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의 맨 뒤편에 서서, 전체 상황을 감시하 듯 주변을 둘러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복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키는 컸고 체격이 좋았다. 가려져있지만 곧게 솟은 콧날의 형상이 눈에 띈다.
유명 화가 고렝의 작품 뒤에 숨겨져 있던 금고를 찾아낸 이들은 능숙하게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선 그 안의 내용물을 찾고 있었다.
장부와 금괴, 그리고 돈뭉치. 어릴 때 부모님과 관람했던 연극에서나 봤음직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와 닿지 않았다. 위협당하고 있는 알렉부부의 모습과 그들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그리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세레나 본인이라는 사실이! 세레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동공으로 괴한들을 지켜봤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사실은 죽지 않았던 걸까?
결국 알렉부부는 금고 안의 비밀장치를 풀고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를 건네 받기 무섭게 괴한이 둔기로 알렉의 머리를 내리쳤고, 샤론의 비명소리가 메인홀을 가득 채웠다.
세레나는 점점 상황에 몰입하고 있었다. 괴한들이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본다면 들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릴 만큼.
멍 투성이이인 알렉의 얼굴을 보다가 세레나는 천천히 입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증스럽게 웃으며 아버지의 장례식을 주관했던 알렉을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레나는 그가 아버지의 진짜 동생이라고 믿었다. 목이 타 부엌으로 향했던 길에 알렉 부부의 말을 엿듣지 못했더라면! 의심 한 톨 없이 알렉 부부를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세레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괴한들은 메인홀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빨간 망토로 몸을 둘둘 감은 괴한이 단검으로 소파가죽을 찢으며 헤집기 시작했다. 나무 골조와 내장재 볼품 없이 겉으로 드러났다. 테이블이 뒤집혔고, 가문의 문양이 수 놓아진 카펫도 찢어지고 엉망이었다.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괴한이 알렉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알렉은 비명을 지르면 반항했지만 이내 저택 밖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알렉의 아내 샤론은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옷에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온갖 상상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흔들었다.
세레나는 입 속 여린살을 강하게 깨물었다. 정신이 번쩍 들고, 고통이 느껴진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바람이 몰아치며 거친 바람에 나무 잎사귀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르르꽝. 번개가 내리 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외부와 유리된 저택 내부는 기묘하게 조용했다. 세레나는 세상과 멀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 세레나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지금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때,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괴한 중 한 명이 몸을 휙 틀더니 세레나를 노려보았다.
세레나는 급히 몸을 숙였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호흡이 가빠져,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들키면 안 된다.
‘내가 회귀한 게 맞는다면! 절대로 여기서 들킬 수는 없어!’
세라나는 몸을 일으키다 균형을 잃고 말았다. 엉금엉금 기어 메인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세레나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택은 당연히 비어있다.
세레나는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들은 오늘 저택이 빌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순간 깊은 늪처럼 세레나를 잡아 먹던 고민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지금이 기회야.
혼란스러움을 불쑥 비집고 떠오른 생각에, 뇌가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천천히 뒤로 밀려나던 저택의 내부는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어느새 세레나는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몰려왔다.
세레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떠올렸다. 거기엔 알렉이 미처 찾지 못한 금고가 있지만, 그는 세레나가 접근하려고 할 때마다 매섭게 내쫓곤 했다. 심지어 집사와 하인을 시켜 다가가려 하면 떨어뜨려 놓아 평소엔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더니, 놀랍게도 숨겨진 금고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알렉일까? 아니다, 그라면 진작에 안을 비웠을 것이다.
세레나가 떨리는 손으로 금고의 문을 마저 열자, 돈뭉치가 드러났다.
금고의 장치를 건드리자 숨겨져 있던 비밀장부, 그리고 가문이 인장이 나타났다. 어쩌면 저들이 찾는 것은 인장과, 비밀장부일 수도 있다. 세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문의 인장을 가방 안쪽에 숨기고, 장부를 집어 들었다. 뒤이어 돈뭉치를 꺼내 가방에 쑤셔 넣었다. 볼품없이 크기만 한 가방이 금세 빵빵 해졌다.
세레나는 한껏 배부른 낡은 가방을 바라보다가 연락수정구를 품에서 꺼냈다.
‘예전엔 가문의 인장을 찾지도 못했고, 그냥 로이만 불렀었지.’
알렉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하기 위해 정보를 모았던 과거의 자신. 그리고 조력자로 로이를 선택했던 자신. 세레나는 잠시 고민했다.
세레나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는 봐 줄만했지만 창백한 인상이었다. 언젠간 생기발랄하여 부러움을 산 적이 있었건만….
세레나는 낡은 드레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 과거에 느꼈던 억울함과 외로움이 떠올라 세레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원래 모든 것은 제것이 되었어야 했다. 아버지가 물려받은 것이었고, 어머니가 외가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로이는 이 틈을 파고 들어 세레나를 진창에 빠트렸다.
눈동자는 거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로이에게 연락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죽는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로이와 멀어지는 것은 쉬운 선택이다. 그와 멀어지면 전과 같은 고통은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만족할 수 있을까?
이 분노가 사라질까?
세레나의 마음에서 갈등이 일었다.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잠시 정신을 놓아서 이상한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세레나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주먹을 쥐었다. 건강한 신체였다. 도망칠 필요가 없다. 로이를 만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은 것이 정말 미래의 일이었다면, 로이에게 연락해야한다. 이후 펼쳐질 일이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 완전히 같다면, 그렇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으리라.
‘내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로이가 날 속이고 진창에 빠트린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네 놈의 계획을 부숴버리겠어. 그럼 속이 시원해지겠지.’
세레나는 연락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수정구슬 안에서 뭉게구름이 일어나더니 구슬 밖으로 빠져 나와 세레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덩어리처럼 뭉쳐진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줄수록 마음이 기묘하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그 형상이 사람의 형체가 되고, 상대가 보였다.
“세레나.”
로이의 얼굴은 젊었다. 세레나는 제가 본 것이 꿈이었는지 진실이었는지 점점 확신할 수가 없어졌으나, 이를 익물고 입을 열었다.
“작은, 작은아버지께서….”
세레나는 연약한 목소리를 제 입에서 튀어나오는 연약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로이와의 결혼생활이 떠올라 역겹기까지 하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듯 이를 앙다물며 말을 이었다.
납치, 금고, 장부, 무리들.
두서 없는 이어지는 세레나의 말에, 로이 목소리에 당황이 차 올랐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로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세레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몇 번 떨었다.
대화하는 중간에도 세레나는 기억을 헤집었다. 머리에서 열이 오를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그녀가 겪었던 미래와 똑같았다.
‘내 기억력이 이렇게 좋았던가?’
세레나는 뛰어나게 변모한 제 기억력에 놀랐으나, 차후에 생각하기로 결론지으며 로이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로이, 어떻게 해야 하죠? 당장 경비대에 신고해야 할까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내가 갈게요, 레이디 세레나.
연락구슬이 종료되고 안개가 모두 사라지자, 세레나는 구슬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가방의 끈의 단단히 동여내고는 침실로 뛰어갔다. 급히 가방을 숨길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결국 세레나는 침대 아래에 가방을 밀어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초라한 가방이 이제 금고인 셈이다.
세레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보며, 세레나는 다짐했다.
이제는 결코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받은 대로 돌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