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주인 자리는 공백으로 비워둬선 안 되잖아요, 샤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니? 알렉이 살아있잖아! 그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에 알려도 모자를 판국에 어쩜 그렇게 철이 없어!”
“어머,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죠? 역사가 깊은 귀족 가문에선 어릴 때부터 교육 받잖아요. 가주자리는 공백으로 비워선 안 된다는 것을.”
세레나는 옹졸하게 샤론이 알지 못할 일을 언급하며 비꼬았다. 샤론 같은 여자에게는 이정도 수준이 딱 알맞다.
“설마 샤론, 몰랐던 건 아니죠? 샤론의 결혼 전 성이….”
세레나는 고의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샤론은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고 버벅거리며 난처해했다. 그러다 곧 고용인들의 시선이 바뀌는 것을 느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어쨌든 알렉은 네 작은 아버지야. 넌 네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 납치 되었는데도…. 정말 정도 없고, 예의도 없구나.”
“샤론. 귀족에겐 가문이 가장 중요한 법이랍니다.”
“세레나, 네가 아직 어려 철이 없겠지만….”
“잠깐.”
세레나는 샤론의 말을 끊었다.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세레나는 알렉과 샤론이 사기꾼인 것을 알아차린 뒤 복수를 위해 감추고 있었던 성질머리를 내비쳤다. 그리고 혼잣말 하듯 작게 속삭였다.
“호칭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조용히 지켜보던 게니아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움직였다. 샤론과 세레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오직 세레나에게만 허리를 깊게 수그린다. 세레나는 게니아에게 지시했다.
“샤론을 침실로 옮겨주겠어?”
“세레나! 너 감히!”
세레나는 반발하는 샤론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차분함을 유지했다.
“혼자 힘으로 무리라면, 기사의 도움을 받아도 좋아.”
“너―!”
샤론의 비명소리는 공기를 찢을 만큼 날카롭고, 거칠고,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고작 거기까지였다. 세레나는 표정 변화 없이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어갔다.
“무엇이 수치인지 모르는 사람을, 제정신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답니다, 샤론.”
“알렉이 돌아오기만 하면!”
“샤론을 특별히 예우하여 말로 끝내려고 했는데, 안되겠네요.”
갑자기 마틸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끼어들기 적절한 순간을 노리며 격렬하게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속이 훤히 보여 세레나는 픽 웃었다.
눈치 빠른 기사 두 명이 샤론을 양 옆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죄고 있었다.
처지가 뒤바뀐 것을 실감할 장면을 목격한 마틸다의 입은 거북이처럼 꾹 다물어졌다.
세레나는 대화의 첫 포문을 떼는 사람처럼 천진한 목소리로 샤론에게 물었다.
“마틸다가 주제도 모르고 백작의 사유재산이 손을 댔으니, 그에 대한 처벌을 해야하는 것이 순리겠죠?”
“그, 그게 무슨.”
의기하던 샤론은 한껏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오늘이 지나면 더러운 수작을 부리려고 별 수를 다 쓸 터였다. 샤론은 언제나 알렉이 곁에 있어야만, 제 옆에서 소리쳐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당당했다.
샤론이 사기꾼임을 알기 전에 세레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갖 일을 참아주었다. 알고나서는 한 번에 갚아줄 날을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 고작, 이 정도의 인간에게.
“더 놀라운 것은 고작 샤론의 직속시녀에 불과한 주제에, 윌프레 공작가문의 재산에 까지 손을 뻗쳤더군요.”
“아닙, 아니! 아가씨! 아니, 백작님!”
마틸다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어머니의 루비 반지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유품을 따로 숨겨두지 않았다면 송두리째 도둑맞았을 것이 분명했다. 세레나는 마틸다를 외면하며 샤론을 향해 웃었다. 그리곤 아직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는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기사단장. 그래서, 자네가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지?”
당신이 평생 간직한 그 틀, 깨부술 거야? 말 거야? 제임스가 무릎 굽히며 바닥에 엎드렸다.
“각하, 소신은 앞으로 세레나 라쉘티아 백작께 충성을 다 할 것이며, 세레나 라쉘티아 그 이름 안에서만 살아 갈 것입니다. 이는 폐하께서 인정하신, 단 한 번의 충성서약 ‘기사의 맹세’와 함께 빛날 것이오며, 제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곁눈으로 마틸다의 경악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놀랍게도 샤론은 엉성한 눈으로 불안하게 마틸다와 기사단장, 세레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사태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니! 세레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굳어 있는 표정을 유지했다.
