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무심함을 기본으로 장착하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얼굴에 아까부터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물론 활짝 피지는 않았지만, 샤론이나 아까 그 영애를 대하던 것에 비하면 제법 특별한 표정이었다. 콧대를 세우던 세레나는 순간의 제 생각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특별하다고? 미쳤구나, 세레나.’
미리엄 리시오스의 시선이 닿았다. 세레나는 코웃음 치며 스스로를 비웃곤 그를 노려보았다.
“그냥 대놓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줘요.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쓸데없는 말장난은 이제 하기 싫어요.”
“알렉의 납치한 일당들이, 그가 벌이던 불법적인 사업과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어서.”
“불법적인, 사업이요?”
“그가 진짜 ‘라쉘티아’인지 가부를 판별하는데 내가 영애의 말만 믿고 움직일 수는 없지. 하지만 알렉 백작이 정말 불법적인 일에 가담했다면, 그대를 조금은 믿을 수도 있겠지. 어때, 꽤 끌리지 않아?”
세레나는 정보길드에서 넘겨 받았던 알렉 백작의 사업들을 떠올렸다. 투기, 광산 매매 등의 사업이 떠올랐다. 1차로 받은 정보를 고려해도 불법적인 일은 도박 정도였다.
‘도박은 다른 귀족들도 쉽게 손대는 일이라서 저 남자가 저렇게 말할 정도의 급은 아니야. 도대체 어떤 불법사업을 말하는 걸까?’
미리엄 리시오스가 생각에 빠져 넘어질 뻔한 세레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순순히 고맙다는 말을 건넸고, 그는 “별말씀을”이라며 가볍게 대꾸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세레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알렉이 도대체 어떤 불법 사업에 가담한 거죠?’
“이종족 노예를 거래하는 일.”
그의 대답을 들은 세레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잡아준 덕분에 추하게 엎어지는 일은 피했지만, 세레나의 얼굴은 동대륙의 설화에 나오는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그녀는 바로 옆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제 얼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종족 노예라니.’
라쉘티아 가문의 명예를 진창으로 처박는 범죄였다. 세레나는 이를 벅벅 갈았다. 귀족 영애에게서 나는 소리치고는 제법 살벌하여 메린이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미리엄은 세레나의 반응을 살필 참인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순간, 회귀 전에 로이의 일당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세레나의 두뇌는 자연스레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켰다.
‘알렉도 로이와 한 편이었을까? 로이의 일당이라서 작위를 뺏고, 노예 사업에 가담하여 가문의 명예를 진창으로 빠트리려고 작정한거야, 설마?’
세레나의 추리에는 빈틈이 많았다. 가문을 진창에 빠트리고 하고 싶었다 생각하기엔, 그 동안 알렉이 백작 자리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알렉과 로이의 일은 묘하게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결정적으로 둘을 연결할 것이 없다. 섣부른 추측을 그만뒀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그 다음에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겠어.’
골목은 꽤 복잡했다. 낡은 집들이 빽빽 들어차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간간이 움막도 보였다. 불행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다. 세레나는 회귀 전의 일들이 떠올라 몸을 흠칫 떨었지만 고개를 젓는 것으로 기억들을 털어버리곤, 과거에서 벗어나듯이 빠르게 발을 놀렸다.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먼 거리를 왔다. 이 정도면 마차를 타는 것이 나았을 법도 하고, 평범한 귀족 영애라면 쓰러졌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레나는 티가 나지 않게 얼굴을 찌푸렸다.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발이 아팠던 탓이었다.
‘내가 구두를 신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걸까.’
세레나는 낮은 굽의 구두를 신은 자신을 칭찬해야 할지,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는 메린의 뒤통수를 때려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한 참 만에 세레나가 꺼낸 말은 현재 그녀의 상태와는 좀 다른 질문이었다.
“이종족 노예를 거래하는 현장에, 가는 건가요? 거기서 어떤 수사를 할 셈이죠? 나도 들을 권리는 충분하죠?”
“함정수사.”
“뭐라고요?”
발의 고통도 참고 넘긴 세레나는 결국 콧김을 뿜었다.
‘함정수사에 날 왜 데려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돌리고 미리엄 리시오스를 노려봤지만, 아까 전만 해도 세레나에게 고집스럽게 향했던 은회색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망할 남자가? 환영에서 보았던 미리엄 리시오스가 이렇게 막무가내였다.
세레나는 반응하지 않는 미리엄 리시오스 대신 메린을 노려봤지만,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 숫자를 열까지 세었다. 그래도 성질이 가라앉지 않으면? 세레나는 걸음을 뚝 멈췄다. 빠르게 내달리던 이들도 갑작스러운 세레나의 행동에 움직임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내가 거길 가서 뭘 해요?”
