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세레나 라쉘티아 백작가의 가신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예, 네? 가신이요?”
귀족 영애가 깜짝 놀라 세레나를 쳐다봤다가 다시 미리엄 리시오스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분명 무서워하던 기색이었는데, 어느새 영애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럴듯한 외모에 낚인 것이다. 세레나는 혀를 찼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영애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레나 라쉘티아 백작의 말대로, 가신이 될 것이라면 우리는 물러나지.”
“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미리엄 리시오스의 얼굴을 보던 영애의 탄성은 왠지 아쉬워하는 감정이 담긴 듯 했다. 세레나는 스스로의 생각을 의심하며 잠시 눈을 깜박인 뒤 둘을 쳐다봤다. 영애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얼굴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외모에 넘어가도 이 시급한 상황에 그럴 리가 없겠지.’
괜한 우려를 털어내는 세레나의 귀로 미리엄 리시오스의 차가운 말이 이어졌다.
“라쉘티아 백작가문의 가신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영애의 시종은 기사의 공무를 방해하였으니 우리 기사단에서 처리하겠다. 물론, 처분은 가볍지 않을 것이고. 그 대신 저 소매치기에 대한 처벌도 우리 쪽에서 맡을 것이고.”
“아…….”
말을 흐리는 영애가 손에 쥔 드레스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래서, 대답은?”
확실히 미래에서 겪었던 것처럼 무자비한 남자였다. 본인에게 연정을 품기 직전인 영애에게 하는 가차 없는 행동이 그러했다. 세레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알렉과 샤론을 밀어내는 일에, 미리엄 리시오스만큼 도움을 요청하기 적절한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내 힘으로 해치우는 것이 가장 좋지만….’
세레나는 매정하게 일갈하며 물러가라 명했던 황제를 기억했다. 황제를 설득하려면 명확한 근거와 증거가 필요했고, 미래의 경험을 떠올리면 정보길드와는 곧 연락이 끊어질 테니 다른 줄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적합해 보이는 대상이 미리엄 리시오스다. 미래에서도 오만하고, 위압적인 공작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적어도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는 귀족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적이 많다는 것도.
어찌되었건 세레나는 미리엄 리시오스를 조력자로 점 찍었다. 남은 것은 그를 꼬셔서, 아니 설득하는 일뿐.
독특한 모양의 드레스를 품에 껴안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는 영애를 확인한 세레나는 그녀를 보호하듯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레나를 발견한 영애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세레나는 나긋나긋한 웃음을 꾸며내어 영애를 안심시켰다.
‘마담 랑또와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려면, 곁에 두는 것이 제일 나아.’
기사단장이자 무려 황제가 신임하는 공작의 앞에서 가신으로 들어오겠다 대답했으니,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다.
“그럼 시종을 내게 넘겨주겠어요?”
“우리로서는 그대에게 소년을 넘겨줘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공무를 방해해서 바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기사단의 업무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방해했는지 이야기를 들어야겠네요. 내겐 분명히 권리가 있겠죠. 그렇지 않나요, 미리엄 경?”
“안타깝게도, 기밀이라 밝힐 수가 없군.”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것이 얄밉다. 미리엄 리시오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얄미운 것을 어쩌란 말인가? 세레나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때, 미리엄 리시오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정 시종의 안위가 우려되면, 우리를 따라오면 되겠군.”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매우 중요한 공무지.”
“그 공무에 날 데려가겠다고요? 아니 저 시종을 데려가겠다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임스가 세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던 탓이다. 세레나는 끼어드려는 그를 막으며 미리엄 리시오스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내가 영애에게 허언을 할 이유가 있었나?”
물론 없지만. 세레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황급히 지워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리엄 리시오스의 낯짝을 관찰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메린을 살피는 것은 덤이었고.
보이는 것은 멀쩡한 껍데기뿐이라 세레나는 결국 미리엄 리시오스의 속내를 캐는 일을 단념했다.
“제임스.”
주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기사가 재빨리 다가왔다. 세레나는 우두커니 서있는 영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데려가서 손님실에, 아니 별채에 놔둬. 필요한 게 있다고 말하면 챙겨주고. 게니아한테 내 명령이라고 하면 될 거야. 내가 오기 전까지면 직접 살펴줘.”
“…시녀 제인은 어쩌시겠습니까?”
미리엄 리시오스의 눈치를 보며 낮게 묻는다. 제임스의 말은 미리엄과 메린의 귀에도 닿았을 것 같았지만, 제법 그녀의 상황을 고려하는 눈치라 세레나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제인에 관련된 일은 아까 지시했던 대로 처리하고, 이동경로만 파악해둬. 될 수 있는 한 끝까지 쫓아가고.”
“알겠습니다, 백작님.”
어느덧 귀족 영애는 제임스의 뒤에 다가와있었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메린의 손에 잡혀 울상인 시종을 곁눈질하며 입을 오물거린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염치가 있는 지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소매치기범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두고. 저기 메린 경에게 붙잡혀 있는 시종은 데려가는 것 잊지 말고 데려가.”
