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집사를 따라, 미리엄 리시오스가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레나는 적기에 그가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세레나의 예상대로 로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로이의 눈빛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고려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린 듯한 미소를 띄운 채로 세레나는 게니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게니아가 로이의 곁으로 나가갔다. 한 참 말 없이 보던 로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오겠습니다.”
기어코 백작이라 칭하지는 않는다.
로이는 미리엄 리시오스에게 목례를 건네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그리고 문이 조용히 닫혔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입 한 번 떼지 않고, 로이가 앉았던 쇼파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곤 말 없이 세레나를 응시했다. 세레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첫만남과 다르게 갑자기 빛이 터져 미래를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심장이 크게 뛴다거나 체온이 뜨거워 진다거나 하는 신체적인 변화도 없다.
회귀한 이후, 가장 평온한 상태다.
“오랜만이군, 레이디 세레나.”
세레나는 답변 없이 가주의 인장을 낀 손을 그에게 내보이면 흔들었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진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어.
“가주의 인장인가? 아니면 백작가문의 일원을 증명하는 반지?”
“인장이죠, 리시오스 경. 내가 라쉘티아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반지를 지금 경에게 보여서 어디 씁니까?”
“그도 그렇군.”
미리엄 리시오스는 엷게 웃었다. 세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리에 착석했고, 미리엄 리시오스도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남색 머리카락에 창살을 타고 넘어오는 햇살을 받아 더 푸르게 빛났다. 기묘한 빛깔이었다.
“세레나.”
이름을 허락했더니, 아예 막 부른다. 세레나는 시녀가 새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를 되찾으려 했다.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허락한 것은 세레나 본인이니 감정적으로 대꾸하면 결국 그녀의 손해다.
“그 날 부인이 정신을 놓은 듯 하여 잘 챙겨주는 것이 좋을 듯 했는데. 백작부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인사를 해야할 것 같은데.”
“샤론은 몸이 좋지 않아서 쉬는 중이랍니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매우 편안한 자세로, 마치 제 집인 양했다. 그는 이어질 세레나의 말을 기다리며, 그녀가 그러했듯이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삼켰다.
“향이 좋군.”
그의 입가에서 살짝 미소가 그려지다 말았으나, 세레나의 눈은 기가 막히게 입술이 곡선을 그리는 찰나를 잡아냈다. 그 광경은 생각보다 훨씬 보기에 좋았다.
‘정말 미남이긴 하네. 아니 미남과 미인을 섞은 외모라고 해야 할까?’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머리칼을 남색이 아닌 백금발로 상상하느라, 입을 여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다. 남자다움은 지금과 비슷하겠지만, 인간 아닌 아름다운 묘한 분위기를 풍길 것도 같았다. 그녀를 잠시 압도당했다. 약물을 들이킨 적이 없는 깨끗한 정신이 몽롱하게 풀리는 것 같다. 그래, 이런 남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 남자는 소문을 몰고 다녔고, 그것은 단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콧날만큼이나 서릿발 날리는 눈빛과 언행 때문이었다. 그의 눈은 결코 다정함을 가지고 타인을 응시하지 않는다. 무정한 눈은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죄를 들추고 비난 하는 것보다 무섭다.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면서 마주쳤던 미리엄 리시오스의 눈이 다시 떠오른다.
그런, 무정한 눈이었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한눈을 파는 세레나를 귀신같이 눈치챈 듯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뜻 듣기에는 낮은 음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법도 했지만, 목소리 깊이 배인 차가움은 듣는 이의 신경을 따끔거리게 한다. 세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나를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쳐다볼까?”
이 남자, 눈치도 보통이 아니구나. 세레나는 튀어나오려는 헛기침을 참으며 시치미를 뗐다.
“리시오스 경에게 잠시 할 말이 있어 고민했었던 것뿐입니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면서?”
“경도 내게 이름을 허락해주겠어요?”
창을 투과한 햇볕속에 먼지가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서 미리엄 리시오스는 선명한 존재감을 뿜었다. 한 낱 먼지를 빛 줄기로 착각 할 만큼.
