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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뜨린 남의 페라리 걱정하랴, 잃어버린 콘티 다시 짜랴
긴긴밤을 지새다 깜빡 잠이든 사이에 그만 알람을 놓쳤다.
알람한번 놓쳤을 뿐인데 나비효과로 버스를 놓쳐 택시를 탔다.
그 덕분에 아침부터 거금 이만원이 나갔다.
그래도 지각은 안하겠지 했는데 내리자마자 건널목에 신호까지 걸렸다.
“오늘도 지각이면 어제처럼 재수 더럽게 없겠지”
결국 무단횡단까지 해가며 숨넘어가게 달렸지만 야속한 시계는 7시59분을 지나고 있었다.
[덜컥]
“8시 땡! 지각 벌금 만원”
필사적으로 뛰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김계장이 하경을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각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숨이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헉헉 나.. 안..”
“하경씨 몰골이...와...”
떡진 머리는 대충 묶어 산발이고 퉁퉁 부어 붕어눈이 된 하경을 보고 김계장이 깜짝 놀랬다.
하경은 김계장이 놀라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지갑안에 한 장남은 세종대왕을 뺏길 순 없다는 눈빛으로 김계장을 쳐다봤다.
“아.. 아깝다 만원 거둘수 있었는데”
김계장은 폐인같은 낯짝을 보니 실연당한걸 눈치챘다.
사내에 흉흉하게 돌던 그 소문이 이로서 사실임이 증명됐다.
누군진 몰라도 재벌이랑 사귄다고 사내에 소문이 파다했는데 요즘은 위기라더니...
실연당했는데 돈까지 뜯긴 뭐해서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경은 김계장이 돌아가는걸 보고 겨우 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 어떻게 됬어”
도리가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은 하경에게 말을 붙였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뛰어오느라 이마에 몽글몽글 맺힌 땀을 휴지로 닦고 정장 자켓을 벗었다.
버스 놓칠까봐 유니폼을 집에서 입고 출근을 했더니 카라가 꾸깃하게 접혔다.
옷차림은 신경도 못쓰고 손부채질을 하며 책상에 흐트러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주하경씨”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맨 뒷자리 책상에서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곧이어 허스키한 목소리가 위협적인 말투로 하경을 불렀다.
젠장, 노마가 먼저 와있었나 보다.
상무의 이름 노은진과 사악한 마녀라는 의미를 줄여 노마라고 불리는
그녀는 특히나 하경을 싫어했다.
더군다나 어제 ‘그 사건’ 때문에 아침부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분명했다.
“조심해”
노마에게 가보려는 하경의 옷을 살짝 잡곤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경고했다.
도리의 경고는 노마상무의 분노게이지가 꼭대기를 치솟았을 때 주는 경고다.
아침부터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마녀 소굴이라 불리는 노마의 상무실로 갔다.
열려져 있는 문으로 들어가 노마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기다렸단 듯 말했다.
“긴말 안해. 이거 써서 직접 본부장님한테 올려”
‘시말서’라고 적혀있는 하얀 백짓장을 책상위로 던졌다.
하경은 출근하자마자 시말서를 쓰라고 냅다 던지는 노마를 보자 화가 났다.
잘못한사람은 따로있는데 왜 시말서는 힘없는 사원이 적어야하는지..
정말 억울하다.
“상무님, 시말서 못쓰겠어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상무실을 힐끔 쳐다봤다.
이곳에서 노마에게 대드는 것은 곧 북한에서 반역을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어디서 그런용기가 튀어나온건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한번 대들곤 겁나서 하경은 손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노마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주하경씨, 우리 회사에 성희롱에 대한 방침서 읽어봤죠?”
“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요? 세창 본사 자금팀 부장이면 어느정돈진 하경씨도 잘 알죠?
실수로 엉덩이 좀 스쳤다고 뭘했죠?”
“엉덩이.. 좀 스친다고 그... 그것이 엉덩이에 닿을 리가 없잖아요 거기다 한두번도 아니고
상습범이라구요”
김정은 수상 앞에서도 이렇게 떨리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할말은 해야겠어서 하경은 떨리는 두 손을 서로 꼭 붙들며 말했다.
주변에 앉아있던 직원들은 하경의 소심한 대꾸에 뜨악!한 표정으로 일제히 하경을 쳐다봤다.
없는말 지어낸것도 아니고, 억울했다.
매번 은행에 들릴때마다 여직원들이 vip룸에 들어가면,
항상 실수인척 터치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머리까진 중년 남성이 있었다.
서류를 건내받을 때 다른서류를 보느라 못본 척 하고 손을 스치는건 기본이고,
설명이 이해가지 않는 척 하며 직원을 옆자리로 유인하고 등짝이며 엉덩이를
쓰다듬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질나쁜 놈이였다.
매번 오는 상습범인데 vip인지라 모든 여직원들이 몇 번 당하긴 했어도 항상 참아왔다.
그러나 어제, 문을 함께 나가는 척 하며 교묘하게 하경의 엉덩이에 물컹한 ‘그것’이
닿은 그 불쾌한 기분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vip룸의 문은 성인 3명이 나가도 충분할 정도로 큰 유리문인데,
하경이 나가자 일부로 바삐 나가다 몸이 부딪힌 척 하경의 엉덩이에 물컹한 그것을 갖다댔다.
