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씨 괜찮아요?”
충격적인 상황에 바닥에 엎어진 하경은 해랑을 보며 애써 웃어보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머릿속은 백지장이다.
우선 윤도하의 눈치를 보기위해 도하를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가현씨 어디 아파요? 갑자기 주저앉아서 깜짝 놀랬어요”
“다리에 쥐가나서.. 고마워요”
하경은 해랑의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옷을 털어낼 새도 없이 앉으나 서나 같이 왔던 도하를 찾았지만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건지 찾아낼 수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하경이 넘어진 골목길 옆
전봇대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보고 있는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저 인간은 왜 숨은거야’
하경은 도하를 부르려 입을 떼려 했다.
그러자 도하가 검지손가락으로 쉿하며 코에 갖다대자 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랑은 하경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지만 다행히도 도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해랑과 목적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어요. 여긴 어쩐일로 오신거에요?”
“음... 아직 저 기억 못했어요?”
“네?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잘 안나서요”
“그럼, 오늘은 일이 생겨서 부산에 왔다고 해두죠”
해랑은 하경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하경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도하는 그 둘의 뒤로 쫓아와 몰래 미행하며 태워버릴 듯이 노려봤다.
‘기억이 안난단건 뭐지? 아는사인가? 주하경 나한테 사기친거야?’
‘저 새끼는 여기 왜 여깄는거야 분위기 다 깼네’
도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둘의 대화를 듣기위해
지나가는 행인인 척하며 대화를 엿들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진짜 반갑네요 혹시나 했는데..”
“네?”
“아니에요. 어디가는 길이에요?”
“아..저 그게 약속이 있어서요 누구 좀 만나러가는 길이였어요”
“아깝다. 시간 있으면 같이 저녁 먹을랬는데”
해랑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지곤 하경과 계속 걸어갔다.
하경은 계속 따라오는 해랑이 신경쓰이고 자꾸 뒤따라오는 도하는 더 신경쓰였다.
자꾸 주변을 살피며 정신없어 보이는 하경을 보고 해랑은 이상함을 느꼈다.
“가현씨, 자꾸 어딜봐요? 누가 와요?”
“예?? 누가 오긴요 길이 여기였나 저기였나 약속장소가 헷갈려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뒤따라오는 도하와 해랑의 눈치를 번갈아 보자 하경은 미칠맛이였다.
도하는 그런 하경의 표정을 보고 어쨌든 빨리 윤해랑에게서 벗어나게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야 이 상황에 대해 추궁이라도 해볼테니 말이다.
도하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추월하곤 그들의 앞에 섰다.
‘윤도하씨 어디갔지?’
하경은 해랑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뒤따라 오는 도하가 사라진걸 알고 불안해졌다.
둘만 두고 도망갈정도로 본인을 신뢰할리 없는데 어디간건지 걱정됬다.
계속 해랑의 눈치를 보고 주위를 살피다 앞을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의 등에 부딪혔다.
“하경씨 조심해요!”
“앗 죄송합니다”
해랑의 손이 한발 느려 하경은 얼굴을 그 사람의 등에 갖다박았다.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도하의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 혹시 류가현씨 아니세요?”
“예? 아 아아!! 윤도하씨 맞죠? 여기서 다보네요?”
“여기서 다보긴요. 우리 오늘 사업상 미팅 하기로 했었잖아요.”
“아..약속 했었..죠! 참 여기말고 다른데서 보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만났으니 됬고, 가시죠”
도하는 해랑을 못 본 척 하고 하경의 팔목을 잡아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들의 어색한 대화가 뭔가 미심쩍었는지 해랑은 하경의 반대쪽 팔을 잡고 못 가게 막아섰다.
“보기로 한 사람이 윤도하였어요?”
“네.. 그게”
“어 나랑 가현씨랑 만나서 pa그룹 경영계획에 대해 상의 좀 하려 했지”
“그걸 왜 니가 하는데”
해랑은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를 없애곤 무섭게 노려봤다.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정색하는 모습을 보니 하경은 겁이 났다.
묘하게 쎄한 분위기에 싸움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럼 누가해? 아~ 계현경 이사님이 하셔야하나?
근데 가현씨는 정식으로 대표직 받은것도 아닌데 그분이랑 얘기하는 것 보단
실력있는 나랑 상의하고 싶으시다던데?”
도하가 하경의 팔목을 잡아 땡겨 도하의 등 뒤로 하경을 옮겼다.
그러자 해랑은 도하의 등 뒤로 다가와 하경에게 직접 물었다.
“가현씨. 정말 그랬어요?”
“아뇨. 도하씨 제가 언제 그랬어요. 아무래도 두 분이 생각하는
경영계획이 다른 것 같아서 따로 만나려고 했었죠 다들 표정 좀 피세요
이러다 싸움이라도 나겠다”
하경은 능글맞게 웃으며 팔목을 잡고 있는 도하의 손을 슬그머니 빼고 대답했다.
