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빛이 폭사했다. 세레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의 몸을 잡아주었다. 세레나는 미리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다가,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메인홀이었다. 처음부터 정원에 발을 디딘적이 없었다!
맙소사.
로이가 걱정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세레나를 살피고 있었다. 세레나는 눈을 굴려 눈이 마주쳤던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이름은 미리엄, 미리엄 리시오스였다. 그녀가 꿈에서 키스한 남자가, 바로 이 남자였다.
기사단장, 미리엄 리시오스.
세레나의 집요한 시선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는 남자의 몸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선을 피했다.
방금 본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서서 꿈이라도 꾼 것일까?
세레나는 힐끗 미리엄 리시오스를 살폈다. 장신에 날렵한 체구였지만 타이트한 제복 아래 짜인 근육은 단단해 보였다. 허리에 찬 검을 확인한 세레나는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남자는 고개를 돌려 메인홀을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어조로 운을 뗐다.
“피해자는?”
미래와 현재의 기억이 뒤섞여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이름을 더듬어보았다. 삼일 전에 있었던 티 타임에서 붉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주최자가 이 남자의 흉을 봤었더랬다.
세레나는 기억을 상기시켰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티아라를 자랑하듯 착용했던 발트빌 백작 부인의 주최로 열린 티타임이었다.
“세상에, 폐하께서는 미리엄 리시오스 기사단장을 왜 그렇게 신임하시는 걸까요?”
백작부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영애들의 시선이 곧장 모였다.
“전쟁터에서 버리지 못한 거친 성미를 가진 남자를 뭐가 좋다고 그러시는지…. 발트빌 백작께서도 탐탁지 않아 하시지만, 어쨌든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버려 두시는 거죠. 흠, 그건 그렇고, 미리엄 리시오스 단장이 또 일을 쳤다는 말 들으셨어요?”
부채를 살랑거리며 묘한 각도로 입을 가린 발트빌 백작부인은 티타임의 참석자를 쭉 둘러보고선, 마치 고양이가 두 발로 걷는 모습을 목격한 것인 마냥,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이야기하듯 작게 속살거렸다.
“외모에 정신이 나간 다리아 영애가 주제도 모르고 미리엄 리시오스 단장에게 고백을 했다는 소식을? 영애들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남자’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오만한 인물이잖아요? 다리아 영애도 참.”
영애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호들갑 떠는 영애에게 눈치껏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무튼 그 미친 작자가, 어머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했네요. 어쨌든 ‘그 남자’가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아 영애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지 뭐에요?”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바로 옆에 앉은 영애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세레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뻔 했다가, 반쯤 올라간 팔에 영애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혀 아주 잠시간 눈을 굴렸다. 망할 것들. 이래서 티타임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레나는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올리고는 입을 살짝 벌린 뒤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더 충격적인 건 이 가녀린 목소리지. 가장 보수적인 가문의 영애들의 티타임이라 새처럼 짹짹거리는 흉내가 필수라니. 세레나는 체념하고 말았다.
영애들의 관심이 다시 주최자에게 돌아갔다. 세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백작 부인의 입에 집중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관심을 유도하는 걸까?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다리아 영애가 목에 상처를 입고도 ‘그 남자’ 품에 냅다 안 겼다지 뭐에요?.”
종달새처럼 명랑한 목소리로 ‘어머, 어머.’ 감탄사를 토했던 영애들이 인상을 찌푸리는 백작 부인의 미간을 보고 즉시 입을 다물었다. 세레나는 입을 가린 손 뒤에 숨어 촌극을 비웃었다.
“흠흠.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따로 있어요, 귀여운 종달새들. 그걸 목격한 ‘그 영애’가 눈이 뒤집혀서 다리아 영애의 머리를 쥐 뜯었답니다. 귀족뿐만아니라 상인들도 종종 지나가는 그 거리에서요! 어쩜 교양 없기로서니.”
교양이 없는 인물은 아마 발트빌 백작 부인일 것이다. 세레나의 소감과 상관 없이 백작 부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서로 드레스를 잡았는데 하필 그게 필쥬롱 살롱의 신상이었다지 뭐에요?”
백작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와 다르지 않게, 영애들은 무척 재미없는 이야기에 매우 열심히 환호하고 있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세레나는 매와 같은 눈으로 참석자를 일일이 살피던 백작부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세레나 라쉘티아 영애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레이스로만 이루어진 화려한 드레스에요. 고루한 드레스를 수선해서 입고 다니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오늘도….”
