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진상떨던 하경이 사라지자 임원실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차를 부순것도 모자라 성추행범을 만들고 사무실에 숨어 몰래 듣기까진 한 주하경이
소름끼치게 짜증났다.
2달전, 대표이사 취임이 1년후 이뤄질 정기총회때 대표이사가 정해진다는 발표가 있었다.
업적평가와 주주들의 투표로 윤해랑과 윤도하중 pa그룹의 대표가 결정되기로 한거였다.
도하가 9살 때 재혼한 새엄마 계현경을 따라 중국에서 온 형 윤해랑.
계현경의 피가 섞인 윤해랑이 pa그룹의 차기 대표이사가 될 거란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싫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자 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12년간 계이사가 고생이 많았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지”
“서자노릇 하느라 힘들텐데 사서 고생 하는구만”
한국으로 돌아와 pa그룹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들은 말들이였다.
계현경과 사이가 좋지않아 도하는 외삼촌을 따라 12년간 미국에서 지냈었다.
도하가 없던 긴 공백기간 동안 계현경은 주주들의 비위를 오랫동안 맞춰왔다.
그들의 똥꼬를 비데처럼 시원하게 햝아주니 그들은 자연스레
계현경과 한 편이 되어 도하에겐 적대적이였다.
저런 반응들을 이겨내고 제자리를 찾으려 지난 6년간 일에만 매진해 항상 좋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한번 잘못하면 열 번 잘한건 소용이 없어진다는 말대로 되어버렸다.
예상보다 앞당겨진 대표이사 취임 때문에,
단기적으로 큰 성과를 내고싶어 공격적인 상품을 만들었지만,
“이딴걸 기획하다니, 자네는 본사에 있을 자격이 없네”
날카로운 말을 듣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초반엔 약간의 손해율을 찍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분명 이익이 나올 상품이였지만,
“우리 한가한 사람들 아닌거 알면서 이러네”
“시간도 돈이야”
계현경과 주주들은 이때다 싶어 피라냐처럼 공격했고,
기획한 상품은 나온지 한달만에 폐기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손해를 본 주주들은 계현경의 의견을 따라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실력도 없는게 욕심만 많으니 이꼴이 났지”
“계이사가 칼같이 책임져 주는걸 보면 참 대단해”
주주들은 뾰족한 말들로 도하를 무참히 찔렀다.
그리곤 본사랑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까지 내쫓아버렸다.
가뜩이나 단 한 번의 실수로 부산지점에 유배 온것도 분통터질 일이다.
거기다가 또라이같은 여자랑 사사건건 엮이는게 몹시 불쾌했다.
“후..”
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몇일간 일진이 너무 좋지 않은탓에 자연스럽게 양 미간이 찌푸려졌다.
책상에 팔을 기대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다 하경이 올려놓은 결제판이 팔꿈치에 닿았다
“얼마나 잘난짓을 했길래 임원실까지 결제를 올리지”
아까 모르는척 해달라던 하경이 생각나 결제판을 열었다.
개발새발로 쓰여진 시말서였다.
시말서라니, 뭔가 단단히 잘못한 모양이였다.
가만, 여차하면 손쉽게 해고할 건덕지가 될 것 같은데?
도하는 읽기 힘든 글씨를 한자 한자 정성스레 읽었다.
“풉”
[물컹한 살갗이 엉덩이에 닿아 화를 참지 못하고 고객님의 음낭을 발로 찼습니다]
휘갈겨 쓴 글씨를 읽다 저 부분에서 또라이가 할만한 짓인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간도크지, 성추행범의 그곳을 발로 찰 생각을 하다니 역시 보통여잔 아니다.
똘기충만한 하경의 행동에 웃다 맨 마지막에 적힌
[어떠한 상황에도 서비스정신을 살려 행동했어야 했는데 경솔한 행동을 하여 죄송한 마음을
담아 시말서를 올립니다]
라는 문구가 도하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남자친구가 바람까지 핀걸 목격하고
실수로 박살낸 차 주인까지 마주쳤으니 그 여자 입장에서도 제대로 일진 꼬였겠구나 싶었다.
월급받고 겨우 먹고사는 것 같은데 수리비 1억을 청구하고,
이런 억울할만한 이유로 해고까지 하면 너무 잔인한가 싶어 생각에 잠겨있었다.
[똑똑]
임원실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주하경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들어오시죠”
도하가 말하자마자 부산지점 노상무가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은 상무를 보자 포스가 남달리 느껴졌다.
한손엔 결제판을 들고 도도히 들어와 도하의 책상에 결제판을 탁 내려놨다.