도하는 그런 하경의 반응이 어쩐지 서운했다.
아무리 싸움이 날까봐 중재 하는 거라도 같이 동업하는 사람은 난데.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면 주하경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갔을텐데.
손발이 맞지 않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랑은 씁쓸해 보이는 도하의 표정을 읽곤 다시 미소를 머금고 하경에게 말을 걸었다.
“가현씨. 중요한 미팅이에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건..”
“그럼 저랑 오늘 얘기 좀 해요.
안그래도 가현씨랑 사업차 할 얘기도 많았는데 잘됬네요”
해랑은 하경의 팔목을 휙 잡곤 자신의 옆에 다시 세워뒀다.
하경은 사람도 많은 이 길목에서 무슨 유치한 짓들인지 미칠 것 같았다.
세 번만 참으면 인생이 바뀐다던데, 이미 참을 인자를 다 써버린 하경은 둘의 팔목을
휙 잡으며 소리쳤다.
“뭘! 이렇게 어렵게들 구시나요! 다 같이 갑시다! 가서 같이 할 말 합시다 됬죠?”
도하와 해랑은 하경의 똘끼에 자신들이 기싸움을 하고 있었던걸 새까맣게 까먹었다.
벙찐 표정으로 하경의 손에 이끌려 골목을 돌아 큰 길가로 나왔다.
하경은 일단 빨리 이들을 앉혀서 진정시켜야겠단 생각뿐이였다.
하지만 이 무거운 성인 남성 둘을 오랫동안 끌고갈 순 없었다.
큰길가의 사람들에게 치여 죽겠어서 모르겠다 싶어 바로 옆 허름한 고깃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여기는 왜 가시는데요? 우리 오늘 맛있는거 먹으러 가기로 한 것 아니였나?”
도하는 하경의 손을 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삼겹살에 사람 북적이고 지저분해 보이는 고깃집이라니.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불쾌해서 가기 싫었다.
“싫으면 마세요. 해랑씨 가요 우리끼리 중요한 이야기 해요”
“아 아뇨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갑시다. 좋은 장소 잘 골랐네요”
도하는 하경의 대꾸에 이를 앙다물고 웃으며 억지로 대답했다.
어쩜 저렇게 사기를 얄밉게도 잘치는지 이 상황이 끝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속으로 칼을 갈 곤 해랑과 하경을 뒤따라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
“흐어어”
하경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삼겹살집에 들어오면서 성인 남성 2명 때문에 할 일이 많았다.
사업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으르렁 거리며 언성이 높아져 안되겠다 싶어
5시간 내도록 짠과 건배를 반복했다.
대화할 여지를 주면 으르렁 거리는 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뜨어 딸꾹 지배.. 가자 딸꾹”
평소 주량보다 오버한 탓에 하경은 결국 집에가잔 말을 끝가지 하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가현씨. 정신차려봐요”
해랑이 걱정스러운 듯 엎드려 있는 하경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무리 세게 흔들어 깨워봐도 아무런 미동이 없자 자신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하경에게 얹져줬다.
도하는 그 꼴을 보니 짜증이 몰려왔다.
해랑과 하경의 사이에 대해 술자리가 끝나면 물어보려 했는데 혼자 엎어진 것도 모자라
얼굴도 보기싫은 윤해랑과 한 공간에 있게 만들어 성질이 곤두섰다.
근데 더 미치겠는건, 둘은 무슨사이였길래 윤해랑이 주하경만 보면 버터같이
느끼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고 그런 꼴을 보고있는게 더 싫었다.
“가현씨 가요”
몇 번을 흔들어 깨워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해랑은 하경을 일으키려 했다.
꼴시린 것도 모자라 동업자를 윤해랑한텐 뺏길 수 없어 도하는 해랑의 손을 밀쳐 제지했다.
“뭐하는 짓이야”
“네가 뭔데 가현씨 데려다주네 마네 하는데”
“그런 넌 뭔데 가현씨 챙기는것도 못하게 하지?”
둘은 서로를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기싸움을 했다.
이내 해랑은 아무래도 윤도하에게 가현과의 사이를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 같아
다시 자리에 앉아 소주를 한입 마시고 입을 뗐다.
“내가 본사에 있으니 업무적 이야길 하는건 가현씨랑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지방에 찌그러져 있는 니가 가현씨를 만나서 할 말이 있을만한게 없을텐데?
잘보여서 다시 돌아오려고 들러붙는것도 정도껏 해야지”
해랑은 차분하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도하를 혼내듯 말했다.
도하는 건드릴게 없으니 이런식으로 심기를 건드리는 해랑이 가짢았다.
도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한잔 따라 한입 마시고 대꾸했다.
“첩새끼 주제에 말이 많네”
“뭐?”
