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랑또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가는 손가락에는 알이 굵은 반지가 꼽혀있었다. 백금의 얄쌍한 링이 가엽게 보일 정도로 알이 굵은 보석은 그늘 아래서도 광채를 뿜었다. 무슨 의도일까? 세레나가 노려보자 마담 랑또가 살풋 웃었다.
“로이가 내게 준 반지랍니요.”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담 랑또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죠. 혹시 기억하나요? 로이의 옛 약혼녀.”
어느 남작가의 영애라고 들었다. 이름과 얼굴 생김새는 생각나지 않았다. 죄책감이 기억을 지워버린 것일까, 세레나는 마담 랑또의 질문을 통해 과거를 헤집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저에요. 그러니 당신과 저, 둘 다 한 번씩 주고 받은 것으로 하죠.”
그녀는 깔끔하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세레나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얼기설기 마무리하는 말본새는 허탈할 정도로 재빨랐다.
“서로 한 번씩 속았다 정리하고 당신을 이대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로이를 화내지 않게 하는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마담 랑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자연스레 세레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말에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마법의 물, 아니 이젠 당신도 알 테니 터놓고 이야기 할게요. 마약을 먹고 난 뒤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붉은 입술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음험함을 뽐내었다. 세레나는 마담 랑또의 속살거림을 제지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비난 한 번 받지 않은 순진한 아이처럼 고요했으나, 세레나는 저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시퍼런 칼날에 생살이 헤집어지는 것보다 아플 것이다.
하지만 아까 결정했듯이, 세레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몸은 종잇장보다 못하여 연약하기 짝이 없으나, 세레나는 강건한 정신을 앞세워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로이가 화나는 모습이 보고 싶네요.”
마담 랑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임이 여실히 보인다. 세레나는 차분히 랑또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는 당신의 결혼식 다음날에 만났어요. 당신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걸어왔죠. 미인이 발걸음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에, 귀족 영식들의 눈이 휘둥그래졌었답니다.”
세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에 없는 이야기였으나, 마다 랑또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당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살짝 부딪친 귀족 영애의 머리위에 들고 있던 술을 쏟아 붓고. 막으려는 귀족 양식의 뺨을 후려치고. 당신을 만나기위해 파티에 참석했던 윌프레 공작가문의 사람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버릴 정도로, 대단했어요.”
말을 끊은 마담 랑또가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로이가 노리는 것이었답니다. 바로, 당신의 고립.”
그리운 추억을 이야기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날붙이처럼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갈고리처럼 고약하여 세레나의 심장을 단숨에 꿰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세레나는 눈 앞에 있는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마담 랑또는 세레나를 찬찬히 보다니 방긋 웃었다.
“던지고 싶죠? 하지만 좀 더 기다려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세레나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마음의 평정을 찾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귀에는 여전히 마담 랑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당신은 그 덕에 공작가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기회도 잃어버렸어요. 그들은 제멋대로인 당신에게 영 실망한 듯 했거든요. 어느 날부터 당신이 참석한 파티에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로이가 날 고립시키기 위해 마약을 먹였다는 거에요? 고작 그 이유로?”
“아니요, 그건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지요. 로이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당신을 이용하고 싶어 했어요.”
세레나는 눈을 치켜 뜨고 마담 랑또를 쏘아보았다. 로이의 사업이라니? 전혀 알지 못하던 이야기였다. 알렉사 백작가문이 따로 사업을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당신은 모를 거에요. 그게 정상적인 사업이 아니거든요. 혹시 노예시장이 뭔지 알아요?”
“노예… 뭐라구요?”
“노예시장이요. 더 쉽게 표현하면 인신매매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잠, 잠깐만요. 로이가 지금 인신매매 사업을, 아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마담 랑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예리한 눈빛이 세레나의 얄팍한 속내를 까뒤집는 듯 했다. 제 아내에게 마약을 먹이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과거에 평범한 남작 영애였다면 뿜을 수가 없는, 마담 랑또의 살기에 오한이 돋았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세레나를 확인한 마담 랑또가 살기를 거두었다. 세레나는 진창에 빠졌다가 겨우 숨구멍을 찾은 사람처럼 정신 없이 숨을 들이켰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당신….”
“어차피 알아도, 당신은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로이를 더 증오할 테니까. 그리고 절망 속에 죽어갈 테니까.”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세레나를 조롱한다.
“난 그 모습이 너무 보고 싶거든.”
반박하면 열린 입 사이로 비명이 솟구쳐나올 것 같았다.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세레나는 자신을 추스르는데 급급하여 마담 랑또가 제 손에 낀 반지를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도 보지 못했다. 분노와 불신 사이에 낀 세레나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세레나.”
툭툭. 마담 랑또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레나의 귀청을 울렸다. 동시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떨리는 몸이 평안을 찾았고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차분해진 것이었다.
세레나는 번쩍 고개를 들고 마담 랑또의 외견을 살폈다. 머리카락 색과 같은 은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으나, 곱게 휘어진 눈꼬리로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외관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과거에도 결코 단순한 남작 영애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레나는 웃는 얼굴이 그저 예쁘게만 느껴졌던, 마담 랑또에게서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어떻게….”
마담 랑또는 대답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서 떫기만 할 그것이 향기롭기라도 한지 만면에 웃음을 띈 채였다. 세레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담 랑또가 이제껏 마셨던 차가 마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을 섭취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법사들뿐이다. 그리고 혼곤한 정신을 깨트리고 평화를 주입할 수 있는 것도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었다.
설마 저 여자가 신관일리는 없으니…. 세레나는 두 손을 깍지 끼며 마담 랑또를 향해 물었다.
“당신, 마법사야?”
“궁금해요? 진실이 뭔지 알고 싶나요, 세레나?”
마담 랑또의 말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세레나는 말투 저변에 깔린 비웃음을 읽을 수 있었다.
“… 도대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에요?”
마담 랑또가 겉으로 내뱉은 이유에 신뢰가 가질 않았다. 로이를 증오하길 바란다고? 세레나는 입 안속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어차피 자신은 뼛속부터 로이를 증오하고 있다.
로이와 결혼한 직후 정신을 놓은 탓에 아버지를 작위를 빼앗은 알렉과 샤론에게 제대로 복수하지도 못했다. 알렉은 정체모를 것들에게 납치 살해당해 직접 복수할 기회는 잃어버렸지만, 샤론은 세레나가 로이와 결혼할 때까지 살아있었다.
원수를 떠올리는 세레나를 향해 마담 랑또가 무심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요, 세레나. 어차피 이 사실을 알아도 당신은 입밖에 낼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이야기를 견디다 못한 세레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마담 랑또의 손아귀에 강제로 앉혀졌다.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궁금하지 않아? 인신매매 사업에 당신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세레나는 불현듯 불길한 냄새를 맡았다.
“당신을 인신매매 사업의 얼굴로 만들었어. 적어도 외부인들 눈에, 노예시장의 주인은 당신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혹시 조직이 적발될 경우 귀족들은 당신을 주동자로 지목할 것이고.”
순간 세레나의 머릿속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어느 때보다 냉정해졌다. 세레나는 마담 랑또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그럼 대답해요. 로이가 인신매매 조직을 운영하는 일에, 날 대외적인 주인으로 만든 이유가 뭔지.”
“첫째는, 당신이 로이와 결혼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신이 귀족파인 라쉘티아 백작가의 피와 황제파인 웰프레 공작가문의 피를 동시에 이었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