미리엄 리시오스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자세로 세레나를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세레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무 쉬운 허락에 세레나는 얼떨떨했지만, 나쁘지 않는 결과라 여겼다. 혼자 이름만 허락하는 것은 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럼 미리엄 경. 어떤 용무로 서신도 없이 내 저택에 방문했는지 알아야겠네요.”
“직설적이군. 몇몇 영애들은 에둘러서 말하는 것을 즐기던데."
“네, 그러니까 저택엔 왜 왔다고요?”
“나는 직설적인 사람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미리엄은 말을 건네는 동안 세레나의 표정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세레나는 그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어차피 미리엄이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알렉이 납치당했단 당시의 상황을 듣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때, 언젠가 세레나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던 차가운 목소리가 응접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백작이 죽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세레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며 미리엄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의 표정은 처음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세레나의 눈이 조금 더 아래로 굴러갔다. 셔츠의 단추가 살짝 풀려있었다. 흰 기사정복과 어울리는 남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는게 언뜻 보였다. 나른하고, 거기에 더해서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외모는 정말, 흠 없이, 멀쩡하다. 다만, 외모만.
세레나는 무심히 대꾸했다.
“내가 정식 백작이 되겠죠. 변하는 건 없어요, 미리엄 경.”
“그럼 그대는 백작이 살아오던, 살아 돌아오지 않던 관심이 없다는 건가?”
무심함을 가장했지만, 세레나의 속마음에선 신경 한 자락이 툭 불거지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거스러미가 올라온 것을 목격한 순간처럼, 무시하려 해도 마음이 쓰였다.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그럼, 알렉과 샤론의 죄롤 까발려 제 손으로 밀어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알렉은 죽어서 시체로 돌아온다.’
제대로 증거를 모아, 황제께 고하고 알렉과 샤론을 제 손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세레나는 그래서 짜증이 났다. 하필 알렉이 납치되는 순간으로 되돌아 온 걸까?
세레나는 회귀한 이유가 무얼까 고민했으나, 답을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신의 자비뿐이었다. 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 황제가 곧 신이라 부르짖는 시대를 고려하면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었지만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세레나는 제 멋대로 결정했다. 알렉과 샤론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그리고 로이를 제 손으로 거꾸러뜨리라. 세레나는 손가락에 낀 가주의 인장을 매만졌다. 이렇게 찾기 쉬운 것을, 이전에는 찾지 못하여 샤론에게 끌려 다녔다. 하지만 이번엔 샤론에게 곱절로 값아 줄 것이다. 그럼 로이에겐 어떻게 복수할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로이의 무리는 반역을 획책했다. 그리고 로이 무리의 대화속에서 이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왔었다.
미래에서도 황제의 수족으로 활동한 남자.
로이와는 대척 점에 선 인물, 미리엄 리시오스.
세레나는 미리엄을 노려봤다. 그는 무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알렉이 납치된 정황을 들으려는 것 치고는 매우 불성실하다.
“그래서 여길 찾아온 이유가 뭐라고 했나요? 납치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면 미리 전갈을 넣고 방문했을 것 같으니 지금은 다른 볼 일 때문에 왓을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으니, 내가 한 번 더 묻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요. ”
“아, 그대의 시선이 뜨거워서 잠시 내 목적을 잊을 뻔 했군.”
“뭐라고요?”
“알렉 백작.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속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기백에 밀린 세레나는 차를 들이키며 긴장을 풀었다. 확실히 ‘단장’정도 되는 인물이니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 가벼운 대화로 서로를 찌르던 둘 사이에 어느덧 무거운 정적과 긴장이 흘렀다.
세레나는 작게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제 작은 아버지에요. 아시다시피, 마차사고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 저택으로 돌아오셨죠.”
“마차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알고 있나?”
“… 단지 작은 아버지께서 사고였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에요.”
“그걸 그대는 믿었고?”
“그럴 리가 있나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미리엄 리시오스 경. 불쾌한 말은 듣고 싶지 않네요.”
세레나는 화를 감추지 않은 눈으로 상대로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