“우리 업무를 방해한 시종을 당장 돌려줄 수는 없지.”
세레나의 추가 명령을 들은 제임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끼어들었다. 웃기는 남자네, 정말. 미리엄 리시오스의 의도를 눈치챈 세레나는 짜증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우리 시간 버리는 짓을 그만하는 게 어때요?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리엄 경의 목적지에 함께 갈 것이니, 눈에 보이는 수작질은 그만두세요.”
그제야 미리엄 리시오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가에서 흐릿한 미소를 발견한 세레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때 메린이 뭐에 놀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세레나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당황한 낯으로 구속하고 있던 시종을 풀어주었다. 시종은 망설임 없이 제임스 뒤에 숨어있던 귀족 영애에게 달려갔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알아서 처리해요.”
“백작님, 아무리 그래도 따라가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으십니까? 위험합니다.”
걱정이 가득한 제임스에게 세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엄 리시오스경이 있는데 감히, 누가 덤비겠어?”
눈이 삔 귀족 영애가 아닌 이상, 미리엄 리시오스의 곁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리라. 제임스는 반박하지 않고, 영애와 시종을 챙겨 돌아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내내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드러냈으나, 세레나는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소매치기는 어떻게 할 거지? 이번 같이 가신에게 피해를 준 범죄자의 경우는 백작가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내가 궁금한 게 좀 있거든요.”
“…….”
세레나는 미리엄 리스오스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추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은 차분한 눈이었다. 서늘한 향을 맡은 세레나는 은회색 동공 안의 제 모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소매치기범은 당신들이 처리해요. 겁도 없이 귀족을 건드렸잖아요? 저 놈의 뿌리를 캐면 알이 굵은범죄자 집단이 나올 것 같아요. 그들을 잡으면 그건 당신들의 실적이 되겠죠. 그러니 내가 양보할게요, 너그럽게.”
“실적이라….”
“어차피, 우리 둘 다 지금 대화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실적을 우리에게 주는 대가로 영애가 알고 싶은 것이 뭐지?”
모공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살펴도 미리엄 리시오스의 낯은 무미건조했다. 세레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가까이에 있으니 오히려 그녀가 동요한 탓이다.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보았던 키스 장면이 떠올라 심장이 쿵쿵 뛰기까지 하니 손해 보는 짓을 한 셈. 그녀는 제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기 만을 바랐다.
“갑자기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한 이유를 말해줘요. 내가 여기 도착하리라는 것은 경도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공무를 핑계 삼아 내 행선지를 바꾸려 한 거죠?”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군.”
아까보다 떨어졌으나, 그래도 미리엄 리시오스의 거리는 가까웠다. 세레나는 그와 달라 붙었던 환영 속의 순간이 겹쳐져 잠시 몸을 떨었다.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미리엄 리시오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전에 잠시.”
그가 한 발 자국을 내딛자 세레나와 부딪칠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 마주한 그를 본 세레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까 미리엄 리시오스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 그녀였음에도 공연히 심장이 뛴다. 세레나의 온 신경이 곤두서 그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흔들리는 제 동공을 알면서도 조절하지 못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 가는 것 같다. 호흡도 힘들어 옅게 숨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레나의 눈이 살짝 커지는 순간 미리엄 리시오스가 방향을 틀었다. 세레나는 언뜻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를 보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렸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소매치기의 뒷목을 내리치고 있었다. 야윈 소년의 몸뚱어리가 툭하고 웅덩이에 처박혔다. 동시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기사 몇이 소년을 끌고 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매우 순식간의.
상황을 파악한 세레나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세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선 이동하지.”
언뜻 보면 파티장에서 에스코트하는 멋진 기사의 모습과 흡사했지만 세레나는 시꺼먼 상대의 속을 알았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손을 쳐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쉽군.”하는 헛소리를 뱉었다. 세라는 다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린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세레나는 말 없이 둘을 따라 움직였다. 아까 제임스의 속도보다 훨씬 느려 쫓아가기 힘들지는 않았으나, 세레나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엉덩이를 발로 차고 싶었지만, 숙녀 아니 백작의 체면상 참았다. 물론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정말 엉덩이를 걷어찰 생각이었다.
“그래서, 날 데려가려고 말도 안 되지 않는 시비를 만든 이유가 뭐죠?”
골목 사이 셋의 발걸음만 울리고,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을 즈음 세레나가 물었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속도를 늦춰 세레나의 옆에 붙었다.
“영애를 위해서지. 중요한 사건의 실마리를 얻었거든.”
머무적거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고민한 흔적도 없는 깔끔한 대답이다. 세레나는 웅덩이를 피하며 그에게 물었다.
“알렉 전 백작이 납치된 사건인가요?”
“그래.”
“무슨 실마리이길래, ‘어쨌든’ 가족인 날 데려가요?”
“그대가 좋아할 법한 일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