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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다 왔어”
“얼마에요?”
“만 오천원”
하경은 피같은 만오천원을 지갑에서 꺼내 택시기사에게 건냈다.
기사 아저씨는 백미러를 통해 하경을 위 아래로 훑으며 주시했다.
돈을 받아가는 아저씨의 눈빛이 이상한걸 느낀 하경은 부끄러워 쓰고왔던
도하의 후드모자를 괜시리 꽉 조였다.
“저기”
“네?”
“힘내. 주변 시선 의식하지 말고”
“예에?”
“남자가 되고 싶을수도 있지 그럼 아주 잘 어울려 그러니까 어깨 쫙 피고 다녀”
윤도하 집에 더 있기엔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손발이 견딜 수 없어
도하 옷을 입고 나온게 화근이였다.
아니라고 대답 하기도 뻘쭘해 하경은 거스름 돈을 받자마자 도망가듯 택시에서 내렸다.
“옷 진짜 어휴..”
하경은 엉덩이 까지 내려오는 NY라 적힌 후드티를 펄럭였다.
허리가 커서 발목까지 내려온 반바지는 2000년대에 유행했던 힙합바지 같았다.
“으 쪽팔려”
산을 깎아 만든 하경의 자취방은 차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였다.달동네처럼 가파른 골목길을 굽이 돌아 올라가야하는 이 상황이 심히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이 혹시나 알아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였다.
좁은 동네라 누구 하나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요상한 소문이 돌아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 딱 쉬웠다.
방값이 싸서 자리잡게 된 자취방은 하필 고모들이 사는 집과 너무 가까웠으니 말이다.
남자옷을 입고 다니더라는 소문이 나면 팔짝 뛸 아버지와 고모들을
생각하니 절대 들키면 안되겠다며 비장해졌다.
“후 후 흡”
눈만 내놓은 채 후드모자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집을 향해서 전력질주했다.
다리에 알이 울끈불끈 거리며 땡겼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다리야 힘내자. 도착하면 내가 너의 알을 풀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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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좋다!”
미치게 뛰어올라 다행히 아무도 도하의 옷을 걸친 모습을 보진 못한 듯 했다.
헐렁한 옷을 벗어던지고 시원하게 샤워까지 하고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시원하고 편안하니 자동으로 눈이 스르륵 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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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씨.. 나에요.. 기억 안나요?”
“으음..몰라요...”
“잘 생각해 봐요.. 난 가현씨 아는데..”
“으.. 자꾸 강요하지 마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윤해랑의 목소리.
자꾸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강요하자 하경은 숨이 막혀왔다.
도대체 누구길래 애타게 기억해달라고 하는건지 모르겠다.
“난..정말 기억이 안나요”
“기억 안나면 안될텐데”
갑자기 해랑의 목소리가 확 낮은톤으로 변하더니 모르는 남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누구세요”
“주하경씨 당신을 형법 제347조 사기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헉, 사기혐의라고?
벌써 들킨거야? 난 자고있는데 여기까진 또 어떻게 알고 온거지?
“야이 가시나야 내가 아무리 니를 엄마없이 혼자 키웠대도 범죄자론 안키웠다.
니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노”
아버지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길 시작했다.
미안해 아빠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런게 아니야
정말 미안해..
“가시죠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뭐지..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이끌려 몸이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체포된건가? 나 이대로 깜방 가는거야?
안돼, 이건 아니라고 이건 아니라고!!!!
“으아아악!!”
하경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너무 끔찍한 꿈이였다.
현실이랑 꿈이랑 구분이 가지 않을정도로 생생했던 악몽.
요 몇 일 일어난 일들이 은연중에 계속 신경쓰이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하경은 침대를 벗어나 냉장고에 있는 물을 마시러 가는길에 옷장을 지나쳤다.
그 앞에 서있으니 문득 해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옷장 한번 잘 뒤져봐요”
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옷장을 열었다.
옷장 뒤진다고 그사람에 대해 기억이 날 리가 있을까 싶었지만.
윤해랑씨가 꿈에 나왔단 것 자체가 스스로를 찝찝하게 만드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뒤져보란거야”
하경은 혼자 궁시렁 거리며 옷장 안을 샅샅히 뒤졌다.
그렇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자 에휴 하고 옷장 앞에 주저앉았다.
뭘까. 그 사람은 나한테 뭐였길래 나보고 애타게 기억해달라고 한거였을까.
다리를 쭉 피다가 툭 하고 옷장 옆에 있는 상자를 건드렸다.
입지 않는 옷들을 보관해놓던 상자였다.
처음 이사왔을 때 빼곤 한번도 손대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다.
“혹시..?”
하경은 살짝 머릿속에 스친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그사람인가? 아닐거야 하며 상체만한 상자를 열어 옷을 뒤적거렸다.
이옷 저옷을 빼고 맨 바닥에 있는 파란색 코트를 보니 하경의 머릿속에 번뜩 기억이 났다.
“중국???”
먹고 사는게 바빠 잊어버리고 살다가 코트를 보자 생생하게 떠올랐다.
2년 전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만났던 이셴이라는 중국남자 말이다.
“미친 헐 소름”
하경의 입에선 온갖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그 남자.
