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던 영애들이 서로 속닥거렸지만, 다들 구경꾼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게다가 재미있는 장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몇몇은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때, 살롱 안에서 나온 종업원이 귀족 영애에게 드레스를 건넸다.
“이건 도로 가져가세요. 저희 쪽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니, 그냥 들여두고 싶지도 않네요.”
귀족 영애는 말없이 그 드레스를 받았고, 마담 롤랑스와 종업원은 살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쓰러졌던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귀족 영애의 안전을 살폈다. 세레나는 애써 웃고 있는 영애의 옆모습을 지켜봤다. 어느새 되돌아온 제임스가 세레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백작님.”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재촉했으나, 세레나의 눈은 영애의 초라한 드레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낯선 외양이 분명한데, 익숙하다. 회귀 전에 보았나 싶었지만, 맞물리는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대에 맞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소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탓에 관심을 잃어버린 세레나가 제임스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몸을 일으켰던 소년이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뭔가가 소년을 치고 지나간 것이다.
“안돼! 거기서! 주인마님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눈 깜빡 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소매치기범이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고, 소년이 튕기듯 뜀박질을 시작했다. 혼자 남은 영애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소년을 따라갔다.
‘이것 참….’
구경꾼 역할에 충실하려던 세레나는 그들이 사라진 골목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필, 소년이 뱉었던 그 말. ‘주인 마님의 유산’이라는 말 때문에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유산이라면, 저것이 저들에게 남은 전부일 것이다.
거기다 소년과 힘 없는 영애가 소매치기범을 따라가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확률은 없다에 가깝다.
묘하게 샤론에게 제것을 모두 빼앗겼던 과거가 겹쳐진다. 세레나는 제임스를 불렀다.
“기사들이 시녀를 놓칠 일은 없겠지?”
“네, 백작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제임스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됐네.” 세레나는 대충 응수하며 둘이 사라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오지랖인 것은 안다. 하지만, 혹 곤경에 처할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백작인 그녀에게 둘은 명백한 약자니까. 거기다, 샤론의 폭행에 정신적으로 망가졌던 언젠가의 일을 떠오르기도 했다.
제임스는 세레나가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귀신같이 그녀의 마음을 읽고서는 길을 안내했다. 골목은 1번가 내에 있는 것치고 허름하고, 어둑어둑했다. 가장 부유한 곳에도, 가난은 존재하는 법니다. 상가에 일하는 이들이 모두 귀족은 아닐 테니까.
어젯밤 비가 쏟아진 탓인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세레나는 요령껏 피하며, 제임스의 뒤에 달라붙었다. 왠지 속도가 아까부터 빨라진 듯 했으나 쫓아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움직이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세레나의 귀에 잡히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웅웅거려서 분간할 수 없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선명히 들렸다.
그리고 제임스가 걸음을 멈춘 곳 앞에, 생각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씻지 않은 것인지 헤진 옷자락 사이로 거뭇한 것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소년 하나가 바닥에 웅크려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다른 장면은 제임스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제임스?”
제임스는 허리에 찬 검을 반쯤 뽑은 채로 옆으로 물러섰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 귀족 영애가 뭐에 놀랐는지 어느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여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에게 손목을 잡힌 소년이 있었다.
“아.”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기사 옆에 서 있던 남자 때문이었다. 남색 머리카락은 남자의 외모에 무척 적합한 색이지만, 묘하게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세레나는 아까의 만남에서 들었던 생각을 떠올리며 그를 쳐다봤다.
미리엄 리스오스가 눈 앞에 있었다.
“영애.”
세레나는 가볍게 목례하는 미리엄에게 같은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 게 될 줄은 몰랐군.”
세레나는 저와 마주친 은회색 눈동자를 보며 곱게 웃었다. 어쨌든 껍데기는 멀쩡한 남자다.
“반갑군요, 경.”
“나야 말로.”
한 눈에 봐도 의심스럽게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칫 잘못하면 미리엄 리시오스를 미행했다고 오해를 받을 판이었다. 낮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린 세레나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미리엄 리시오스가 아닌 소년의 팔을 잡고 있는 기사를 향한 물음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물어도 될까요?”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미리엄 리시오스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세레나는 굳어 있는 영애를 향하여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드레스의 모양새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아. 세레나는 신음을 흘릴 뻔 하여 입을 세게 다물었다.
마담 랑또가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비슷한 디자인이다.
세레나는 급히 귀족 영애의 외모를 살폈으나, 마담 랑또와 닮은 외모는 아니었다. 품에 쥐고 있는 드레스를 보아하니, 드레스를 만들어 판매하려고 한 모양인데 미래에서는 이 영애가 아니라 마담 랑또가 주축이 되어 있었다. 세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여자는 뭐지?’
그때 귀족 영애가 인기척을 느낀 듯 세레나를 쳐다봤다. 작은 키인 영애의 눈을 보기 위해 세레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드레스 모양을 확인하기 전만 해도 곱게 물어보리라 생각했건만. 세레나는 혀를 찼으나 목소리를 상냥하게 다듬지 않았다. 세레나의 추측대로 시골에서 올라온 영애인 것인지, 아니면 순박함을 연기하는 것인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표정이 그대로 읽힌다. 세레나가 재차 묻자 귀족 영애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소매치기범을 쫓아가다가, 그러니까 로한이, 아 제 시종이 기사님과 부딪치는 바람에…. 그런데, 누구세요?”
귀족 영애는 뒤늦게서야 의심스러운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세레나는 상황파악을 끝내곤 제임스에게 검을 집어넣으라 명령했다. 그리곤, 시종의 손목을 붙들은 기사에게 물었다.
