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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의 은밀한 계약
작가 : 아란
작품등록일 : 201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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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옥과 진창 사이
작성일 : 17-07-31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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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레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로이의 역겨운 낯짝에 침이라도 뱉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몰려온 탓이다. 분노하는 세레나를 평온한 목소리로 질책했던 로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를 로이는 평온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세레나는 그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세레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대가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수를 찾아서 그에게 복수하리라. 세레나는 의지를 굳건히 했다.

 상황을 주시하던 마담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은발을 곱게 틀어 올렸고 몇 가닥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마담 랑또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레이스로 끝이 장식된 오프 드레스를 착용한 어깨가 유난히 희고 빛난다. 고운 살결을 보던 세레나는 약물을 과다하게 섭취하여 생기를 잃은 제 손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미리엄 리시오스, 그 미친 공작이 드디어 제 짝을 만났답니다.”

 

 부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한 부인들에게도 미혼 기사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꽤 흥미 있는 주제였나 보다. 세레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들을 슬쩍 훑었다.

 

 “그럴 듯한 외양을 제외하면 성격이 괴팍하여, 결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세레나는 이들의 주제인 ‘미리엄 리시오스’라는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렸다.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던가…. 중요한 인물이기라도 한 것일까.

 5년간의 온전치 않은 기억을 헤집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세레나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며 결혼 이전의 삶을 떠올렸다.

 

 “혹시 ‘그 영애’와 결혼하는 건가요? 미리엄 리시오스 공작이 가는 곳은 어디나 따라다녔던 그 여자 말이에요.”

 “그가 기사단장이었을 적, 전쟁터에도 따라가지 않았던가요? 남장을 하고! 맙소사, 다시 생각해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군요.”

 

 세레나는 누군가 불쑥 한 말에서 미리엄 리시오스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만해도 기사단장이었는데, 이젠 자리에서 물러나 완전히 공작의 업무만 수행하는 모양이다.

 그는 황제의 오른팔이었으며, 세레나가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던 길에 딱 한 번 마주쳤던 적이 있는 남자였다. 기억 속에 묻어뒀던 인물을 이렇게 떠올릴 줄이야.

 접점이 없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튀어 올라와 세레나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미리엄 리시오스는 귀족이 얽힌 사건을 조사하는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사기꾼 알렉이 납치되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래서 폐하께서 미리엄 리시오스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특별히 가면무도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또 다시 귀족부인들이 호들갑을 터뜨렸다. 가면 무도회라니. 세레나는 귀족부인들에게 동조했으나 속이 따가워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에나 무도회에 참여했다. 그리울 적의 이야기다.

 세레나는 오랜만에 참석한 다과회에서 엿들은 가십거리를 정리했다. 작은 정보라도 모으고, 모으면 로이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마약을 부인에게 먹이는 것이 로이가 혼자라는 보장도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증거를 찾아서 황제께 고하고….

 황제 폐하를 떠올리는 순간 희망에 찬 세레나의 가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폐하께 피해사실을 털어놓고 조사를 요구해달라고 한들, 과연 도와주시기는 할까? 아니 알현을 허락하실 가능성 조차도 극히 낮다.

 

 ‘황제 폐하의 속은 영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세레나는 꿈속에서 의견을 굽히지 않은 제 모습이 놀랍고, 낯설었다. 도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세레나는 이상하게도 꿈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언젠간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마담 랑또가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참석자들을 배웅했다.

 

 “다음 번 다과회에도 참석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다과회의 참석자들은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혹은 무질서 하게 마담 랑또와 뺨을 맞대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마담 랑또의 신작 드레스 발표회를 기대할게요.”

 

 세레나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마담 랑또가 드레스 디자이너라는 것을 알았다. 5년간 약에 휩쓸려 있었던 영향은 이런 사소한 데에서도 나타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귀부인들이 마담 랑또와 작별 인사를 끝마친 후, 세레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세레나는 정중하게 인사했으나, 감정이 담기지 않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로이는 이 다과에서 무슨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왜 참석하라고 한 것일까? 로이가 마담 랑또를 직접 만나 초대장을 받았다고 하니, 그녀도 로이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피해자끼리 만나 좌절해보라는 오만한 의도로 제안했을 확률도 있다.