“보고 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도하는 인사는커녕 초면부터 사무적으로 구는 행동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하경이 쓴 결제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하시죠”
“시말서를 보시고 계신 것 같은데, 주하경씨를 어떻게 하실계획이신가요”
“노상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고객님이 더 이상 주하경씨 얼굴보고는 거래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상대로 하경의 해고를 강요했다.
이것을 빌미삼아 약점을 잡고있는 하경을 해고하면 편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하는 그녀가 해고당할 정도로 잘못을 저지른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세요, 내용을 보니 충분히 그럴만한 행동을 한 것 같은데 말이죠.
해고할 정도로 잘못한건 없는 것 같은데요?”
“본부장님 지금 제 말에 토다신겁니까?”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안경을 한손으로 슥 올리더니 노상무는 자기가 들고온 결제판을 들고
도하 앞에 펼쳤다.
“표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떤 임원이 외환상품하나 잘못 만들어서
우리 부산지점 수익이 뚝뚝 떨어지고 있죠. “
가져온 그래프를 검지손가락으로 일일이 찝어가며 숫자들을 가르켰다.
“이런 시국에 주하경씨가 고객님 비위하나 잘 못 맞춰서
우리지점 VIP고객과 거래가 끊기게 생겼는데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거 아닌가요?“
도하는 월별 수익통계만 놓고 보고하는 노상무가 황당했다. 단기적으로 볼때나 쓰는
월별 통계는 그저 새로온 상사의 기를 죽이기 위한 꼼수라는게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월별수익률 말고 년도별 수익률 계산해서 들고오시죠. 부산지점 오기 전에 한번 봤는데
매년 꾸준히 수익률이 1.4%씩 증가하고 있더군요.
아마추어같이 월별자료로 트집잡지 마시고요“
도하가 결제판을 노상무에게 넘겨주자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이가 어리다고 만만하게 봤는데 계현경 이사님 말씀대로 쉬이볼 상대는 아니였다.
“어떤 무능한 임원이 만든 상품 때문에 vip하나에도 눈치보고 살아야하는
부산지점의 상태를 월별로 보고하는게 잘못인지요?
저 여기서 20년 근무했습니다. 대표이사 아들이라는 타이틀로 부산지점에 놀러오셔서
대표행세 하시려는거 같아 불쾌하군요”
보고를 핑계삼아 자신의 발 아래로 두려는 수작이 도하의 눈엔 빤히 보였다.
“아, 텃세 부리시는건가요? 노상무님 정신차리세요 pa그룹을 단 6년만에 거대그룹으로
끌어올린 무능한 임원이 저라는걸요. 그리고 지금은 제가 부산지점 본부장입니다.
자기 위치 어딘지 제대로 파악 못하고 함부로 올라오지 마시란 소립니다”
도하가 차가운 눈빛을 내뿜으며 노상무의 눈빛을 제압하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올린 결제판을 보며 피식 웃더니 도하를 보며 말했다.
“역시 계이사님 말씀대로 당당하시네요. 앞으로 회사생활 재밌게 할 수 있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후 다시 도도하게 임원실 문을 열고 나갔다.
도하는 계이사 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관리가 되질 않았다.
일부로 한방 먹이려 계이사 이야기를 꺼낸 것이 확실했다.
“계이사면.. 계현경이겠지”
어쩐지 보자마자 물어뜯지 못해 안달난 것 같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계현경측 라인이라 기선제압에 들어간거였다.
계현경이 부산지점으로 유배를 보내자고 강력히 주장한데도 이유가 있었던거였다.
“이런 씨..”
상무가 계현경쪽 사람이면 트집하나 잡히지 않기위해 조심히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자신의 얘기를 엿들은 하경이 신경쓰였다.
“미친 진짜 골때리네 이거”
당당하게 내쫓았는데 다시 불러들여 타이르면 자존심이 상할것같고.
지금 꾸미고 있는 이 계획을 성공해야 되는데 하경이 입이라도 뻥긋 했다간 계획중이던
일들이 전부 계현경 귀로 들어가게 생긴 것이다.
“일이 꼬여도 이따위로 꼬이냐”
갑갑한 마음에 팔짱을 끼고 머리를 굴려대던 그때 ,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주하경을 내 라인으로 만들면 해결될일이였다. 입단속을 스스로 잘하게 만드는거지.
“그래 그거면 되겠다”
도하의 눈빛은 번뜩이며 폰으로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 구했어요 더 이상 안찾아보셔도 되요 준비만 해주세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진이 꼬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주하경을 통해서 고민하던게 해결이 되니
기분이 묘했다.
“이번일만 잘 해결되면..”
도하는 혼잣말을 하고선 임원실 문을 열고 어디론가 다급하게 걸어갔다.
**
3일동안 재수가 너무 없었던 하경은 밥도 못먹고 잠도 제대로 못잤다.
낯빛은 더 어두워졌고 다크서클은 더 짙어졌다.
