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가 끝나고, 호텔을 나오자 배실장님이 리무진을 대기시켜 놓고 하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나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파티가 끝난후 한시간을 기다렸다.
그랬더니 북적였던 호텔이 맞았나 싶을정도로 적막했다.
하경을 뒤따라 도하도 나오는걸 확인하자 배실장님이 차 문 앞으로 달려와 하경에게
칭찬을 했다.
“하경씨, 오늘 정말 잘했어요”
“계약에 충실했던 것 뿐이에요”
“오늘 일 덕분에 도하가 체면이 살았네요”
“감사합니다”
하경은 쑥쓰러운 듯 배실장의 눈을 피했다.
걱정과는 달리 잘해나가는 하경을 보자 배실장은 마음이 편해졌다.
배실장은 얼른 타라며 차 문을 열어줬고, 도하와 하경은 차에 올라탔다.
“오늘 고마웠어”
차에 몸을 싣고 출발하자 도하는 하경에게 뻣뻣한 억양으로 얘길 건냈다.
하경은 도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더 말을 하려 도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맙다곤 인사했지만 씁쓸한 듯 밖을 보고 있자 하경은 조심스레 묻고픈걸 물었다.
“근데.. 도하씨는 왜 그렇게 된거에요?”
“뭐가”
“왜 다들 도하씨를 안좋게 생각해요? 좀 깜짝놀랐어요. 소름돋을정도로”
“원래 힘 없으면 다 그런취급 받는거야. 모든게 이해관계에서 시작하고
이해관계로 끝나니까”
도하의 대답에서 왜 씁쓸함이 묻어나는지 캐치한 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6년이란 세월간 자리를 찾으려 필사적이게 고생했을
시간을 생각하니 도하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매 순간을 잔인하게 무시당하면서도 독하게 살아왔을 그를 보니 응원해주고 싶었다.
“힘내요! 내가 있잖아요 그래도 일 잘하는 유능한 ‘을’이 있는걸로 위안삼아요”
“좀 아쉽네”
“왜요?”
“니가 진짜 삼엘기업 딸이면 좋았을텐데”
“아 예 가짜라서 죄송하네요”
위로해주려 밝은 말을 건내도 비뚤게 나오는 도하는 역시 싸가지가 없었다.
하긴, 주변이 저렇게 험난한데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으면 그게 성인군자이려나.
싸가지가 없어 기분이 나쁘려다가도 오늘 본 도하의 비참한 상황을 보니
안쓰러움이 더 컸다.
왜 저렇게까지 해가며 대표자리에 연연하는지가 궁금했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서 대표가 되고싶은 이유가 있어요?”
“그건 왜”
“행복해 보이질 않아서요. 살아온 이유가 대표가 되기 위해서라니.. 이해가 안가요
꼭 대표가 되어야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해서요“
도하는 하경의 질문에 살짝 멈칫했다.
행복, 낯선단어였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여 얻고야 마는 계현경과 엮인 이후로,
행복 이란 단어가 인생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가 잃어버린 자리를 찾아야 그녀가 앗아간 어머니의 목숨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구요”
하경의 말에 생각이 많아보이는 도하를 보곤 하경은 괜히 물었나 싶었다.
가뜩이나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 더 어두워지자 하경은 차 안에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힐이 발 뒤꿈치를 깨물어 절뚝거리면서도 도하를 위해 술을 태워다 줬다.
“이건 뭐야”
“앞으로 잘해보자구요. 이유야 어쨌든 도하씨를 응원해주기로 했어요.
비록 가짜인 인맥 지원군이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 잘해봐요”
하경이 술잔을 건내자 도하는 아까 싸가지 없게 굴었던 행동이 이내 미안해졌다.
처음 만나게 된건 악연으로 시작했을진 몰라도, 생각해보면 거의 반강제로 끌려와
시작된 계약이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언론사에 퍼트리기만 해도 차 수리비 값 정돈 받았을텐데.
