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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의 은밀한 계약
작가 : 아란
작품등록일 : 201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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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되찾은 기회
작성일 : 17-07-31     조회 : 302     추천 : 0     분량 : 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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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가 도착하기 전,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메인홀에 접근했다. 샤론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자 숨결이 느껴졌다. 세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이렇게 죽어버리면, 내 손으로 복수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잖아. 그것만은 절대 안돼.'

 

 세레나는 몸을 휙휙 돌리며 메인홀을 살폈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가구가 엉망으로 부서지고, 알렉의 피로 카펫이 더러워 진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현재 상황을 점검하는 세레나의 귀에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로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기사 정복차림이었으나, 단추 몇 개가 풀려있었다. 단정하던 회색머리카락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어 이맘때의 로이 답지 않았다. 로이는 쓰러진 샤론을 발견하고 달려갔다가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선 세레나에게 다가왔다.

 

 세레나는 굳게 다물린 로이의 입술을 보며, 그가 퍽 순진무구해보인다 생각했다.

 

 “레이디 세레나, 괜찮습니까?”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로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세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180센티를 훌쩍 넘어가는 큰 키를 지녔으면서도 대화 중에 눈을 마주치고자 무릎을 굽히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도 신경 써줄 만큼, 다정한 남자라고. 세레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의 청혼을 진심이라고 여겼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들은 무사할겁니다.”

 

 염려하는 듯 어설프게 찡그린 눈을 보며 세레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눈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세레나를 제 멋대로 이용하고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그 로이가 맞을까? 세레나의 마음속에 일어난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죽었다가 과거로 되돌아 온 것이 더 거짓말 같아.'

 

 그 순간 목이 욱신거렸다. 세레나는 마담 랑또가 졸랐던 목을 매만지며 머리를 숙였다.

 마치 그녀의 몸이 진실을 깨달으라 경고하는 것 같았다.

 

 로이에게 이끌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은 세레나는 메인 홀을 둘러보는 그를 관찰했다. 로이는 핏자국이 번진 카펫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2층의 입구를 살폈다. 납치 사건 당시 세레나가 서 있던 곳이었다. 그러자 그녀를 노려보던 괴한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정말 괴한이 날 못봤을까? 날 일부러 놓아줬을 리는 없지만 뭔가 이상한데....'

 

 그때는 한 순간 눈이 마주쳤다 생각했고, 그 남자가 쫓아오리라 여겨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필사적으로 도망쳤었다.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세레나는 의문스러운 구석이 적잖이 있다

 

 생각에 잠긴 세레나를 향해 로이가 잔잔한 미소를 뿌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경비대에는 연락을 넣었습니다. 곧 귀족 사건을 전담하는 기사단이 도착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레이디 세레나.”

 “경비대요?”

 

 세레나는 섣부르게 말을 잇는 대신에 입을 다물었다.

 

 로이는 무슨 생각인 걸까. 사람의 표정만 보고 상대의 생각을 정확히 읽는 능력 따윈 없기에 로이의 행동이 의아하기만 했다. 이 사건을 경비대에 신고하다니? 가문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져 비웃음 거리가 될 것임을 것을 뻔히 아는 로이가!

 

 이렇게 생각하니, 로이의 태도가 확실히 이상했다. 세레나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회귀 전의 기억을 살피면, 로이는 알렉 부부가 가짜 친척임을 모르던 상황에서도 세레나를 신경써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알렉 부부의 명을 받은 시녀가 세레나의 보석을 훔쳤고, 화려한 드레스도 어느 날 모두 사라졌다. 낡은 드레스만 빼곡하던 드레스룸을 떠올리던 세레나의 손이 작게 경련했다. 그런 세레나를 위로하며 드레스와 보석을 선물했던 것이 로이였다.

 마치, 곤경에 빠진 세레나에게 구명줄을 내려주듯…, 로이는 항상 그러했다.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압니다, 레이디 세레나. 걱정마세요, 가문의 명예는 절대적으로 지켜질 겁니다.”

 

 그 순간 기시감이 세레나를 사로잡았다.