미리엄 리시오스가 픽하고 웃었다. 세레나는 이러다 제 미간에 골이 파이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그건 그대가 직접 찾아야지. 알렉 백작과의 일에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너절한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외양으로 그가 웃었다. 세레나의 손을 쥐고 잡아당기는 그를 내버려뒀다. 달리는 내내 세레나의 머릿속 한 켠을 차지했던 흐리고 음침한 냄새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미리엄 리시오스의 특유의 체향이 그녀의 코를 맴돌았다. 찰나의 시간이, 수 초면 끝났을 움직임이 유난히 느리게 여겨졌다.
세레나는 등을 타고 돋아나는 소름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미리엄 리시오스의 분위기에 홀려, 제 멋대로 입을 열 것이다. 그가 유명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깨달음 후에 찾아 온 것은, 손등에 닿는 숨결과 온기였다. 입술이 손등에 스치듯 닿았다 떨어졌다. 무심한 정적이 흘렀다. 세레나의 손을 놓아주는 순간까지 미리엄 리시오스의 은회색 눈동자는 집요하게 한 곳을 응시했다.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아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세레나는 저를 도발하듯 직시해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던 짜증과 혼란스런 감정이 일거에 사라졌다. 눈 앞의 남자를 향해 세레나의 도전정신이 싹텄고, 그것은 곧장 무섭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귀족의 무기는 그림과 같이 반듯한 미소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선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귀족의 덕목이다. 세레나는 기억을 더듬어 완벽한 가면을 얼굴에 덧씌우고, 도도하게 팔을 내뺐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유쾌한 듯 웃고 있었다. 얄밉네 정말. 그 와중에 잘생긴 외모가 더욱더 빛나니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넋을 놓고 입을 떡 벌릴 뻔했던 세레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했다.
“싫다면, 돌아갈 텐가?”
세레나는 그를 흘기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메린을 제치고 쭉 나아가던 그녀는 멈칫 제 자리에서 서서 뒤를 돌아봤다.
“안가요?”
그녀는 목적지의 위치를 몰랐으므로 당연히 멈출 수 밖에 없었으나, 세레나의 타박을 들은 메린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바뀌었다. 그는 세레나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서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앞장섰다.
*
*
날씨가 흐려지고 있었다. 갑자기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이 쏟아지던 햇살을 데리고 사라지기라도 했는지 기온이 쌀쌀하게 내려앉은 듯 했다. 세레나는 오한이 느껴져 양팔을 껴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쾌청하여 높다 생각한 하늘은, 몰려든 먹구름으로 인하여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듬성듬성 보이는 푸른 하늘마저도 곧 사라질 기세였다. 격렬한 날씨의 변화를 겪던 세레나는 반대편 골목의 풍경을 눈으로 살피며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너무 가깝지 않아요? 이정도 거리면 들키는 것 아니에요?”
점점 가팔라지는 골목 끝에는 돌을 쌓아 지어 올린 건물이 있었다. 세련된 구석은 없었지만, 허름한 거리에 있는 집들에 비하면 제법 튼튼해 보였다. 세레나의 눈에 들어온 집들은 나무로 대충 쌓아오려 지붕이 없는 것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다만 돌 벽을 얼기설기 두르고 있는 가죽끈이 수상했다. 마치, 함정이나 덫처럼 보였다.
세레나는 대답이 없는 미리엄 리시오스의 옆 태를 감상하다가,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한들을 발견했다. 얼핏 세어보니 일곱, 여덟 명 정도 되어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 있기에는 많은 수였고, 나이가 젊은 이들이었다.
‘저 놈들이 이 종족 노예 사업의 일당들 같은데.’
허리에 찬 칼은 기본이었고, 어떤 남자는 등에 크고, 날이 넓은 칼을 메고 있기도 했다. 간간히 허벅지에 끈을 매달아 단검을 소지한 이들도 있었다.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위협적으로 느낄 만큼, 대놓고 무장한 세력들이다. 생각을 이어가던 세레나는 깜짝 놀라 골목의 집들을 살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없는 건가? 혹시 거주자들 중에 저들과 한패가 있다면?’
소란스럽게 골목을 내달렸던 일을 떠올린 세레나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미리엄 리시오스가 이 정도도 판단하지 못할 인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걱정되지 않았다. 단지, 세레나는 스스로의 상황판단능력이 염려되어 초조함을 느꼈다.
‘약물에 젖었던 회귀전의 일이, 지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겠지.’
