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왜 재조사를 요구하지 않았지?”
“내가 요구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뜻 알 것 같았다. 그는 알렉을 납치한 일당이 그녀와 한 편인 것인지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백작이 사라지기 무섭게 가주의 인장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가 저택 내부 사정을 꾀고 있을 리는 없지만, 겉만 보아서는 세레나는 기회를 틈타 백작 자리를 차지한 여자에 불과할 것이다.
“황제폐하께는 이미 고했어요.”
“……폐하께?”
“알현실에서 나오던 길에 미리엄 경을 봤었는데, 혹시 기억이 안 나시나요?”
세레나의 눈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미리엄 리시오스를 찢을 듯 날카롭기도 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것인지 말이 없었다. 세레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폐하께 무엇을 고했지?”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배경을 떠올렸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공작이며 폐하의 오른팔. 최소한 앞으로 5년 간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인물. 귀족을 사칭한 인물을 내버려두라고 명했던 폐하의 의중을 과연 미리엄 리시오스가 몰랐을까?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요?”
“거짓말을 할 셈이라면, 지금이라도 관둬.”
단정짓는 대답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짓말이라고? 알렉부부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로이와 결혼했다. 마약에 절어서 기억조차 온전치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비아냥을 듣다가 죽었다.
그리고 살아났다.
갑자기 숨이 막힌다. 제 목을 부여잡는 세레나의 팔을 미리엄 리시오스가 손을 뻗어 막았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손을 뻗어 세레나의 팔을 쥐었다.
“내가 사과하지.”
그리고 곧장 사과를 해온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며 사람을 뒤흔들려고 한다. 이래서 조사단 대장의 자리를 맡을 수 있었던 걸까? 세레나는 제법 논리적인 생각이라 감탄하며, 대꾸했다.
“세레나, 그대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황제의 오른팔이 정말 몰랐다고요? 그게 의심하는 말 아니었나요?”
“그저 확인하는 것이었을 뿐이야. 레이디 세레―.”
“지금은 대리 가주, 즉 백작이에요. 미리엄 경.”
“황제께 정식으로 인가 받은 것은 아니지 않나?”
세레나는 미리엄의 오만함을 피부로 실감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제 멋대로 말을 늘어놓는 미리엄을 실제로 만나니 황제 말고는 그를 다룰 이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라 곤두섰던 신경도 흐물흐물 풀린다. “나는 백작 칭호보다, 이름이 더 좋군.” 미리엄 리시오스는 마치 농담을 뱉은 듯 입가엔 옅은 미소를 드리웠다. 제 딴엔 분위기 전환을 하려는 모양이라 세레나는 쓴 물을 집어 삼켰다. 이 남자랑 손을 잡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알렉은 귀족 사칭범이에요. 나는 황제 폐하께 고했고,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는 증거가 없다고 물러나라고 하셨죠.”
“폐하께서?”
미리엄 리시오스의 몸이 앞 쪽으로 기울여졌다. 세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한 치의 재고도 없이 그러셨지요.”
미리엄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새였으나,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다. 곧바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알렉 백작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
“들었…죠.”
“그리고 폐하께 어떤 증거를 제시했지?”
세레나는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그녀는 증거도 뭣도 없이 찾아갔다. 제가 들었다 고했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는 믿을 수 없다 하셨고, 가정불화는 본인들이 알아서 처리 하라고 했지. 세레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알현실을 나왔고, 무표정한 미리엄 알렉사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대로 달음박질 쳤었다.
그래서 세레나는 증거를 모았다. 숨겨둔 비상금을 털어 정보길드에 의뢰도 했으나 알렉이 납치당한 뒤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이후 정보길드와 연락도 끊어졌고, 샤론이 미쳐 날뛰었고 세레나는 어느 순간 고립되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가주의 인장을 찾았고, 저택을 손에 넣고, 그리고 미리엄 리시오스와 독대 중이다.
세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미리엄 리시오스에게 청했다.
“그래서 미리엄 리시오스 경에게 의뢰를 하고 싶어요.”
“기사단에게 의뢰를 청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지금이라서 할 수 있는 의뢰이지요. 백작가문의 영애가 기사단에 신고했다면, 알렉의 귀에 먼저 들어갔을 겁니다. 저는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에요.”
“애초에 황제 폐하께 증거도 없이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고작 백작가문의 영애’가 말이야.”
그러나 미리엄의 말이 사실이라 결국 세레나는 입술을 비틀고 말았다.
미리엄의 눈이 세레나의 입술을 향했다. 세레나는 짜증을 그대로 드러내며, 얼굴에 씌웠던 가면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따지만 당신도 고작 기사일 뿐이죠. 그러니 말다툼하는 건 이쯤 합시다. 짜증나니까.”
미리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그 미소가 다시 나타났다. 세레나는 눈 앞의 남자가 미친 작자인걸까하고 탄식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유쾌함을 느꼈던 걸까? 오만하고, 거기에다가 미치기까지 한 남자와는 최대한 멀리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탄식만 터져나온다.
“그러니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줘요, 미리엄. 큰 일을 겪은 가문에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을 하시는 중이니까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미리엄 리시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훤칠한 키에 고개가 뒤로 꺽일 지경이었다. 세레나는 멍청한 스스로를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뢰에 관한 건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몹시 당황스럽게도, 미리엄 리시오스는 그 말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어쩌자는 거야?
