데타라도 일어난거야?"
나는 그녀에게 건네 받은 과자 한 조각을 입에 던지며 물었다. 이 사단이 났는데, 태평스럽기도 하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에리얼이 아침에 말한 것 같은데? 곧 우리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도착할 거야! 어차피 여긴 에리얼이 톨로이가 숨막힌다고 도망쳐 나와 발견한 놀이터일 뿐이고. 그리곤 난 아까부터 여기에 있었어. 넌 그러니까 왜 에리얼 말 잘 듣지도 않고 꾸물거리고 그래? 큰일날 뻔했잖아."
"보고 있었어?"
"응, 너 되게 웃기더라, 재미있었어."
이 마귀들.
"이제 자리에 앉아 앞을 잘 지켜보는 게 좋을 거야. 이제 곧 가히 장관이 펼쳐질 테니까!"
엔투가 봄날의 나비마냥 길고 구불거리는 금발을 나폴 대며 날아가듯 달아났다. 그리곤 계속 먹고 있던 과자 봉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내 왼편의 의자에 앉아 한 다리를 다른 다리 허벅지에 오른 채 마냥 해맑게 우물거린다. 성안을 한 바퀴 날고 온 루갈이 이내 엔투를 보더니 항상 찡그리고 있던 눈썹을 더 찡그리며 그녀에게 까칠하게 한마디 한다.
"곧 시작인데, 누난 그것 좀 못 치워요?"
그가 남은 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투덜댔다.
"먹다가 의자 뒤로 던지면 안보이니까 괜찮아. 너 자꾸 그렇게 인상 쓰면 엔릴처럼 못생겨진다."
"엔릴?"
내가 되물었다.
"아, 내 오빠야."
"너 오빠도 있었어?"
"없는 게 나을 뻔했어."
"오래간만에 옳은 소리 하시네요."
"야, 까도 내가 까."
엔투가 루갈에게 과자 봉지를 내던졌다. 결국 얻어맞은 건 그들 사이에 있던 나였지만.
그녀를 위한 자리에 시야가 가려 앞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을 보고 있자면 두 가지 상반된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메아리 친다. 한 가진, 어쩜 이들은 몸서리치게 소름 끼치는 눈 앞의 광경에서 태평할 수 있느냐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 겪고 견뎠기에 무덤덤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은 나도 이들과 같이 되는 것일까 조금은 씁쓸해졌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듣기를, 에리얼이 톨로이라는 본거지를 떠나 이곳으로 정착한 이유는 물론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답답해 잠시라도 떠나 있을 요량이었지만 이 버려진 폐허를 굳이 고른 이윤, 천장 없이 트여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마다 찬란한 빛들이 쏟아지는 별들의 운행을 그녀는 늘 고개를 들어 바라보곤 한다.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남모를 오랜 수수께끼의 해답이라도 들려주는 듯 혼자 웃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도 딱딱한 의자를 침대 삼아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그저 달이고 별이며 태양이 뜨면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환아!"
엔투가 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위를 가리키며 언질을 한다.
그 때였다.
한 순간이었다. 미처 귀를 막을 틈도 없이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은 알 수 없는 힘이 우리가 앉아 있는 작은 강단만을 남은 잔재와 같은 성당을 쓸어버리듯 무너져 내렸다. 그리곤 촛불이 있던 그 자리엔, 밀랍마저 태워버릴 듯한 불꽃이 세차게 타올랐다. 턱을 치켜세워 앞을 둘러보았다. 징그러운 뱀이라고 생각했던 생물이 검은 가루로 터져나가며 동시다발적으로 사람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시작이구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강단 아래에서 그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으며 우리를 영접한다. 그리고 모두가 모이고서야, 우리의 그녀가 모습을 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