싸가지 없는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는 하경이 고마우면서도 궁금해졌다.
“너 진짜 단순히 돈 때문에 날 돕는거야?”
“당연히! 처음엔 그랬죠. 근데 오늘 도하씨 보고 느꼈어요.
뭐랄까.. 동지같다고 해야하나? 난 윤도하씨가 그런 처지인줄 전혀 몰랐거든요.
근데 코너에 몰리는 모습 보니 회사에서의 나같다고 해야할까요..”
하경은 술을 한모금 마시며 말을 덧붙였다.
“뭔가 필사적이여 보이길래요. 도하씨도 도하씨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내가 생계를 위해 매달리는 모습이랑 좀 닮았어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요
잘해봐요 우리“
어울리지 않게 멋진 말들을 꺼내는 저 여자.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악연으로 시작해 만났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동료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해졌다.
도하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대답하려던 그때,
[♩♬♪♩♪♬]
“어 아빠!”
눈치없는 하경의 벨소리는 분위기를 와장창 깼다.
거기다 아버지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폰너머로 목소리가 다 들렸다.
[이노무 기지배는 왜이리 전화를 안받노]
“바빴다 일하느라고”
아버지의 서운한 대답에 무뚝뚝한 부산 사투리로 대꾸를 해주자 도하의 귀에
쏙쏙 박히게 들려왔다.
부산 사투리를 실제로 들어본건 처음이라 굉장히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언제 오노 아부지 안보고싶나]
“내야 항상 보고싶지. 근데 바쁜걸 어쩌겠노”
[하도 연락이 안되가 전화해 봤다. 우리 공주님 너무 바쁜거 아니가]
도하는 웃음이 팡 터졌다.
구수한 사투리로 공주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나왔다.
하경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려 작게 전화를 받았다.
“다 큰 딸보고 공주가 뭐고 촌스럽게”
[어릴땐 공주님카면 좋아하디만 서운하네]
“둘이있을때만 해라 지금 회사다”
[알겠다 전화좀 하고 집에 좀 자주 들리라]
“알았다 이따 전화할게”
하경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도하는 큭큭 거리며 웃더니 말을 꺼냈다.
“아버지랑 사이 좋은가보네”
“제가.. 집에선 공주에요 아버지가 절 좀 많이 아끼시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밝구나. 부모님이 사랑을 많이주셔서”
하경은 도하의 말에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다.
술을 한모금 마시곤 허심탄회하게 얘길 꺼냈다.
“어머니는 안계세요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요”
도하가 꺼낸 부모님이라는 단어에 하경은 입을 달싹거리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이였는데, 괜시리 오늘은 아버지 이야기가 하고싶었다.
“저 혼자 키우신다고 남들보다 두배는 더 힘드셨던 분이에요.
우리 아버지만 생각하면 꼭 이번일 성공하고 싶어요”
도하는 숙연해진 분위기에 아무 대꾸도 하질 못했다.
그저 컵만 만지작 거리며 조용히 하경의 말을 들어줄 뿐이였다.
“아 제가 주책스럽게 쓸데없는 얘길 했네요”
“나도 어머니 안계셔”
“네? 계시잖아요”
“계현경은 친엄마가 아냐”
뭔지 모를 동질감에 도하도 하경에게 처음으로 부모에 대한 이야길 했다.
살면서 한번도 친모에 대한 이야길 해본적이 없었는데, 마신 술이
몽롱하게 만들어서인지, 분위기에 휩쓸린건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나왔다.
“아.. 그럼 친모는...”
“버리고 갔어. 내가 9살 때. 이렇다 할 추억거리 하나 없이 그냥 떠났어”
“아.. 그래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하경이 걱정섞인 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도하의 귀엔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어머니가 날 버리고 혼자 목숨을 끊던 그날이 떠올랐다.
잊어버리자 옛날일이다 하는데도 나이 30이 되어서도 잊혀지질 않았다.