**
라쉘티아 백작 저택에서 빠져나온 미리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접실이 있을 위치를 바라보는 그에게 부관이 조용히 다가온다. 미리엄은 눈만 굴려 상대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부관은 미리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법으로 흔들림이 사라진 마차 안은 무척 조용했다. 미리엄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부관은 상사를 힐끗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식한 범인 새끼의 꼬리를 밟아서 좋아한 것이 어제였는데, 사건이 이렇게 감당할 수 없이 커질 줄은 몰랐다. 미리엄을 따라가면 출세길이 열렸을 줄 알았는데, 출세길은 커녕 엄청난 일감만 들어온다. 부관은 다시 한숨을 크게 토했다. 미리엄에게 솔직히 물어보기엔 무섭다. 그는 제 상사의 변덕스러운 성질머리를 매우 잘 꾀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 스스로를 자부했으니.
“왜?”
망설이는 부관을 알아챈 미리엄이 무심하게 운을 떼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찌푸려진 미간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두통이 거셌다. 부하놈이라도 똑똑하게 처신하면 머리가 덜 아플법도 한데. 부관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굴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저를 직시하는 미리엄의 눈을 보고는 쭈뼛쭈뼛 입을 연다.
“어쩌시려는 생각이십니까?”
곧장, 부관의 답이 되돌아 왔으나 매우 모호한 질문이었다. 황제의 닦달이 귀찮아서 일을 받아 들은 것이 실수였나. 부관이 이렇게 멍청해진 것도, 제 경고를 잊고 모호한 질문을 입에 올린 것도 황제의 지나친 일 욕심 탓이 분명하다.
미리엄은 지나친 업무로 뇌 한쪽이 마비된 것 같이 추상적인 말을 내뱉는 부관에게 친절히 언질을 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말 세레나 라쉘티아 백작영애도 가짜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미리엄은 세레나 라쉘티아 영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귀족 영애치고는 수척한 인상이었고, 입고 있는 드레스도 수수했다. 미리엄은 마차 구석에 놓은 서류더미를 집어 들었다. 종이가 촤르륵 소리를 내고 빠르게 넘어간다. 일반적인 동체시력으로는 한 글자도 확인하기 어려운 속도임에도 미리엄은 손쉽게 원하는 내용을 찾아냈다.
“세레나 레쉘티아, 나이 스물 한 살. 그리고…로이 알렉사와 그의 약혼녀 란드레 쥴트도 같은 나이로군.”
갑작스런 미리엄의 행동에 부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사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르겠다고 물어보는 순간 면박이 돌아올 것이요, 어색하게 아는 척을 했다가는 호된 질책이 날아들 것이다. 부관은 습관처럼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부관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어설픈 것보다 멍청한 것을 싫어하는 미리엄의 성격을 꿰고 있는 부관이 싫은 기색을 감추며 맞장구를 쳤다. 뭐라도 아는 것을 토해내야 한다.
“뭐, 설마 귀족 가문 세 군데에서나 아기를 바꿔 치기 했을까요?”
미리엄은 말없이 부관을 노려보았다. 부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딘가 분노한 기색이 엿보이는 상사의 시선을 피했다. 뭘 잘못 말했지? 평소처럼 대꾸했을 뿐인데. 부관은 옳은 대답을 찾기 위해 머리가 빠져라 뇌를 굴렸다.
“뭐, 꼬, 꼭 세레나 라쉘티아가 아니라, 로이 알렉사나, 뭐 란드레 슐트가 바꿔치기 된 것일 수도 있죠. 하, 하.”
결국 부관이 선택한 것은 발 빼기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온전히 뱉지 못하여 개에 물린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미리엄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키도르 왕국 쪽에 파견한 첩자는 아직도 명단을 입수하지 못한 건가?”
“아직 보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장님.”
“왜.”
“그 명단을 찾을 수 있을 까요? 키도르 왕국이 아기 바꿔 치기로 우리 제국에 침투시킨 첩자들 이름을 쉽게 유출시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부관의 순진한 의견에 미리엄은 서류뭉치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또 무슨 실수를 했는지 걱정하는 듯 했다. 미리엄은 팔짱을 끼면서 쿠션에 몸을 기댔다.
“… 못 찾으면 어쩔 건데? 수사 실패했다고 보고하고, 귀족 중에 첩자들이 수두룩하니 황제 폐하께서 첩자를 일일이 찾으셔야겠습니다. 라고 말할까? 그럼 기사단이 어떻게 될까? 나는 공작이니 내 위치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미리엄의 빈정거림에 부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내뱉은 말에 담긴 살기는, 일개 기사인 그가 감당하기에 매우 날카로웠다. 부관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 무조건 찾겠습니다.”
“명단을 못 찾을 것 같으면, 지금 잡아놓은 놈을 제대로 털어. 우리 일은 한쪽 방향으로만 접근해선 답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미리엄의 은회색 눈동자가 부관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부관이 몸을 움츠린다. 미리엄은 더 이상 부관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까만 시야에 세레나 라쉘티아의 뾰루퉁한 얼굴이 나타났다.
첩자인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일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속단이다. 미리엄은 생각을 밀어 넣으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의 여정을 고려하면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