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엄 리시오스의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세레나의 눈에 검은 옷자락이 잡혔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검은 색 천을 로브처럼 뒤집어쓴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후다닥 달려가는 것의 정체는 시녀였다. 쪽문을 빠져나가려는지 방향을 튼다. 세레나는 그 덕에 시녀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제인이었다.
세레나는 곧장 목소리를 높여 게니아를 불렀다.
“게니아, 외출 준비 좀 해줘.”
“어딜 가시려고요?”
“쥐새끼 한 마리가 매우 급하게 움직이는 걸 봐서,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게니아의 반문을 무시한 세레나는 샤론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길을 막았을 시녀들은 힐끗 세레나를 볼 뿐 말리지 않았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옷장을 보던 세레나는 거칠게 문을 열고 의류들을 확인했다.
세레나는 뒤 따라 들어온 시녀 몇에게 지시했다.
“모두 정리해. 내 드레스는 내버려두고.”
시녀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치를 본다.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네.
아까 도망가던 시녀 제인처럼.
세레나는 제게 마약을 건넸던 시녀와, 어머니의 반지를 훔쳤던 시녀, 그리고 쥐새끼처럼 저택을 빠져나가는 시녀가 모두 같은 인물임에 놀랐다.
갑작스러운 외출 준비에 게니아는 적절한 드레스가 없다며 눈물을 쏟아내려 했으나, 세레나의 엄격한 표정에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다 되었습니다. 마부를 불러드릴까요?”
세레나는 거울속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고 한 바퀴 돌았다. 남색 계열 드레스는 깔끔한 디자인이었지만, 몸 선을 예쁘게 돋보여 준다. 세레나는 샤론에게 뺏겼던 드레스를 되찾은 지라 두 배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다 곧, 비참했던 미래의 저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히고 성큼성큼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게니아가 그녀의 뒤에 붙어 무어라 말을 걸었으나, 세레나의 머릿속은 온통 시녀 제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기사들에게 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라고 지시해.”
“그들이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일 같아요, 아가씨. 돈을 주고 정보길드 쪽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요?”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저와 연락을 끊었던 이들은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계획을 짜는 동안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한 세레나는 따라오려는 게니아를 밀어냈다. 거부당한 게니아가 펄쩍 뛰었지만 세레나는 집사를 감시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홀랑 마차에 올라타버렸다.
순식간에 세레나를 놓친 게니아가 허망한 표정을 짓다. 세레나는 창에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며 호들갑 떠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세레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선 마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부모님의 마차사고 당시 갑작스럽게 휴가를 타고 떠났던 인물이었다.
“1번지 번화가에서 내려줘.”
순박한 미소를 짓는 마부에게 세레나는 별 다른 지시 없이 목적지만 일러두었다. 커튼을 쳐, 외부와 내부를 격리하는 순간까지 얼굴에는 살가운 미소를 떠올린 상태였다.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해결해야 하고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세레나는 쿠션을 품에 앉고 몸을 웅크렸다.
마차 사고조차 의심 되는 상황이라, 마부에게서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긴다. 세레나는 불신의 끝을 내달리는 스스로를 느끼고 자조했다.
‘오만한 백작이 저한테만은 친절하면, 혹 주제도 모르고 실수하려나. 그 틈을 노려야겠지.’
그리고선 냉정하게 이어지는 생각에 몸을 잠시 떨었다.
왠지 아까 만난 미리엄 리시오스 못지 않은 차가움이 제게도 풍긴다 느낀 탓이다.
1번지 번화가에 도착한 세레나는 마부의 도움 없이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무안한 상황에서도 얼굴 만면에 한 가득 미소를 건 채로 세레나에게 넙죽 허리를 숙였다.
“중앙 마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가씨.”
이렇게 보면 마부를 의심하는 그녀가 예민한 것 같은데, 순박함 뒤에 못된 얼굴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세레나는 웃는 낯으로 눈을 깜박이며 마부를 배웅했다. 말발굽소리를 내며 힘차게 멀어지는 뒷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윽고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이 멀어졌을 때 즈음, 세레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따라 나오는 것 같았는데,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그녀가 찾는 인물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주변에는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와 신사처럼 차려 입은 귀족 영식들이 지나다녔고, 몸을 움츠린 채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시녀들 혹은 평민들이 보였다.
“제임스 알카린 단장, 슬슬 나왔으면 좋겠는데.”
세레나의 곁을 스치던 평민들이 잠시 그녀를 쳐다봤지만, 노려보는 그녀 눈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걸음 속도를 높인다.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는 세레나의 뒤로 백작가문의 기사단장 제임스 알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하고 부르는 음성을 들은 세레나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시녀 제인은?”
“…기사 몇 명이 뒤쫓고 있습니다.”
한 걸음의 거리를 벌리며 세레나의 뒤를 따르던 제임스가 묘하게 느린 속도로 대답했다. 세레나는 제임스를 힐끗 보고는 속도를 높였다.