그날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그게 원동력이 되어 이렇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도하는 멍하니 혼자 생각을 곱씹었다.
그렇게 몇십분을 침묵속에 보낸걸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경은 입에 침을 줄줄 흘리며 잠들어있었다.
“어쩐지 자고있어서 조용했구만”
창문에 기대 잠들어 있는 하경을 바라봤다.
한없이 밝은줄로만 알았던 사람도 슬픔 하나정돈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기도 했다.
내가 주주들 사이에서 이런 존재이듯, 이 여자도 회사에선 그런 존재였겠구나.
계현경에게 시달려왔던 그 시간동안 이 여자도 내가 모를 무언가에 맞서 살아왔겠지.
“드럽게 무겁네”
도하는 쇼파처럼 생긴 좌석에서 나와 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잠들어있는 하경의 다리를 자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경을 편히 눕혀놓고 나니 드레스가 살짝 들리면서 하경의 까진 발 뒤꿈치를 보게됬다.
“발이 이모양이면 말을 하지”
도하는 퉁퉁 붓고 까진 발을 보자 미련하게 참고 서있었을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발이 이모양이 되도록 아무말없이 도와준 하경이 너무 고마웠다.
묘한 동질감과 고마움이 몰려와 도하는 뭐라도 해주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슈트 안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삼촌 잠시만 차 좀 세워줘”
**
“하경씨 다왔습니다”
하경은 부스스 눈을 떴다.
벌써 호텔에 도착해 배실장이 차 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말을 건냈다.
“헉 뭐야”
정신차리고 보니 차 안엔 아무도 없고, 도하가 앉아있던 자리까지 뺏어 누워 자고 있었다.
손으로 입옆에 있는 침을 슥 닦고 휙 앉았다.
신발을 신으려 앉았는데 퉁퉁 붓고 까진 발이 덜아픈게 느껴졌다.
뭔가가 붙여져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드레스를 들어올려 발을 봤다.
“언제 이렇게 붙여놨지”
하경의 까진 발엔 방수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어찌나 세심한지 뒷꿈치 뿐만이 아니라 까진 엄지발가락에도 크기에 맞춰 붙여져 있었다.
배실장은 하경이 갸웃거리면서 발을 보자 웃으며 대답했다.
“도하가 붙여놓고 갔어요. 하경씨 발이 부었다고 마사지도 하다가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아 그리고 힐 신지 마시고 옆에 그거 신으시면 됩니다”
“옆에 뭐가 있길래..”
하경은 두리번거리며 힐을 찾다가 힐 옆에 포근하게 생긴 토끼슬리퍼를 발견했다.
푹신하게 패드가 깔려있는 앙증맞은 하얀 슬리퍼를 주워들자
슬리퍼에 붙어있던 귀여운 토끼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도하가 하경씨 발 아플거라고 슬리퍼도 사다놓고 갔어요. 그거 신고 호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유 고맙습니다”
“저한테 말고 도하한테 고맙다고 해야죠”
배실장은 가볍게 목례를 하곤 앞좌석으로 돌아갔다.
하경은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싸가지는 없어도 은근 사람 감동시키는 면은 있나보네 싶어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폭신한 신발을 신고 차에서 내려 호텔로 걸어가며 고맙단 톡을 남기려 폰을 열었다.
[1억 :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뭐지?”
[먼저 부산에 내려가 있어 난 일이있어서 좀 늦게 가야할 것 같다
그리고 토끼는 너 닮아서 샀다]
“날 닮았다고?”
동그란 눈망울에 귀여운 앞니가 톡 하고 튀어나온채 손엔 당근을 들고있는 얘랑 나랑?
드레스를 들어올려 슬리퍼에 붙어있는 토끼를 다시 한 번 봤다.
“어딜닮았단 거야”
아마도 칭찬인 것 같아 하경은 웃음을 배실 흘렸다.
부산에 돌아가면 어디가 닮았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하며 호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