기사단장의 맹세는 훌륭했다.
알렉이 백작자리를 차지 한 이후, 기사단장이 세레나에게 행했던 이름뿐인 맹세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충성서약이니까.
세레나는 쥐고 있는 검을 메인홀 바닥에 세로로 내리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자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백작께서 원하시는 일, 그것뿐입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45살의 성실한 기사 제임스 알카린은 세레나를 새로운 틀로 선택했다.
세레나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메인홀이 무서운 정적에 휩싸인 채로 누군가의 딸꾹질 소리만 울려 퍼질 때, 세레나의 매정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 꽂혔다.
“샤론을 당장, 내 눈 앞에서 치워버려. 도둑년 마틸다도 함께.”
**
“다시.”
세레나는 찻물을 엎었다. 루비반지를 훔쳤던 시녀 제인은 몇 번이나 이어진 차 요구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이정도 배짱을 가진 주제에.
세레나는 혀를 차며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어린 시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조용히 서 있던 게니아가 세레나를 불렀다.
“아가씨.”
“응, 게니아.”
“마음은 좀 풀리셨는지요?”
“음….”
세레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마틸다를 저택 감옥에 처박고, 샤론은 침실에 감금시켰다. 건장한 기사들이 샤론을 감시하여 누구도 그녀에게 접촉할 수 없도록 만발의 준비를 갖췄다.
“당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아가씨께서는 이제 백작이십니다. 뭐든지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어요.”
게니아는 확신에 찬 어조로 세레나의 시름을 덜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세레나의 입가에서 힘이 풀리고, 눈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게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가주의 인장은 아가씨께 있잖아요. 알렉을 납치한 놈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성하게 돌려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벌써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어요 아가씨.”
“그렇지. 어제 자정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알렉이 납치되었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어요. 아가씨에게 잘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알렉이 되돌아오지 못할테니 걱정은 미뤄두세요. 아가씨께서는 조만간 샤론을 처리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알렉이 돌아온다고 하여도 가문의 인장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만이죠! 그건 그렇고, 어떤 놈들이 알렉을 납치해줬는지 모르겠네요. 그 작자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러게, 알렉은 왜 납치 된 걸까?
세레나는 알렉에 대해 차곡차곡 모았던 정보를 떠올렸다.
알렉은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파티광이었고, 경매에 자랑하여 쓸모 없는 미술작품을 낙찰 받아오곤 했다. 조사해보니 그 미술품은 모두 다 가치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알렉은 라쉘티아 가문을 진창에 처박기로 각오한 것인지 출처가 의심스러운 광물을 거래하는 일을 중개하기도 했다.
생각을 이어가던 세레나의 머릿속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세레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의 얼굴을 털어내고는 알렉의 대한 일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에는 꼭 폐하를 설득해야만 했다.
세레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황제 폐하는 절대 증거 없이는 귀족을 도울 인물이 아님을 배웠다.
입을 다문 세레나에게 게니아의 시선이 닿았다. 걱정스러움이 잔뜩 담겨있는 눈동자를 읽은 세레나의 얼굴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다른 시종들은 어때?”
“정말 못된 것들입니다. 다들 아가씨를 칭송하기에 바쁘죠. 아이고, 아가씨가 아니라 백작님.”
게니아의 호들갑에 세레나는 크게 웃음 터뜨렸다. “넌 아가씨라고 계속 불러주렴.” 이어 입을 열려던 세레나는 응접실 밖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짖꿏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다른 귀족들처럼 죄를 저지를 시종의 팔을 자르곤 눈알을 뽑는 것은 너무 쉽잖아. 죄는 긴 시간 동안 뉘우쳐야 하는 법이지. 그들이 내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죗값을 모두 치렀으면 좋겠네.”
“참으로 너그러우신 결정이십니다, 백작님.”
게니아가 천연덕스럽게 세레나의 말에 응수했다. 동시에 응접실 문 너머에서 와장창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윽고 침묵이 찾아왔다.
세레나는 호들갑을 떨며 엉엉 울고 있을 제인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게니아가 숨죽여 웃으며 대꾸했다.
“요즘 어느 귀족이 시녀와 시종들의 팔을 자른답니까?”
“아직도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가 봐. 우리의 어린 시녀 제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