 회귀 전의 세레나도 알렉이 납치당하는 것을 목격하고선 로이에게 연락했다.

 그 당시 그녀는 로이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알렉이 가짜라는 증거를 모은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봐 두려워했었다. 그 감정이 이기적이라 생각하며, 반성까지 했었고!

 

 세레나는 과거의 제가 퍽 순진하여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다가, 멈칫 놀랐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꿈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스스로에게.

 

 세레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로이가 다시 세레나를 위로했다.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세레나의 걱정을 덜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제 아버지께서도 곧 소식을 접하실 겁니다.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괴한들을 잡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세레나는 입 속에서 떠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로이가 세레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조심스러운 접촉임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느린 손길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저를 삼켰고, 뱃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세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 손이 얼마나 차가움을 품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안다. 세레나는 점점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에서 신빙성이 느껴졌다. 헤어나올 수 없는 기시감이 그녀를 뒤덮고 있었다.

 

 “제가 옆에 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세레나.”

 

 로이는 세레나의 턱을 들어올리며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속내를 들키는 줄 알았다. 세레나는 발을 적시는 증오를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발자국소리에 세레나는 로이에게 시선을 떼고 정문을 쳐다봤다.

 활짝 열린 문으로 비에 젖은 제복을 입은 장정이 두 어 명 들어왔고, 검은색 비옷을 입은 무리가 뒤따라왔다. 저벅저벅, 기사단의 발걸음 소리는 진흙을 꼬리로 남기며 위풍당당함을 자랑했다.

 

 가장 앞에선 남자가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며 비옷을 벗었다. 흰색 제복과 대비되는 군청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던 세레나는 은회색 눈동자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냉정한 눈이었다, 생각하는 순간 눈 앞에서 빛이 튀었다. 세레나는 간헐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왠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니, 방금 전에 저택에 들어온 '기사’의 얼굴이었다. 하얀 빛이 점점 강해져 세레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부심이 가신 듯 하여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흐릿하던 풍경도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세레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 밤 중의 정원이었다.

 서서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 미리엄 대장이랑 대화하는 중이었어.’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미리엄 대장과 함정을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낯선 상황처럼 느껴졌지?’

 

 그때, 미리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의 숨결이 피부에 닿았고,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숨쉬는 것도 잊은 채로 그의 옷자락을 쥐고, 그에게 체중을 의지하며 기대었다. 단단한 팔이 세레나의 허리를 휘감는다. 그가 가볍게 힘을 주어 당기자 세레나의 몸이 완전히 그에게 기울여졌다.

 

 빈틈 없이 옭아맬 요량인지 허리부터 시작하여 배, 가슴까지 맞붙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것을 느끼며 세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돼.

 

 세레나는 그를 밀어낼 요량으로 손에 힘을 주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낮은 진동이 배를 타고 그녀에게 전해졌다. 미리엄이 웃고 있었다. 세레나는 짜증을 담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때렸지만, 떨림이 강해질 뿐이었다.

 그때, 세레나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강하게 밀어 붙이는 미리엄 덕분에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세레나는 허공에 손짓하다 가까스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을 수 있었다. 그 틈에 벌어진 다리 사이로 미리엄의 허벅지가 불쑥 들어왔다.

 

 정신이 없다. 세레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며 눈을 깜박거렸다.

 

 눈을 내리깐 미리엄이 거친 욕망을 담은 눈으로 세레나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노골적인 눈동자에, 세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속눈썹이 빼곡히 박혀 있는 미리엄의 눈꺼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1초만 지나면, 그의 입술과 맞부딪칠 것이다. 건조한 입술이 닿고, 축축한 혀가 밀려 들어 입 속을 헤집으며 숨을 삼킬 것이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할 생각이지? 격렬할 접촉을 떠올리는 세레나의 얼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숨결이 닿아 얽히고 이내 거칠어 진다. 세레나는 질끈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미리엄은 여전히 세레나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얼굴 각도가 살짝 바뀌고, 코가 살짝 부딪쳤다가 윗입술이 닿았다.