“차였나봐 안됬다”
회사사람들은 하경이 단순히 실연의 고통을 온몸으로 보여주는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실연따위 때문에 괴로운건 아니였다.
‘이걸 스캔 할까 말까’
회사 책상에 앉아 대출신청서를 만지작 거리며 침을 몇 번씩이나 꼴깍거렸다.
이걸 스캔떠서 전송버튼만 누르면 1억이 대출이 되는 것이다.
“연이율 2.75%..”
이미 계산해서 알고있지만 긴장되서 그런지 혼잣말을 되뇌이며 계산기로 이자를 또 계산했다.
1억이면 연 275만원, 월 23만원 남짓하는 이자에 원금 1억을 갚으려면
숨만 쉬고 10년을 일해야한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말그대로 죽고싶었다.
이제 빼도박도 못하고 꼼짝없이 보상해줘야하는 상황이다.
월급 230만원으로 1억을 갚아나갈 생각에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곧 손님들도 올텐데 여기서 울면 안돼’
또 눈물이 나올거같았지만 휴지로 퉁퉁부은 눈물샘을 꾹꾹 눌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스캐너에 신청서를 넣으려는데
[띠리링]
직통 전화로 하경을 찾는 전화가 울렸다.
신청서를 휙 책상으로 던져버리고 전화를 급히 받았다.
“11층으로 올라와”
윤도하였다. 자기 할말만 하고 휙 끊어버렸다.
아직 일주일 안됬는데 설마 독촉하려고 부르는건 아니겠지.
본부장님이 다시 찾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전화가 오니 반갑기까지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까지 뛰어갔다. 곧바로 11층을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만나면 비참하더라도 한번만 더 매달려 보잔 심정으로 무슨말을 할지 고민했다.
‘잘못했습니다 돈이없어요’
‘시키는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 멘트들은 꼭 앵무새처럼 외워서 달성하리라 마음먹고 비장하게 11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임원실로 다가가 똑똑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숨을 후 하고 분후 문을 연순간,
도하는 하경의 손목을 휙 낚아채 쇼파에 앉혔다.
“아..어..”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할 틈도 주지않고 대뜸 계약서 한 장을 탁자위로 내밀었다.
“넌 잘못을 인정했지만 돈이없지, 그리고 뭐든 시키는건 다한댔지?”
“아 예..”
도하는 하경이 하려던 멘트를 순식간에 말해버렸다.
하려던 말을 대신 해주니까 무슨말을 해야할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여기 지장찍어”
“이게 뭐길래..”
“잘 읽어봐 우리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계약이거든”
하경은 계약서의 내용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을 주하경은 갑 윤도하의 차에 피해를 입힌 혐의로 1억원의
손해배상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아래 계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시, 을 주하경의 손해배상 금액 1억을
배상한 것으로 간주하고, 보상금을 지불한다. 아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약기간 1년
1. 갑 윤도하의 말에 을 주하경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
2. 을 주하경은 갑 윤도하의 연락을 무조건적으로 받을 것. 잠수타다 걸리면 계약파기
3. 계약은 엄중한 비밀로 여기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된다.
4. 이를 불이행할시, 계약은 파하게 된다.
위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시, 보상금 20억을 을에게 지급한다.
하경은 눈을 꿈뻑거렸다.
무슨 계약내용이 무식한 노예를 구하는것처럼 적혀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몇일전에.. 그 일 하는사람 구하는거에요?”
“알면 지장 찍어”
빨간 인주를 들이밀며 도하는 하경에게 압박을 해댔다.
무슨일을 하길래 수리비까지 퉁치고 20억원이란 거금을 주는건지 궁금했다.
“이거 계약하면.. 무슨일 하는건데요?”
“계약하면 말해줄게”
재벌집 아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이런 계약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드라마나 소설에서 나오는 약혼대행녀 같은건가? 싶었다.
순간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아 얼굴이 빨개졌다.
약혼 대행하다가 결국엔 진짜 결혼도 하던데..
“딴생각 하지말고 빨리 안찍으면 없던일로 한다”
멍 때리는 하경의 손등을 펜으로 틱틱 치며 말했다.
“예예 찍어요 찍어요”
하경은 앞으로 다가올 일은 예상치도 못하고 지장을 꾹 찍고말았다.
그저 차 수리비를 없던걸로 해주겠단 말에 덜컥 계약을 하고만 것이다.
지장을 찍는 순간 하경의 인생은 180도 변하게 될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 다 된거면 이제 가자”
“네? 어디를요?”
“일단 따라와”
하경의 팔목을 잡아끌고 도하는 임원실 문을 나섰다.
“어디가는데요?”
“서울”
너무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한 하경은 말 한마디 할새도 없이
그저 질질질 도하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