백작 부인은 미안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동시에 당황스러움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부채를 팔랑거렸다. 종달새처럼 떠들던 영애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고의임이 분명한 백작 부인의 말을 꼬집는 대신 세레나는 빙긋 웃었다. 이 정도는, ‘사기꾼 샤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작 영애셨던 제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드레스랍니다. 발트빌 백작 부인의 티타임에 참석할 기회를 얻는다면 꼭 착용하리라 다짐했었죠. 부인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당혹함이 담긴 노란 눈을 보며 세레나는 쐐기를 박았다.
“어머니의 가문은 보수파로 유명했으니, 의미가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발트빌 백작 부인께서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은, 발레나 웰프레였다. 발트빌 백작가문은 윌프레 공작 가문에 이어 보수파 귀족들이 주총 하는 가문이다.
실수를 깨달은 백작 부인은 입을 다물고 부채만 흔들었다.
세레나는 숨 죽인 영애들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자신과 백작부인을 번갈아 보는 눈은 티타임이 파하면 여기저기 소문을 낼 기세로 반짝였다.
소기의 목적을 고려하더라도 발트빌 백작 부인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세레나는 너그러운 인물의 탈을 쓰고 남은 말을 이었다.
“어머, 역시 그러셨군요. 누군가 제 드레스를 두고 고루하다 비웃을 까봐, 제가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운을 떼주신 게지요?”
발트빌 백작 부인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해왔다.
“발레나 웰프레, 그분의 성함을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걸요, 세레나 영애.”
세레나는 백작 부인의 누그러진 표정을 보고 다시 방긋 웃었다. 백작 부인은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티타임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아무튼 레이스 드레스가 찢어지는 바람에 영애 둘 모두 거리에서 알몸뚱이가 되었답니다! 미리엄 리시오스 단장은 그 우스꽝스럽고 가여운 광경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해요. 정말 어쩜 그렇게 교양이 없을까요?”
백작 부인은 교묘하게 두 영애와 미리엄 리시오스 단장을 동시에 비난했다. 영애들의 어머, 어머하는 호들갑이 점점 익숙해졌다. 세레나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따라 웃었다. 분노로 일렁이는 감정이 드러날까 세레나는 눈을 내리깐 채였다. 언젠가 밟아주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사기꾼 샤론을 감옥으로 보내고 난 뒤에 되갚아줘도 늦지 않다.
회상을 마친 세레나는 머리를 때리는 듯한 둔통을 느꼈다.
놀랍게도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미래에 대한 기억도, 지금 이 시점에서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세레나는 기사단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귀족간의 사건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이들이다. 로이의 장담대로 최고인, 미래에서도 유명한 미리엄이 이끄는 기사단. 이번 사건을 해결할 능력자들임은 틀림 없으나…….
세레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로이의 장담을 믿어서 어디에 쓸까?
세레나는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디, 세레나?”
세레나는 로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비대원과 그 미리엄 리시오스 단장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인사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던 세레나는 비옷을 짜기 시작하는 기사단을 목격하고는 이마를 짚었다. 소문대로, 무례한 작자들이다. 세상에 어느 기사단이 귀족가의 문양이 새겨진 카펫을 더럽힌다는 말인가! 엉망이었던 메인홀은,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정말….”
세레나는 열리던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택이 아니다.
리시오스 단장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냉정한 눈과 다시 마주친 세레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발트빌 백작 부인은 싫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확실히 재수 없는 남자다.
세레나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막 메인홀에 들어온 경비대원 하나가 반색을 하고 달려왔다. 사슴처럼 둥그런 눈을 가진 여자였다. 갈색 고수머리는 부스스했고, 상의는 단정하지 못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다른 경비원들과 달리 무구를 착용하고 있지도 않았다.
로산느 미타. 세레나는 그녀가 직접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에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제 믿지 않을래야 믿을 수가 없다.
세레나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진짜로, 되돌아 왔다.
세레나는 로산느 미타를 보며 그녀가 내뱉을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로이 알렉사 경이셨군요!’
잠시 뒤, 로산느 미타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 진짜로 로이 알렉사 경이셨군요!”
정말, 하. 미래에서 보았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현실이라니, 참으로 미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