 세레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말이 이어질 때마다 입술이 부딪쳐 뭉그러졌다. 미리엄은 세레나의 입이 열릴 때마다 입술을 붙였다. 의도적인 행동을 알아차린 세레나는 질색하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세레나의 손이 뻗어지기가 무섭게 미리엄이 두 손을 잡아채고선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아주 여유로워 보이는 행동에 세레나는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처지에 발길질을 했건만, 미리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밀착해 오는 그의 단단한 몸을 느낀 세레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지금 보복하는 거야 뭐야? 이 망할 남자가! 세레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정말….”

 

 분통을 터뜨리는 세레나의 귀로 미리엄의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목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남자의 음성에 세레나는 또다시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 사이 미리엄이 세레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살덩이가 쇄골을 스치고 쯉쯉거리는 소리에 세레나는 어깨를 둥글게 움츠렸다. 이어 뜨거운 혓바닥이 목 줄기를 타고, 귓불에 다다랐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고, 뒤이어 귓구멍을 파고드는 살덩이에 경련하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미리엄은 집요했다.

 

 스테이크를 씹듯 잘근잘근 귓바퀴를 씹고 나서야 미리엄이 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나?”

 

 세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은 다 제 잘못이다. 마침내 세레나는 몸에 힘을 뺀 채로 미리엄에게 기댔다. 다시 다가 오는 그의 얼굴을 보다 곁눈질로 미리엄의 등 너머를 살폈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사람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저 인영만 확인할 수 있었던 세레나는 뒤로 몸을 잡아 빼며 눈을 찌푸렸다. 그 여자일까?

 

 “그 여자에요.”

 “그래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세레나는 미리엄의 목소리에 담긴 불쾌함을 읽었다. 그녀는 섣불리 의문을 표하는 대신 그에게 몸을 밀착하며 속삭였다.

 

 “내 다리 사이에 있는 허벅지 좀 치워줄래요? 팔도 좀 풀어줘요.”

 

 세레나의 시선이 닿는 곳을 힐끔 쳐다보던 미리엄이 천천히 응답했다.

 

 “내가, 왜?”

 “지금 자세는 누가 봐도 저보다는 대장님이 적극적이니까?”

 

 파티 도중에 몰래 빠져나간 젊은 남녀 귀족이 정원에서 이러쿵저러쿵 일을 하고 있잖아요? 세레나는 말을 덧붙이며 미리엄을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얼굴을 불쑥 들이 밀었다. 쪽 하고 입술이 부딪히고는 떨어졌다.

 

 “우리는 계약에 성실히 임할 필요가 있지.”

 “저기, 대장님.”

 

 세레나는 참았던 한숨을 토했다. 이 남자 도대체 뭘 착각하고 있는 걸까?

 

 “우리 계약은 요즘 유행하는 계약결혼이나, 계약연애가 아니에요.”

 “그랬던가?”

 “네.”

 

 손목을 붙든 미리엄의 손아귀에서 힘이 약해졌다. 세레나는 잽싸게 그를 뿌리치면서도 혹시 지켜보고 있을 관객이 의심할까 앙탈부리는 여인처럼 교태 어린 행동을 꾸며내었다. 얼마나 대단한 영광을 누리자고 이러고 있는 걸까. 세레나는 한심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가벼운 의문을 담은 물음에 세레나는 코웃음 쳤다. 이 망할 남자가 시치미를 뗀다.

 세레나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미리엄의 어깨에 얹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두 다리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미리엄의 허벅지가 불편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린 납치사건의 범인을 쫓기로 한 것뿐이잖아요.”

 “그랬군.”

 “네, 그랬죠.”

 

 미리엄은 가볍게 세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닿을 듯 말 듯 보드랍게 부딪혔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간질거림을 느끼기는커녕 시큰둥하기만 했다. 세레나는 흥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럼 이건 그대가 너무 매력적인 탓이군.”

 

 미리엄의 뻔뻔한 말에 세레나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으나,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받아 쳤다.

 

 “뭐, 그렇다고 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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