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스러운 티타임의 현장처럼, 낮은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퍼졌다. 어제의, 회귀전의 일들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날이다.
세레나는 제인이 바닥에 엎질렀을 차가 아쉬워졌다.
“아가씨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 유모가 여쭈워봐도 될까요?”
“제인이라면, 그 손가락을 뽑아야 내 화가 가라앉겠지. 감히 어머니의 반지를 훔쳤다.”
제인을 죽여야 그 분이 풀릴 것 같았지만, 눈 앞의 게니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레나는 게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다. 늙은 유모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한 법이다.
그때, 게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께서 뭔가를 준비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세레나는 게니아의 눈을 보았다. 온통 세레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온 몸으로 피력하는 게니아를 신뢰하면서도, 세레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리지 않았다.
누가 믿을까?
“고용인들을 뒷조사해야겠어.”
“한 명도 빠짐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아가씨.”
“부탁할게. 비용은 아끼지 말고.”
로이와 결혼했을 당시 세레나를 따라 이동했던 시녀와 시종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로이의 편에 섰다. 그들을 솎아내야 한다.
세레나가 결심을 되살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뒤늦게 저택에 돌아와 어제 오전의 일을 피할 수 있었던 집사였다. 그것도 알렉이 고용한 집사. 그를 좌천시키지도 않고, 해고하지도 않은 이유는 샤론과의 접점 탓이다. 정보길드에서는 자세히 확인할 수 없다고 했으나, 저택에서 함께 지낸 세레나는 알았다. 둘 사이에 뭔가 있음을.
세레나는 집사에게 가까이오라고 손짓했다. 정중한 몸가짐은 알렉과 달리 직업에 충실한 인물로 보인다. 곁에 다가온 집사는 손님, 그러니까 로이 알렉사 경이 저택을 도착했음을 알렸다.
세레나는 집사를 내보낸 뒤 게니아를 향해 물었다.
“로이가 왜 찾아왔을까?”
“전들 알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일에서 만큼은, 좀… 로이 기사님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아요.”
게니아의 발언은 무례하다고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유모가 백작의 후계자에게 할 말 치고는수위가 높다. 그러나 세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의 기억이 세레나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으니, 곱씹어봐도 로이의 행동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로이, 그 개새끼는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세레나는 게니아의 도움으로 적당히 치장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메인홀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기사단은 사건이 종료되기 전까지 메인홀을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메인홀을 지나쳐 오른쪽 복도로 들어서자 알렉이 전시해둔 미술작품들이 걸려있었고, 그 끝에 위치한 응접실의 가죽 소파에 로이가 있었다.
“레이디 세레나.”
여전히 선한 얼굴로 웃는 로이에게 세레나는 가볍게 인사했다. 맞은 편에 자리잡자, 게니아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편에 섰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로이 경.”
“평소처럼 로이라 불러주세요.”
세레나는 말없이 손에 낀 가주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로이가 입을 다물고, 말없이 세레나를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레이디 세레나께, 백작자리는 너무 무거운 짐입니다.”
“무슨 의미죠?”
“오늘 새벽, 트란티 후작가의 첫째가 납치되었습니다.”
세레나는 성급히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속내를 감추고 정중한 귀족 영식의 말을 흉내 내는 로이가 꼴사나웠다. 타 귀족가에서 누가 납치되건 간에 왜 그걸 로이가 입밖에 내고 다닐까? 이러다 라쉘티아 백작이 납치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지겠네.
세레나는 비틀리는 입술을 고정시키며,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
“알렉 라쉘티아 백작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요?”
“당신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 될 겁니다. 후계자 교육을 받은 적….”
“있지요. 당연히.”
로이의 표정에 당황이 떠올랐다. 시녀가 차와 디저트를 내려놓는 사이 정적이 흘렀다. 달칵, 응접실의 문이 닫긴 뒤 로이는 무섭게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후계자 교육을…, 진실입니까?”
“거짓이라면 어쩌려고요?”
“레이디 세레나!”
세레나의 눈은 점점 가라앉았다. 확실히 과거의 자신이 멍청했다. 이렇게 티를 내는 남자를 보고, 믿을 만하고 다정한 인물이라 여겼으니.
결국 세레나는 로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오늘 날 찾아온 이유가 없다면 그만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을 걱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화가 툭툭 끊어지고 있네요. 그럼 다시 한 번 물을게요. 로이 경은 뭘 걱정하고 있는 거죠?”
로이는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낮췄다.
