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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의 은밀한 계약
작가 : 아란
작품등록일 : 201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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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되찾은 기회
작성일 : 17-07-31     조회 : 249     추천 : 0     분량 : 5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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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레나의 생각과 관계 없이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은 남에 불과한 사이가 아닌가? 그리고 로이 경은 약혼녀가 있지 않았나?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조심하게. 귀족 사이의 소문은 발이 없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번지니까.”

 “리시오스 단장님께서 직접 소문을 언급하실 줄을 몰랐군요. 단장님이야 말로 다양한 소문에 가장 밀접한 분이 아니십니까?”

 

 세레나는 제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회귀 전의 그녀는 둘의 대화에 깜짝 놀라 로이를 말렸다. 일개 기사 단원이 단장에게 할 법한 말치고는 수위가 높았으니까. 세레나의 말은 귀족 영애의 철 없는 도발이라치고 수습할 수 있으나, 기사끼리의 대화는 경우가 달랐다. 하극상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가능할 정도니까.

 

 그래서 그때의 세레나는 로이가 곤경에 빠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세레나는 냉정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로이가 먼저 물러났다.

 

 대화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세레나는 숨을 고르며 상황을 파악했다. 메인홀은 아까의 비명소리와 집기가 부서지던 소음이 사라지고 늪처럼 진득한 침묵 속이었다.

 

 거슬릴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침묵.

 

 약물에 중독되어 헤롱거릴때면 꼭 이런 정적이 흘렀다. 참지 못한 세레나는 로이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정말 회귀한 것이라면, 로이보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손을 잡는 것이 옳다. 거기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대면하자마자 이상한 장면을 보기까지 했고. 그게 어쩌면 또 다른 미래일 수도 있다.

 

 약물에 절어있을 때보다 생각이 명쾌하게 흘러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예전의 그녀처럼 단호한 행동이 튀어나왔다. 마치 꿈속에서 황제에게 당당하게 의견을 주장했던 자신처럼.

 

 “작은 아버지께서.”

 

 세레나는 의도적으로 알렉을 친밀하게 지칭했다가 입을 닫았다. 거북하여 토가 나올 지경이니, 차라리 현재 백작과 사이가 나쁜 전백작의 딸로 비치는 것이 훨씬 낫다.

 

 “백작님께서 납치당하셔서, 저도 모르게 예민해졌나 봅니다. 리시오스 경께서 불편하시다면 호칭은 바꾸겠습니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모로 틀었다.

 

 “리시오스 경.”

 

 세레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

 그와 마주하고 있던 세레나는 그의 눈동자가 정면에서 빗겨난 곳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로이의 등과 닿은 세레나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아차 하고 손을 치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엄 리시오스의 입이 열렸다.

 

 “세레나 라쉘티아 백작 영애. 그대의 이름을 허락해주겠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세레나는 슬그머니 주변 사람들을 훑었다. 물기를 짜며 호들갑을 피우던 기사들이 정자세를 하고 있었고, 경비대원들도 그 옆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리엄 리시오스와 관할싸움을 하던로산느 미타 경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고개가 미리엄 리시오스와 세레나를 번갈아 보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세레나는 결국 참았던 한숨을 쉬었다.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리시오스 경.”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걸, 세레나.”

 

 정중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순식간에 처음으로 되돌아 온 말투를 듣고 세레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의 미리엄 리시오스가 어떤 남자인지 실감했다.

 

 제 멋대로인 남자. 그런데 또 심장이 내려 앉는다. 세레나는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개만 흔들었다.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확실히 백작이 납치된 것을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영애만 괜찮다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들었으면 하는데.”

 

 세레나는 목격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괴한 여러 명. 키가 커 보였고, 기사들처럼 덩치가 컸고 단련된 사람으로 보였다. 금고를 뒤져 무언가를 찾는 듯 하기도 했지. 세레나는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개방된 장소였다. 듣는 귀도 많다. 백작 납치 사건은, 큰 사건이기도 했지만, 백작가의 치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로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가 않다.

 

 “여기선 싫어요, 리시오스 경.”

 

 미리엄 리시오스의 대답을 기다리던 세레나는 여자의 앓는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샤론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로산느 미타경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샤론을 부축하고 있었다.

 

 세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샤론에게 달려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드레스가 더러운 바닥에 닿아 엉망으로 망가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작은 어머니를 염려하는 마음 착한 영애로 보이길 바라며. 백작부인과도 사이가 나빠 보일 필요는 없잖아? 이번에는 똑똑하게 행동할 작정이다. 샤론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세레나는 알렉을 작은아버지라 지칭했을 때처럼 구역질이 일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샤론의 얼굴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엉망이었다. 기사단과 함께 도착한 치유마법사 덕분에 큰 상처를 치료했으니 몸에 큰 이상은 없으리라. 조금이라도 다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갑게 식은 기대는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귀족의 자리가 탐나서,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 여자였다. 세레나는 샤론의 뺨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생채기를 손톱으로 긁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나는, 이들과는 달라.’

 

 세레나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샤론을 안쓰러워하는 탓이라 여겨지길 바랐다. 백작 부인과 사이가 좋아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비치길. 세레나는 샤론의 이름에 분노를 담아 불렀다.

 

 “샤론.”

 

 샤론의 푸른 눈을 보며, 그녀의 눈 안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며 세레나는 갈리는 이를 참아내기 위해 억지로 입을 벌렸다.