다른건 참아도 도저히 추잡한 그 짓거리는 용납이 되질 않았다.
권력에 묻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세창백화점이면 세창그룹 후계자인 현경태가 있으니
문제가 되면 묻어갈수도 있겠지란 생각에 마음이 시키는대로 그의 중요부위를 깨빡냈다.
하경은 어제일을 떠올리자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같았다.
바람피고 있던 그 개자식이 날 지켜줄거라는 착각 속에 저지른 일에 대한 처벌이 억울했다.
울면 더 우습게 보일 것같아 입술을 깨물고 바들바들 서있기만 하자
상무는 가소롭다는 듯 하경을 비꼬았다.
“그렇다고 고객님 거기를..말야 발로 차도 되나? 실수로 부딪힌걸 가지고”
“실수요? 저뿐만이 아니고 당한사람이 한두명도 아닌데 실수라구요?”
누군가가 편을 들어줬으면 하고 여직원들을 향해 쳐다봤지만, 다들 하경의 시선을 피했다.
배신자들. 다들 당했으면서 그 아무도 하경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절실한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았지만 하경과 눈이 마주칠까봐 뒤돌아 앉아 딴청을 부렸다.
“몇명이 당했든 세창에서 실수라 하면 실수인거에요,”
“cctv돌려서 확인하면 되잖아요. 명백한 정당방위였어요”
“거래 끊기면 하경씨 포함해서 직원 반 이상이 구조조정 될텐데... 그래도 괜찮나요?”
하경은 대답할 수 없었다.
원래 대한민국은 갑이 정의고 갑이 왕인 세상이니까
현경태랑도 헤어진 마당에 큰일났다 싶어 하경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대답 못하고 쩔쩔매는 하경에게 노마는 시말서 결제판을 내밀고 말했다.
“시말서 쓰고 바로 본부장님께 결제 올리세요. 목 날라가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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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말로 진정한 대를 위한 희생이다”
거짓 반성이 담긴 시말서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정말 쓰기 싫었지만, 몇 달전 애아빠가 된 김계장님, 학자금 대출을 갚는 도리,
곧 결혼을 앞둔 고참언니 등..
각자만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나 하나 때문에 백수되는 걸 볼 순 없는 노릇이였다.
[11층입니다]
이곳에서 1년 반이 넘도록 근무했지만 한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라 은근히 긴장됬다.
임원급 미만 일개 사원들은 11층에 올라올 일이 없으니 말이다.
“후 난 잘못한게 없어”
문이 열리자 긴장을 떨치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내리자마자 그녀의 당당함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너무 넓고 휑해서 그런지 걸을때마다 또각또각 신발소리가 울려퍼져 더 긴장감이 생겼다.
“저기요..”
당당했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명판을 꼬옥 품에 안고선 살금살금 주변을 살폈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구석진 곳까지 살펴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나”
앞으로 조금 걸어가니 텅 빈 인포데스크가 있었다.
데스크 바로 옆 복도에는 유리벽으로 된 통로가 있었다.
통로의 맨 끝엔 임원실 이라고 적혀있는 문이 있었다.
임원실 근처에 사람이 없는게 말이 되나?
누구라도 있겠지 싶어 아무리 살펴봐도 개미하나 없었다.그 흔한 데스크 직원도, 비서도 없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 이였다.
“저긴가..”
신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까치발을 들고 통로를 지나 임원실 문을 열었다.
넓은 방 안엔 캐비넷과 책상 ,그리고 탁자와 쇼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임원실이 드라마 세트장마냥 아무것도 없을수가 있지?
하경은 방안에 들어와 결제판을 올리러 책상으로 다가갔다.
본부장 ‘윤도하’ 라는 명판 하나만 덜렁 있고 아무것도 없는 깔끔한 책상이 보였다.
“으... 결제판만 보이잖아”
텅 빈 책상에 명판만 하나 있으니 꼭 봐달라는 듯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길 곳도 없어 씁쓸히 되돌아가려 임원실 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구두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지? 본부장님인가?
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빼꼼이 내밀자 통로를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고 기다란 다리로 걸어왔다.
폰을 들고 뭐라 소리치는 것 같은데 멀리 있어서 자세히 들리진 않았다.
곧 하경의 시야로 들어오자 평범하지 않은 오로라를 풍기는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디 검은 흑발에 윤기가 흐르는 구릿빛 피부, 오똑한 콧날에 역삼각형이 그려지는
다부진 체격, 그리고 차가운 눈빛을 가진....
왠지 어디서 본 듯 한 남자가 걸어왔다.
누군가 싶어 계속 쳐다보다가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어제 페라리를 박살 내다가 마주친 그 남자의 눈빛이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뜨억!”
확실했다. 어젠 후드티를 걸치고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긴가민가 했지만,
저 찬 서리같은 눈빛만큼은 그 사람이라는걸 확신하게 만들었다.
“소오름”
세상 좁다더니 이렇게 소름돋게 좁을줄이야 싶다.
울상을 지으며 임원실 안을 방방 거리던 하경은
급한대로 일단 임원실 구석에 있던 캐비넷 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캐비넷인지라 불편했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캐비넷에 숨자마자 도하는 신경질적인 대화를 하며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