“우리 집안이랑 피 한방울도 안섞인 주제에 친아들 행세하고 다니면 친아버지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해랑은 순간 도하를 주먹으로 한 대 칠 뻔했지만, 내면의 냉정함을 되찾아 다시 대꾸했다.
“첩새끼한테 자리 뺏겨서 억울하면 한
번 올라와 봐.
네 따위가 올라올만한 자리가 아니란걸 알게 해줄테니까”
“회삿돈 살살 횡령해서 주주들 엉덩이나 햝아주는 계현경 덕분에 올라간거 아닌가?
능력 없으면 조용히 살아 계현경 따라 추잡한 짓이나 따라하지 말고”
“뭐? 말 다했어 개새끼야?”
해랑은 침착을 잃었다.
도하가 방금 말한 그 말은, 해랑에겐 ko패를 당할만한 어퍼컷이였다.
자기 스스로가 역겨워 했던 현실을 윤도하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는게 화가났다.
결국 해랑은 도하의 멱살을 잡는 바람에 주변의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됬다.
“쳐봐. 내일 신문에 재밌는거 실리겠네”
도하가 계속 해랑을 자극하자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동영상까지 찍었다.
하지만 해랑의 눈엔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팩트를 지껄인 윤도하가 재수없어 한 대 쳐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때,
“방해되잖아요! 좀 나가서 싸우세요”
뒷테이블에 앉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둘을 향해 소리쳤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매서운 눈매에 범상찮게 생긴 여자가 굽고있는 고기를
카메라로 찍으며 말했다.
둘은 감정이 격해져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도하와 더 격하게 반응을 했다.
여자는 자신이 무시당하자 들고 있던 카메라를 테이블에 놓고 외쳤다.
“동석아”
“예 누님”
대장부처럼 우렁차게 이름을 부르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한 남자가 나왔다.
100kg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우람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 덩어리였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싸우고 있는 그 둘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남자는 도하와 해랑에게 다가가 그 둘이 잡고 있는 멱살을 손쉽게 저지했다.
“마 손님들요. 맛있게 드셨음 고만 집에 가시죠. 영업 방해됩니다”
남자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해랑과 도하를 한손에 제압해 테이블에 앉혔다.
해랑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구경났다는 듯 폰을 들이밀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쳐다봤다.
여기서 일이 더 커지면 곤란해질 것 같아 억지로 사과를 건냈다.
“죄송합니다”
“예 손님 그러셔야지요. 아 그리고 여기 여자분 꼭 챙기십쇼”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도하와 해랑을 흘겨보곤 남자는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도하는 일단 고깃집을 나가야겠단 생각에 엎어진 하경을 들춰 업었다.
그러자 해랑은 못마땅한 듯 도하를 보며 말했다.
“가현씨 어디다 데려줄건데”
“알아서 할거니까 넌 내 눈앞에서 꺼져”
“내가 널 뭘믿고. 제대로 모시고 가는지 끝까지 지켜볼거야”
해랑은 하경을 들춰업고 나가는 도하를 따라 걸었다.
도하는 하경의 집도 모르는데 어디에 데려다 줄지 난감했다.
모텔같은 곳에 혼자 두기엔 위험하고, 윤해랑이 도하와 하경의 사이를
별거 없네 라고 생각할것만 같아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해버렸다.
“우리집 옆집살아 우린 좀 각별한 이웃이거든”
“옆집?”
해랑은 살짝 놀란 듯 말을 멈췄다.
그렇지만 기세등등한 도하의 표정을 보자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어 그러니까 넌 좀 사라져 줄래? 같이 있으면 역겹거든”
“그럼 더 끝까지 봐야겠네. 니가 더러운 짓 할까봐 가현씨가 더 걱정되거든”
해랑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도하는 일단 작전상 후퇴다 싶어 대리운전을 전화로 부른 후 입을 닫았다.
둘은 말없이 걷다 차가 세워진 주차장에 도착했고, 대리운전 기사는 마침 근처에 있어
미리 와있었다.
도하는 대리기사에게 차키를 건네곤 하경을 뒷좌석에 앉히곤 그 옆에 앉으려 했다.
그러자 해랑은 도하에게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뭐하는거야 니가 앞으로 가야지”
“내가 왜”
“차주인이 앞으로 가야지 내가 거기 앉지”
“뭔소리야 니가 내차에 왜타”
해랑은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자 도하가 앉은 반대쪽 차문으로 가
하경을 중간으로 밀쳐내곤 앉았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두명과 중간에 여자가 끼어있으니 참 볼만한 광경이였다.
기사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기.. 그럼 여자분을 조수석에 태우면...”
“그냥 가주세요!”
해랑과 도하는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고 노려보며 대답했다.
기사는 이 난감한 상황에 끼지 않는게 낫겟다 싶어 차에 시동을 걸고
도하의 집인 J파크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