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원 (1)
“놈들은 내 딸을 겁탈하고 마을 사람의 반 이상을 죽이고서야 마을을 떠났어. 하지만 놈들에겐 모든 게 다 장난이었지.”
횃불을 들고 연우를 바라보는 이장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 노인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뭐라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지금 분명 발등에 진짜 불이 떨어져 뒈질 상황인데...
살기 위해서는 뭔말이라도 해야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우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연우는 단지 그들과 같은 유저일 뿐이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때! 이장은 천천히 플로이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직 10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도 남은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자... 잠깐!!!”
연우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장은 플로이에게 마저 기름을 다 붓는다.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 초점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 이장님...”
플로이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장을 불렀지만, 이장은 멈추지 않고 마저 기름을 다 부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이야!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연우는 십자형틀에 묶인 채로 소리쳤다. 하지만 구속되어 있는 상태의 몸을 어찌할 수 없다.
“더러운 피를 거두는 게 아니었어...”
“!!!!?”
“그... 그게 무슨 소리...”
이장의 말에 플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날 이후로 아키는 아이를 가졌다... ”
그리고 이장은 기름의 젖은 플로이를 노려보며 말한다.
“이... 이장님....?!”
“그때... 너를 지워버렸어야 했어. 하지만 기어코 아키는 너를 낳았지.”
이어지는 말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플로이의 눈에서 눈물이 땅으로 떨어진다.
“유저의 아이를 말이다...”
플로이의 흔들리는 눈에서 눈물이 땅으로 뚝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눈물은 증오의 기름과 섞이지 않는다.
“어... 엄마는 어딨어요?”
“.....”
“어... 엄마는 어딨냐구요!!!”
플로이는 울부짖으며 물었다. 전쟁터에서 주워온 고아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를 키워준 사람은 마을의 이장님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엄마 어딨냐구요. 하...할아버지!!!!”
아니었다.
플로이는 유저와 텐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이었다.
그리고 그 혼종은...
“너를 낳으면서 죽었다.”
태어나면서 엄마를 죽였다.
***
플로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더 내뱉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충격을 받은 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해맑고 천진난만한 모습만 보여줬던 플로이였는데... 차라리 몰랐으면 어땠을까.
진실은 어린 플로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했다.
이장은 횃불을 플로이가 묶여 있는 나무쪽으로 천천히 가져간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안 돼요!!!”
그때! 누군가 이장을 붙들며 막는다. 안나였다.
횃불은 기름이 부어진 곳과 그리 멀지 않는 흙바닥에 떨어져 위태롭게 타오른다.
“정신 차려요!!! 이장님!!!”
“이거 안 놔!!!”
“이장님!!! 아장님 말대로라면 플로이는 이장님 손자잖아요! 이제 그만두세요!”
“아니다...이놈은 죄악의 원흉이야!
이장이 어떻게든 뿌리치려 하지만, 안나가 놓아주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필사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플로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연우에겐... 마지막 찬스다!
안나가 플로이를 지키면서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그사이 어떻게든 십자형틀을 풀어내지 못하면 이제 다음은 없다.
연우는 어떻게든 십자형틀에 구속된 몸을 스스로 풀어내야만 한다!
연우도 지금 이 순간 플로이와 함께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판단하고, 한 번이라도 더 행동해야 한다.
강한 남자는 눈물 따위로 일을 그르치지 않으니까!
플로이의 가슴 아픈 사연 때문에 마음이 요동쳤지만, 연우는 온 정신을 내면의 힘을 깨우는 데 집중했다.
그 힘만 있다면... 그 힘만 있다면!!!
십자형틀 정도는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다!
***
하지만 도저히 그 힘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젠장! 아무리 왜 안 되는 거지?
힘을 각성하기에는 아직 분노가 부족한가?
연우는 서둘러 분노의 감정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마치 눈물을 흘리기 위해 슬픈 생각을 해야 하는 배우의 노력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연우는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지금 필요한 감정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사용하기 위해 분노를 이끌어내려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젠장!!!”
바빠 죽겠는데 도저히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분노조절장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지만, 여전히 계속 실패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내 안의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거지?
아니, 혹시 내 힘을 발동하는 열쇠가 단순히 분노의 감정이 아닌 건가?
연우는 혼란스러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힘을 각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연우에겐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이 거대한 마음속 혼란의 토네이도를 정면돌파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이!
하지만 판단이 서질 않는다.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다.
연우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뭔가... 연우가 심각하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음을!
그오오오오오오-
그런데...
또 다시 연우의 판단을 흔드는 상황이 닥쳐온다.
좀 전부터 계속 상태가 이상해 보이던 이장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안나를 갑자기 밀쳐내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물처럼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크와아아아아아악!”
분노로 폭주하기 시작한 쪽은 연우가 아니라 오히려 이장 쪽이었다.
“뭐.... 뭐지... 저건,,,?”
이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닌 것처럼 보였고, 옷이 찢어짐과 동시에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곧 이장의 몸속에 등뼈가 살을 뚫고 나와 가시처럼 솟아오르고, 손가락뼈 열 마디도 가시처럼 길게 자라난다.
그리고 이장은 놀라 쓰러진 상태로 뒷걸음질 치는 안나를 향해 온몸을 좀비처럼 꿈틀대며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아닌 괴물의 음성이었다.
***
안나의 다리 사이로 물이 흘러나온다. 더 이상 안나는 이장을 막을 수 없었다.
극한의 공포속에서 안나는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조차 거의 잃어간다.
“이... 이장님!!! 사... 살려주세요.”
“크오오오오오”
안나는 이장에게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이장은 이미 인간성을 완전하게 상실한 듯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사삭-
“흐읍.... 흐어어어어억....”
상황을 체 가늠할 틈도 없이 이장은 가시처럼 자라난 손톱으로 안나의 배를 빠르게 찔러 넣었다.
안나의 등 뒤로 날카롭게 갈린 괴물의 가운데 손톱이 튀어나온다.
“그만둬!!!!”
다행이도 괴물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했다.
괴물은 안나의 몸에 박힌 손톱을 빼내고 연우에게 돌아섰다.
안나는 구멍난 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크오오... 크오... 크오오오오”
괴물은 뒤돌아서서 연우를 바라보고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듯 입맛을 다셨다.
연우에게 주어진 시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 부랄 두 쪽 달렸으면 여자랑 어린아이 그만 괴롭히고 남자 대 남자로 붙어!”
“크오오오오오-”
괴물은 천천히 연우를 향해 다가온다.
연우는 힘을 끌어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아가리파이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터는 것도 도망칠 구석이 있어야 털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괴물은 인간성을 완전힌 상실한 상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말빨조져서 멘탈 흔들기도 할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괜히 털면 털수록 황천길 재촉하는 것밖엔 되지 않았다.
“사....혼....석......“
괴물은 연우를 바라보고 냄새를 맡듯 킁킁대더니 혼잣말로 사혼석을 되뇌고 있었다.
사혼석...? 사혼석이 뭐지...?
괴물은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기억이 떠오른 듯 바닥에 있던 횃불을 주워들었다.
“제길!!!!”
연우는 마지막 힘을 다해 십자형틀을 부숴버리려고 애썼다.
분노가 아니라면! 위기의 순간에 숨겨진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연우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너 지금 좃 됐어... 좃 됐어... 좃 됐어.... 진짜 좃 됐다고 씨바알!!!”
그때! 십자형틀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다?
“흐으으윽....”
하지만!
십자형틀은 연우의 터무니없이 약한 힘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 연우의 머리 위로 이장이 던진 횃불이 날아온다.
씨발-
불길이 연우의 온몸을 휘감으며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