그때, 미리엄 리시오스의 낮은 목소리가 세레나의 귓전을 울렸다.
“여기 있는 건물 대부분은 폐가다. 우려하는 일은 없어.”
묘한 타이밍이었다. 일순간 미리엄 리시오스가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고 착각할 만큼 적절한 순간에 튀어나온 말에 세레나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런 세레나에게 걸치고 있던 자켓을 벗어 내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백색인 자켓을 응시하던 세레나는, 이건 무슨 수작일까하는 눈으로 미리엄 리시오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옷을 챙겨 입으며 툭 내뱉었다.
“날씨가 꽤 추워졌으니까.”
생각 외의 면이었다. 그녀를 무작정 끌고 온 사람치고는 세심한 편이었지만, 세레나는 수상한 건물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이 더 신경쓰였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실력은 믿을 만하지만, 머릿수 차이가 크다. 그와 메린은 기사고 검도 가지고 있으니 걱정이 없겠지만,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가 드레스차림인 세레나는 걱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세레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무너진 건물에서 떨어져나온 긴 나무토막과, 커다란 돌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도 들고 던져야 하려나.’
세레나는 거한들을 향해 커다란 돌을 던지는 제 모습을 상상했다. 약물에 절여지기 전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서,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괴력은 여전했다. 그러니 한 둘은 거뜬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호받기만 하는 것이 싫었던 세레나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둘은 꽤 진지한 낯이었다. 세레나는 이 참에 돌덩이를 손에 쥘 참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신음소리에 황급히 입을 막았다. 차라리 계속 움직였을 때는 참을 만했다.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한 쪽 신발을 벗었다. 또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퉁퉁 붓고, 발 뒤꿈치에 상처가나 피딱지가 굳어있다. 한숨을 삼키며 다시 구두를 신던 세레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터뜨릴 뻔 했다. 저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고 입이 벌어졌다.
메린과 대화를 나누던 미리엄 리시오스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더니 세레나의 발을 잡은 것이었다. 맙소사. 세레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아 추한 제 표정을 가렸으나, 떨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했다.
미리엄 리시오스의 손은 제법 서늘했다. 그는 힘을 거의 주지 않은 채로, 세레나가 느끼기에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발등을 주물렀다. 발끝에서 돋기 시작한 소름은 세레나의 목덜미까지 한방에 도달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떨리고 얼핏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세레나는 정신이 핑핑 돌아 반쯤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미쳤어. 이 남자 정말 미쳤어!’
세레나는 쿵쿵 뛰는 맥박을 가라 앉히기 위해 심장을 꾹 눌렀지만 오히려 손을 타고 박동이 전해져 진저리를 쳤다. 발을 주무르는 세심한 손길 탓에 발도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군.”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어진 사과에 세레나는 어디론가 날아갈 뻔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간신히 평정을 찾은 세레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따라오기로 한 것은 내 선택이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그만 놔줘요.”
“많이 부었어.”
제멋대로인 성질머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미리엄 리시오스는 세레나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말리려던 세레나는 뻐근하던 발이 편안해져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가 살짝 힘을 줄 때마다 몸이 흠칫 떨렸다.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골목 안이 기묘한 분위기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그때,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메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함정 수사를 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좀 이상한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만.”
이어 메린은 한숨을 토했다.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세레나는 그에게 반박하지 못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미리엄 리시오스가 입을 열었다.
“임시 작전소는 어디에 마련했지?”
“놈들의 작당지가 매우 잘 보이는 곳에 만들었죠. 그러니까, 적어도 여기는 아닙니다, 대장님.”
“그럼, 잠시 쉬었다 움직여야겠군.”
마침내 미리엄 리시오스의 손이 떨어졌다. 그는 세레나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별안간에 벌어진 일에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정신이 없는 세레나에게 미리엄 리시오스가 조용한 음색으로 물었다.
“그대 혼자서 걸을 수 있겠나?”
아직도 얼굴이 달아올라있는 것 같다. 세레나는 눈 앞의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답 없이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에 미리엄 리시오스가 메린을 쳐다봤다.
그러자 메린은 작은 한숨과 함께 “따라오십시오.”라는 말을 남긴 뒤 골목 구석으로 훌쩍 들어갔다. 세레나가 뒤따르려는 찰나, 미리엄 리시오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세레나의 시야에 잡힌 미리엄 리시오스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힘들면 부축해주겠다. 내게 기대도 좋아.”
세레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차라리 아픈 편이 나았다.
‘미리엄 리시오스, 이 남자는 정녕 미친 게 분명해!’
도망치듯 움직이는 세레나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나는 그것이 미리엄 리시오스의 소리가 아니길 바라며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