“경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기사는 미리엄의 눈치를 보았으나,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자유였는지 쉽게 대답했다.
“트랄린 메린입니다.”
“메린 경이군요. 내가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어때요, 그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겠죠?”
“네. 한 가지라면 가능합니다.”
“시원해서 좋군요.”
기사 메린의 무뚝뚝한 응답에 세레나는 건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바뀐 세레나를 느낀 것인지 메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제가 대답할 수 없는 범위라면, 죄송하지만…….”
“걱정 말아요, 아주 쉬운 질문이니까.”
세레나는 곧바로 질문하지 않고, 소매치기범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소매치기범뿐만 아니라 제임스와, 시종, 귀족영애, 그리고 미리엄 리시오스의 시선마저도 끌어 모았을 즈음 세레나는 소매치기범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소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몸을 끌어안았다. 도망갈 구석이 없는 자의 행동을 보며 세레나가 차갑게 물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
“…….”
“언젠가 내 돈도 훔쳤던 적이 있지 않느냐?”
소매치기범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동공을 보며 웃어주자 뭐가 무서운지 몸을 벌벌 떤다. 세레나는 소년의 눈에 비친 오만한 제 얼굴을 보며 상냥한 얼굴을 꾸며내었다.
“그렇지 않니?”
“아, 아닙니다. 아가씨, 아니, 저는 절대로. 오, 오늘이 처음이고,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용서해주세요.”
바닥에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박는 소매치기범을 세레나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훔친 적이 없다면서 용서를 빈다. 계급의 바닥에서 사는 인간의 인생이란 저런 것이겠지. 세레나는 로이의 약에 취해 자아가 없이 지냈던 세월을 생각하며 저 또한 소년과 비슷했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소매치기범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죽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서, 또 살고 싶을 것이다. 복수를 하던, 나은 삶을 꿈꾸던 간에. 세레나는 분명 마담 랑또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죽는 순간에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신이 그녀를 가엽게 여기고 살려준 것일 수도 있다. 세레나는 제 생각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뭐라고 했니? 왜 그렇게 겁을 먹어.”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저도 제가 하고 싶어서, 가 아니라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상냥한 말에도 소년은 벌벌 떠는 것을 멈추지 못했고, 머리를 물웅덩이에 박고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찢어진 옷이 벌어져 바짝 마른 몸과 피부의 상처가 보였다. 세레나는 소매치기범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죄는 죄인 법.
세레나는 몸을 일으키며 기사 멜론에게 물었다.
“가문의 시종이 벌인 일은, 가문 내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죠?”
“물어보시려는 것이 이것이었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대답을 해주면서도 말 끝을 흐린다. 메린이 잡고 있는 시종의 손목 주변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얬다. 저러다가 손을 떼면 검푸른 멍이 남겠지. 세레나의 시선을 확인한 메린이 고개를 흔들며 경고했다.
“답변을 드렸으니, 영애께서는 돌아가주십시오. 영애께서 끼어드실 법한 일이 아닙니다.”
“백작.”
“네?”
메론의 반문에 세레나는 말없이 손가락에 낀 인장을 내보이며 웃었다. 뜻을 알아챈 메린이 뒤늦게 정정하며 사과했으나, 세레나의 구겨진 미간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듣지 않아도, 기가 팍 죽은 것이 눈에 보였다 세레나는 기사를 보며 픽 웃었으나, 메린은 여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이끄는 기사단답게 영 놀려먹는 재미가 없네. 세레나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미리엄 경.”
“영애.”
“역시 백작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나 보네요.”
미리엄 리시오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세레나도 대꾸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재차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저 소매치기범은 제가 처리해야겠네요.”
“메린 경의 말대로,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끼어들은 일 법한 일은 아니지.”
“그럼, 메린 경의 손에 쥔 시종을 내게 넘겨줘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백작님….” 하고 제임스의 부름이 있었지만,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눈만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퍽 난처한 표정이었고, 시종의 주인인 귀족 영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기사 메린과 그의 손에 잡힌 시종의 입이 벌어졌다.
“아.”
세레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말의 일부를 생략한 탓에, 미동을 구한다는 의미로 들렸던 것이다. 소매치기범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제가 저 영애를 고용, 아니 후원할 생각이라서요.”
“…귀족 영애를 후원하겠다고?”
“네, 그럴 예정에요.”
“그대라도 지금 내가 가지는 의문을 충분히 이해하겠지. 저 여자를 후원하여 사교계에 데뷔시키고 뒷방에 물러날 생각인 것인가? 그대도 이제 고작 스물 한 살 일 텐데?”
“그건 내 맘이죠. 어쨌든 그래서 그 시종은 저 영애와 함께 제 휘하로 들어올 것이랍니다. 아까 메린 경이 확언해준 것 처람 백작 가문 일은 백작 가문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당당하게 논리를 펼치던 세레나는 뒤늦게 의문을 느끼고 미리엄을 노려봤다. 밝히기도 전에 상대의 나이를 먼저 말하다니 무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내 나이를 어떻게 알았죠?”
“……아는 방법이 있지.”
미리엄 리시오스는 답지 않게 시선을 피했다. 물론 크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세레나는 새침데기처럼 그를 흘려봤다. 그러자 가만히 제 자리에 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미리엄 리시오스가 홀로 외로이 서있는 귀족 영애에게 다가갔다. 제 일이 건만, 남의 일을 보듯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 영애는 미리엄 리시오스를 마주하고선 흠칫 몸을 떨었다.
‘이상하게도 미리엄 리시오스는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 더 위압적 기운이 풍겨져 나오는 것 같단 말이야. 착각인가?’
세레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