“레이디 세레나, 후계자 교육을 받지도 않고, 무턱대고 백작의 자리에 오르는 건 위험합니다.”
세레나는 로이의 표정을 살폈다. 저 말의 저변에 깔린 의도는 무엇일까? 세레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로이를 살피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내가 백작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단순히 저택 안의 일을 처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법 회의에도 참여하고 대외적으로 해야 할 업무들이 많습니다. 그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레이디 세레나?”
세레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건조한 목을 달랬다.
로이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세레나는 급하게 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느긋한 손으로 딸기로 장식하고 꿀이 뿌려진 타르트를 집어 들고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지나치게 달았지만, 신경을 거스르던 것들이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 행복하네. 살아 있음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은 몰랐어.
세레나는 만족스러워 하며 촉촉한 손수건에 꿀에 젖은 손가락을 문질러 닦아 내었다.
“레이디, 세레나.”
로이가 거듭 세레나를 불렀다. 침묵과도 같이, 금보다 귀한 시간이 덧없이 버려지고 있었으나 세레나는 입을 다물고 다과를 즐겼다. 로이가 반쯤 포기한 기색으로 몸을 소파 깊이 기대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에서 깊은 한 숨이 나올 법 할 때 즈음, 세레나는 지나가듯 언급했다.
“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할래요?”
무심함을 가장한 세레나의 눈이 로이를 응시했다. 로이는 몸을 바로 세우며 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도울 수 있어요, 세레나. 알렉 라쉘티아 백작이 설령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더라도, 전처럼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지켜주겠습니다.”
“그렇군요.”
세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맘때의 로이는 알렉과 샤론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우울할 때, 다정한 친구의 얼굴로 위로를 건네주던 로이. 다만, 세레나가 미래에서 겪은 일을 고려하면 로이의 다정한 얼굴이 모두 가식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어떻게 도울 건가요.”
“우리에겐 결혼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생각이 짜맞춰지고 있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확신을 이렇게 얻게 되다니.’
결국 세레나의 입에서 비웃음이 튀어나갔다. 강렬한 반응에 로이의 눈이 의아함을 담고 확장되었다.
“세레나?”
“나와 결혼하고 싶나요?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세레나는 아직 식지 않은 차를 로이에게 쏟아 붓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적 잠시 오갔던 서찰 몇 번이 고작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약혼녀가 있고요. 당신의 그 경솔한 발언이 내게 어떻게 들리리라 생각하나요?”
“세레나, 당신에게 다른 약혼자가 있다면 나도 걱정하지 않을 거에요.”
질척거리는 변명에 세레나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떠보는 것은 지금 대화로도 충분했다.
“로이 경. 나는 아까도 밝혔습니다. 후계자 수업을 충분히 받았다고요. 저는 백작의 적통 핏줄입니다. 왜 내가 후계자 수업을 받지 않았으리라 판단했나요? 설마, 여자는 작위를 이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세레나, 오해하지 마세요. 레이디, 세레나께서 평소 언급하지 않아서 실수했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나는 그저…….”
로이의 변명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주요 골자라 함은, ‘진짜 호의로 제안한 것.’이었다. 정중한 개소리를 들으며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로이는 열던 입을 다물었고, 세레나가 들어오라 허락을 내리자 집사가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미리엄 리시오스 기사단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세레나 아가씨, 아니 백작님을 찾고 계십니다.”
세레나는 집사의 전언을 듣고 무심결에 감탄사를 흘렸다. 미리엄 리시오스라니. 차후, 정확한 이야기를 듣겠다 했지만 무턱대고 방문할 줄이야. 대단하긴, 대단한 남자네. 세레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하?”
어디선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였다. 세레나는 그의 격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딱딱한 표정을 하며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레나는 로이의 격한 감정변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와 결혼한 미래에서 잠시 보았던 진짜 표정이 로이의 얼굴에 떠올라있었다.
역시 미리엄 리시오가 대단하긴 하구나.
로이는 세레나의 동그란 눈을 보고 무슨 짐작을 했는지 어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소문대로 정말 무례한 남자로군요.”
“그런가요? 그런데, 그게 로이 경과 무슨 상관이죠?”
세레나는 로이에게 가주의 인장을 낀 손을 내보였다.
“그리고 다음부턴 라쉘티아 백작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요. 현 백작은 실종된 상태이고, ‘가주의인장’을 가진 사람은 전 백작의 적통인 납니다. 이 말은 즉, 내가 바로 백작이라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로이가 대답하기 직전,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하다 지적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세레나는 거침이 없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주세요. 중요한 손님께서 오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