 

 “샤론.”

 

 걱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샤론의 모습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애로 비치길 바랐다. 분한 마음이 속을 괴롭혔다. 이 때의 자신은, 알렉 부부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증거를 모아서 찾아가면 황제가 마음을 되돌려 가문을 되돌려 주리라고 믿고서.

 

 어쨌든 고지가 눈 앞이긴 했다. 이 맘때즘 정보길드에서 알렉 부부의 정체를 밝혀낼 정보를 찾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알려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렉이 납치 당한 이후, 정보길드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세레나는 차가운 눈으로 샤론을 살폈다.

 

 ‘당신이야? 당신이 정보를 막았어? 아니면, 로이?’

 

 회귀 전의 로이를 떠올리자 마자,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함께 터져 나왔다. 세레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누르고, 또 누르고, 참고 참았던 분노가 무섭게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마음을 억누르며 손바닥을 샤론의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굳어버린 피를 닦아내려 애쓰는 손길처럼 집요한 세레나의 손이 엉겨버린 핏자국을 걷어낸다.

 

 샤론의 눈이 천천히 초점을 잡고 있었다. “세…레나.”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샤론은 기어코 세레나의 이름을 뱉어냈다.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들은 척 외면하자, 샤론이 역겹게도 또다시 세레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 레나. 네 작은 아버지가….”

 

 맙소사.

 세레나는 헛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납치사건을 목격하고 피해자가 된 순간에도 라쉘티아 백작 부인으로 남고 싶어하는 욕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다. 백작 가문이 탐났으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이라도 했었어야지. 세레나는 어느 쪽으로 봐도 욕심만 그득한 알렉부부가 싫었다. 부모님의 자리를 뺏어가 모든 것이 미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미리엄 리시오스가 입을 열었다.

 

 “샤론 라쉘티아 백작 부인.”

 

 서슬 퍼런 목소리에 샤론의 몸이 떨렸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피해자의 부인인 샤론을 마치 범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팔의 솜털이 삐죽 솟았다. 그의 본성이 사나운 것은 알았지만, 피해자의 부인에게 까지 모질 줄이야.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세레나가 감탄하는 사이 로산느 미타경은 샤론을 등 뒤로 숨기며 소리쳤다.

 

 “리시오스 경! 이 분께서는 백작 부인이십니다!”

 

 미타 경의 품에서 샤론은 가련한 새처럼 떨었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서늘한 눈이 미타 경을 향했다가 샤론에게로 돌아갔다.

 그때, 샤론이 미타 경을 밀쳤다. 샤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팔로 몸을 지탱하고 뒤로 엉금엉금 기었다. 엉덩이로 바닥을 닦을 셈인지 우스꽝스럽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 샤론에게서는 귀족의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게 대처하던 어머니와 샤론의 꼴을 비교하니 속만 타 들어갔다. 다른 영애나 부인들이 목격했다면 라쉘티아 가문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진창에 처박힐 정도였으니,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이 입이 무겁기를 바랄 뿐이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기사님.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어서.”

 

 샤론의 대답에 세레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뒤로 넘어가고 싶었다. 차라리 의식을 잃어버리면 좋으련만! 세레나의 단단한 정신은 라쉘티아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되는 순간에도 튼튼했다. 하긴, 그랬으니까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알렉부부의 정체를 밝힐 정보를 찾았지. 연약한 정신이었다면 애초에 알렉 부부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실신했을 것이다. 회귀하자 마자 기절했겠지!

 

 “백작 부인의 정신이 성치 않은 듯싶으니, 대화는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군.”

 

 무심한 미리엄 리시오스의 말에 세레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샤론의 추한 행동을 본 로이와 미타 경은 반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심으로 샤론이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다고 믿는 듯 했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세레나의 옆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를 올려보자 표정 없는 얼굴에서 연회색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밀어진 손은 미동도 없었다. 세레나가 손을 맞잡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기사들의 기묘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다. 손을 잡자 그의 힘이 강제로 세레나의 몸을 일으켰다. 신체적 자유를 잠시 빼앗긴 세레나는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미리엄 리시오스의 발을 밟고 말았다.

 

 “어머.”

 

 삐뚤게 올라가는 눈썹을 보며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했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잘생긴 얼굴을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다. 파티장에서 가끔 그가 웃음을 터뜨렸을 때 귀족 영애의 탄식이 연회장을 뒤덮었던 이유를 납득하며 세레나는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리시오스 경.”

 “영애.”

 

 남자의 시선은 검처럼 날카로웠다. 소문의 ‘그 영애’가 이 남자에게 들러붙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탓에 콧속에 미리엄 리시오스의 체취가 들러붙었다. 진짜 회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납치사건을 목격한 탓일까, 아니면 미리엄 리시오스와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일까, 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참 만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정식으로 절차를 밟고 연락하지. 영애는 백작부인을 잘 챙겨주는 것이 좋겠어. 백작을 납치한 무리는 우리가 찾을 테니.”

 

 세레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메인홀을 빠져나갔다.

 

 기사단원들이 남아 메인홀을 조사했지만 그들이 떠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타 경은 2층의 침실에 리타를 옮겨주고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레나는 그녀의 시선에 어색함을 감추며 예의를 갖추고 배웅했다.

 

 기사단과 경비대 무리가 빠져나간 뒤 메인홀이 유난히 넓게 느껴진다.

 세레나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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