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세레나의 머릿속은 복잡 그 자체였다.
알렉이 납치된 이후의 일이 모두 기억속에 있었고, 똑 같은 일이 펼쳐졌으니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세레나는 회귀했거나, 혹은 예지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알렉이 납치되는 것을 목격하다가 잠에 빠졌다는 가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회귀’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단순히 회귀라고 하기에도 좀 이상해.’
기억력이 비상해졌을 뿐만 아니라 샤론에게 학대를 당하고, 로이 때문에 마약에 절여져 나약했던 때와도 다르다.
고민에 빠졌던 세레나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당당하던 스스로를 생각하고는 의심을 털어버렸다. 과거로 돌아와 건강한 육체를 되찾은 덕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미리엄 리시오스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 그건 뭐였지?’
그와 마주보는 순간, 눈 앞에서 빛이 터지고 이상한 일을 겪었다. 그때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를 ‘알고’있었다. 그를 친근하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여기고 있었고, 또 ‘모종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와 손을 잡은 상태였다. 세레나는 기억을 되살리려 했으나, 느낌만 어렴풋이 남아 인상만 찌푸렸다.
‘뭐, 당장은 눈에 보이는 꼬리를 따라가는 게 먼저겠지.’
고민하던 것 치고 빠르게 단념한 세레나가 시녀 제인의 위치를 물었다. 제임스는 시녀 제인이 2번지 번화가, 즉 상인들의 거리에 있다고 보고했다. 세레나는 별 반응 없이, 2번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차를 불러도 될 법 했지만, 조용히 추적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차피 제인을 당장 붙잡는다고 해도 실토시킬 방법이 없다. 발뺌하면 그만이니 일단 종적을 기록하는 편이 좋으리라.
“기사들은 잘 따라붙고 있지?”
연락수정구를 품에 집어넣던 제임스가 다시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세레나에게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묻고는 대답한다. 시녀 하나에 기사 셋이 따라붙었다는 보고였다.
“그런데, 백작님?”
“왜.”
“저기….”
세레나는 제임스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확실히 건강한 몸이다. 거의 하룻밤을 꼬박 새고도 피로하지 않다. 내심 기뻐하는 세레나에게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2번가에 가시려는 겁니까?”
그는 어설픈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왜’라는 입 모양으로 반문하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듯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이쪽 방향이 아닙니다, 백작님.”
세레나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제임스도 덩달아 제자리에 서서 대기했다. 세레나는 그런 제임스를 모른 척하며 방향을 틀었다. 마치 원래의 목표가 그것이었다는 듯 제법 자연스럽게.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갔고, 제임스가 아까처럼 따라붙었다.
“저, 백작님….”
“이번엔 또 왜?”
“이쪽은 황성으로 향하는 방향입니다.”
“…….”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세레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고 먼저 걸었고, 세레나가 뒤를 따랐다.
묘하게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제임스를 따라가는 도중, 시끄러운 소리가 세레나의 귀를 찔렀다. 평상시에 조용한 거리로 알려진 1번가 번화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었다.
“내가 다시 오지 말라고 했죠?”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던 세레나는 뒤이어 들린 고함소리에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벽돌로 짜임새 있게 건설된 성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간판에는 ‘마담 롤랑스 살롱’이라고 쓰여있었다. 세레나는 요 근래 인기있는 살롱의 이름이 ‘롤랑스’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바닥에 엎어져있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세레나는 상황을 관망했다. 그녀처럼 지켜보는 귀족 영애들이 몇 있었다. 티타임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토해낼 그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세레나는 잠시 미간을 구겼다.
“시골에서 올라왔으면, 그냥 주제에 맞는 살롱에 가세요! 뭐 하자는 거에요 지금? 내가 당신들 물건 안받아준다고 저번에 분명 이야기했죠?”
살롱 안에서 여성 한 명이 나왔다. 몸 선을 그대로 내보이는 실크 드레스를 입었고,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배꼽아래에서 흔들렸다. 마담 롤랑스였다. 그녀는 살롱의 출입문에서 살짝 옆으로 물러서서 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그만 가보세요. 내가 다른 말은 더 이상하지 않을게요. 오지 말아요, 여긴. 롤랑스 살롱은 앞으로도 아가씨의 물건을 환영하지 않을 거에요. 물론, 우리 상품을 구입할 생각이라면 언제든 방문해도 좋아요.”
이윽고, 살롱에서 초라한 차림새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흔치 않은 모양새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원단이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수도 외곽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 영애인 듯 하다. 평민이었다면, 바닥에 쓰러진 소년처럼 무자비하게 쫓겨났으리라.
“실례했습니다, 마담.”
화장기가 없이 풋풋한 얼굴인 귀족 영애는 제법 당당하게, 아니 차분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었으나 손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제법 건장한 남자들이 바싹 붙었다. 살롱에서 일하는 경비원들은 행동 없이 서있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던 세레나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살롱 주인치고는 대단히 위세를 부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