물에 빠진 카메라를 구해줬다고 돈지랄을 했던 그 남자가,
불가사리 먹으며 세상 외로운 표정을 짓던 그 남자가,
나한테 고백까지 했던 그 남자가, 윤해랑이였나?
아무리 세상이 좁다 하더라도 이렇게 마주치는건 반칙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코트를 한참 바라보며 생각에 젖어있다가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아 맞다!!”
일단 내가 기억해냈단 사실은 모두에게 비밀인걸로 결론을 내리고 약속준비를 했다.
계약이 끝날 때 까지만이라도 모르는 척 숨기면 괜찮을거라 마음을 진정시켰다.
진정한 사기꾼이 되어보자 다짐하며 하경은 코트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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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처가 맞나...”
해랑은 하경의 민증에 적힌 주소지를 네비에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동네를 몇바퀴나 돌았지만, 자꾸 네비는 도착이라 나오고 집처럼 생긴 건물은 찾기 힘들었다.
전부 상가나 편의점, 마트들 뿐인 큰길가에 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사람껀가.. 그건 아닌거같은데”
해랑은 혼자 중얼 거리며 하경의 집주변을 맴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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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멘붕을 겪었지만 하경은 꿋꿋히 이겨내기로 결심했다.
20억짜리 사기계약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자기합리화를 해나갔다.
일단 오늘 소화할 일정에 집중하자고 생각하며 하경은 지하철 역쪽으로 걸어갔다.
‘괜히 미안하네..’
어제 일도 그렇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동업한 여자가 알고보니 경쟁자에게
고백받은 사람이라니. 알고나면 분명 거품을 물 일이였다.
가뜩이나 냉소적이고 사람 잘 못 믿는 그 성격이 이 사실을 알고나면 더 심해질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빈 손으로 만나긴 좀 그래서 간단한 성의표시를 하자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사야 괜찮을까 고민하며 말이다.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꽃집이 있었다.
간판 이름이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 것 같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세요 꽃 사러 오셨나봐요?”
“네”
“한번 둘러보세요 예쁜꽃들 많아요”
친절한 가게 주인은 하경을 향해 싱긋 웃으며 안내했다.
향기로운 꽃들을 보고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입에 미소가 실렸다.
여러 가지 예쁜 색을 가진 장미, 앙증맞은 수국, 이름모를 예쁜 꽃들이 많았다.
하경은 장미를 살까싶어 장미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자 가게주인은 쪼로록 달려와 달갑잖은 설명을 했다.
“남자친구한테 드릴건가봐요 요새는 여자분들도 많이 사가시더라구요.
아무래도 장미가 예쁘죠?“
남자친구?
꽃을 주면 또 그런뜻이 되는건가 싶어 난감해졌다.
괜히 이상한 뜻으로 오해하는 것 아닐까 싶어 고민이였다.
현경태 이후로 재벌은 100트럭 줘도 싫어진 하경은
윤도하 역시 재벌이란 사실에 고개를 내저었다.
장미를 지나 몇발자국 더 내딛자 수많은 화분들이 보였다.
“혹시 꽃피는 화분은 있나요?”
“음.. 아 이거 어때요? 잘 키우면 예쁜꽃이 피거든요. 향기도 좋고”
“그럼 이걸로 주세요”
“그럴까요?”
살짝 잎사귀가 뿅하고 나와있는 앙증맞은 화분으로 결정한 하경은
계산을 마치고 꽃집을 나왔다.
받으면 무슨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며 화분을 보고 걷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주하경씨?”
“네?”
본능적이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를 향해 뒤를 돌아보자 하경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윤해랑이였다.
여기서 어떻게 만나게 된건지 , 자기 이름은 또 어떻게 알게된건지 혼란에 빠진 하경은
해랑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주하경씨 맞죠?”
“어..아..으.. 아니 여긴 어쩐.. 아니 이름”
하경은 당황해서 말이 똑바로 나오질 않았다.
아까 꾼 그 불길한 악몽이 떠오르자 이마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해랑은 하경이 손을 바들바들 떨며 당황하자 그녀를 우선 안심시켜야겠다 싶어 아무렇지
않은척을 했다.
“여기서 다보네요. 가현씨보다 하경씨가 더 잘어울려요. 이름 예쁘네요”
“아니..으..어 저기 그게”
“어디 가나봐요?”
“아 그 약속이 있어서”
“중요한거에요? 남자친구?”
“아뇨 남자친구는 무슨 없어요”
하경은 화분이 담긴 검은 봉다리를 팔목에 끼곤 오버스럽게 아니라며 양손을 휘저었다.
“하경씨 나 하경씨한테 할 말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줄래요?”
“무슨 할 말이요?”
“약속 중요한거 아니면 잠깐 미루고 같이 어디 좀 가요”
“어..어...”
해랑은 하경의 팔목을 잡고 큰길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하경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방금 일어난 일이 충격적이라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거기다 윤해랑씨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를일이니
하경은 우선 같이 따라가서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랑이 갓길에 세워진 벤츠에 조수석문을 열어주자
하경은 상기된 표정으로 얌전히 차에 올랐다.
“나 부산오면 가보고 싶은데 있었거든요”
해랑은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하경의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
하경은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길까라는 생각에 그 어떤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랑은 하경의 표정에 옅은 한숨을 내쉬곤
차에 시동을 걸고 그가 가고싶었던 송도 스카이워크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