  세레나는 의문을 감추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마담 랑또가 특유의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세레나를 불렀다.

 

 “세레나 알렉사 백작 부인”

 

 몸을 돌리던 세레나는 마담 랑또를 응시했다. 입이 시원스레 벌어져있었다. 하얀 이를 자랑하며, 랑또는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아직 부인께 드릴 말이 남아 있답니다.”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마담 랑또는 자리에서 서서 세레나가 앉아있는 모습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세레나가 불쾌함을 표기도 전에, 마담 랑또가 입을 열었다.

 

 “괜찮네요, 좋아요. 로이에게 허락한다고 전해줘요.”

 

 이상한 말이었다.

 세레나는 마담 랑또가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지워버렸다. 마담 랑또는 로이를 친근하게 부르며, ‘허락’을 운운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레나의 겉모습을 무례하게 관찰하면서!

 

 “그럼 돌아가봐요.”

 

 마담 랑또는 명령하듯 말했고, 세레나는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마담 랑또의 행동을 지적하려는 찰나 그녀의 본능이 격렬히 경고를 보냈다.

 로이와 마담 랑또 간에 뭔가가 있다.

 세레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마담 랑또의 모습을 살폈다.

 드레스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5년 사이에 크게 바뀐 것이 아니라면, 마담 랑또는 어떻게 고위귀족 못지 않게 호화스러운 액세서리를 달고 있을까?

 

 “뭘 하락한다는 말이죠?”

 

 마담 랑또가 ‘어머’하는 소리를 내더니 세레나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마담랑또는 마치 예전에도 만났었던 적이 있다는 듯이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오늘은 제정신이군요! 대꾸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렇네요. 세레나 알렉사. 오랜만이에요.

 ”…….”

 “내가 뭘 허락했는지 궁금해요? 다른 건, 더 물어볼 것이 없어요?”

 “날 어떻게 알고 있죠?”

 

 세레나는 결국 묻고 말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마담 랑또의 얼굴은 없었다.

 마담 랑또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만난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음, 내가 뭘 허락했을지 엄청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이거 말해줘도 되려나. 내 입이 가벼운 것을 뻔히 알면서 제정신으로 당신을 보낸 것을 보면, 분명 상관 없으렸다….”

 “그냥 말하기 싫으며 관두지 그래요?”

 “초점이 또렷하게 잡힌 눈을 보니, 왠지 선심을 쓰고 싶기도 하네요.”

 

 세레나의 서늘한 표정에도 마담 랑또는 방긋 웃었고, 태연하게 시녀를 부르기까지 했다.

 새로운 차를 타온 시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레나는 꽃무늬가 새겨진 찻잔 안에서 출렁이는 검붉은 액체를 보았다.

 

 “마시겠어요?”

 

 냄새를 맡자 악취가 코를 찔렀고, 현기증이 핑 돌았다. 세레나는 급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담 랑또는 손님을 챙기듯 세심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마법의 물, 이에요. 당신이 매일 마시던.”

 

 마담 랑또의 찢어진 입꼬리는 ‘마법의 물’처럼 악취를 풍기며 세레나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정원에 마담 랑또와 단 둘이 있다는 사실도 불쾌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로 했다. 비밀을 감추듯 긴장감을 파묻고 또 파묻어도, 싹을 틔우는 것처럼 불쑥 솟아나 세레나에게 비수를 꽂는다. 거지 같은 기분이다.

 

 “신작 드레스 발표회에 모델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금발 모델을 찾고 있다는 걸, 로이가 용케 알고 연락했답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세레나의 날카로운 말에도 마담 랑또는 웃기만 했다.

 

 “제 정신인 당신은 처음 봐서 매우 낯설게 느껴지네요. 하지만 로이가 왜 당신을 버리지 않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어요. 앙칼져서 괴롭히는 맛이 있는 여자인 줄 알았으면 약은 좀 더 늦게 먹일 걸 그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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