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알았을 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여잔 무슨생각으로 그런 거짓말을 한걸까.
직접 얘길 들어보려 그녀를 찾았는데
“주하경씨 맞죠?”
“어..아..으.. 아니 여긴 어쩐.. 아니 이름”
나에게서 도망갈 것 같은 불안한 눈빛에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같이 말까지 멈춰버린 넌.
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
하경의 머리속엔 꼬인 실타래가 왕왕 엉킨것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해랑이 차를 세워주기 전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않고 정적을 유지했다.
‘생각해야해 까딱 잘못하면 감빵행이야’
불안한 마음에 손을 안절부절 못하며 에어백이라고 적혀있는 글씨만 바라봤다.
“하경씨. 예쁘죠?”
해랑은 부드럽게 운전해서 주차장 앞에 차를 세웠다.
눈 앞엔 주황색으로 물든 노을 진 바닷가가 보였지만,
하경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질 않았다.
“내려요”
해랑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하경은 기계처럼 뻣뻣하게 일어났다.
한시간동안 차에서 생각해 내린 어색한 결론을 속으로 되뇌이며 내렸다.
혹시나 이름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저 평범하게 살고싶어서,
남의 신분을 샀다는 어처구니 없는 핑계라도 대보자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핑계라 겁에 질린 눈으로 해랑을 쳐다봤다.
“하경씨 말 좀 해요 저 막 저승사자 보듯이 그렇게 보지말구요”
“제가 언제요 그렇게 안봤어요”
하경은 입만 웃는 어색한 웃음을 해랑에게 보냈다.
둘은 주차장을 지나 바닷가 위에 떠있는 구름다리 산책로로 걸어 올라갔다.
하경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 해랑의 눈치만 살살 살피며 걸었다.
스카이워크 위에 있는 사람들을 피해 쭉 걸어가자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을 발견했다.
끝 지점이라 노을은 더 장렬하게 보이는 가장 장관을 이루는 베스트 스팟이였다.
“하경씨, 제가 하경씨라고 불러서 불안해요?”
“그게 속이려고 그런게 아니라요 사실...”
“편한대로 불러줄게요 무슨 이름으로 부를까요?”
“전 둘 다 불편해요 그냥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하경은 불안해서 결국 지르고 말았다.
윤도하의 말이 맞았다.
애초부터 그냥 그 자리에서 전 윤도하씨랑만 친하게 지낼래요 라고 했어야 했다.
거기서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꼴이 나진 않았을텐데,
2년전에 만난 그 관계라 하더라도 기억나지 않는 척하고 더 이상 만나지 않고싶다
말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순 거짓말쟁이네”
“뭐요?”
“저요. 10살될 때 쯤에 중국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이혼해서 한국까지 이사왔거든요”
하경은 갑작스런 해랑의 고백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2년전에 만났을 땐 누군지 모르니까 흘려 말할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입장일텐데,
pa그룹 회장에게 첩이 아닌 다른 본처가 있었다는 건 그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였다.
모두들 계현경이 본처라고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안놀라는거 보니 기억났나보네요”
“왜 이 얘길 저한테 다시 하는거죠?”
“우리 친구니까요. 2년 전에 중국에서 만났을 때 친구로 지내기로 했잖아요”
하경은 해랑의 말을 듣자 뜨끔했다.
계속 기억이 나지 않는 척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간절해진 해랑의 표정을 보니 하경의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뭐길래 한국까지 와서 자신의 약점까지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는건지..
그에게 나는 뭐길래 이런 대우를 받는건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한테 해명 안해도 되요. 하경씨도 사정이 있겠죠 제가 세상에 거짓말하고 사는것처럼”
해랑의 반응에 하경은 마음이 녹아버렸다.
바닷바람과 노을이 진 이 다리 위에서,
우린 친구라고 자신의 약점을 먼저 내놓는 그에게 차갑게 굴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가 왜 그리도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말이다.
“해랑씨, 우리 2년 전에 한번 스쳐지나간 그냥 흔한, 그저 그런 사이 아니였나요?”
“그럼 그날 했던 말 다 거짓말이에요?”
“네?”
“나에 대해 알고나서도 그때처럼 똑같이 대해주겠다고 말한거 거짓말이였냐고요”
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피했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그가 정말 상처입을 것 같았다.
한번 스쳐지나간 인연을 왜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구라고 말하는 그에게 매몰차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하경씨한텐 제가 그저 그런 사람이였나 보네요. 근데 난 진심이였어요.”
해랑은 바닷물로 숨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먹먹히 말했다.
“그깟 하루 같이 보냈다고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진 모르겠지만.
난 매년 중국에 혼자 갈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마음이 저리고 힘들어요.
근데 유일하게 그 시간을 함께해 준 사람은 하경씨가 처음이였어요”
그날 봤던 쓸쓸한 표정이 다시 해랑의 얼굴에 퍼졌다.
별것 아닌 것도 누군가에겐 큰 호의로 느껴진다니 난처했다.
거리낌이 없는 사이라면 거짓말이 아니라고 쉽게 대답했을텐데.
엉킨 머릿속이 더 엉킨 기분이다.
윤도하씨를 생각하면 거짓말이라 말해야하는게 맞는데.
눈앞에서 세상 한없이 쓸쓸한 표정을 짓는 해랑에게 도저히 사기칠 순 없었다.
“거짓말 아녜요”
하경이 입을 떼자 해랑은 그제서야 하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을빛이 비쳐 황금빛이 나는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버린 관계로 다시 만나서
서로한테 100% 솔직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날 했던 말은 거짓말 아녜요 그러니까..”
하경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매몰차게 거절하고 다시는 만나면 안되는 사이이건만.
결국 마음이 약해져 하면 안 될 생각을 해버렸다.
“답답한일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요. 대나무 숲이라 생각하고 이용해요.
우리 서로 입장이 달라서 자주 만날 순 없겠지만..“
지르고 말았다.
말을 해놓고도 자꾸 윤도하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린 나를 자책했다.
해랑은 주머니에서 하경의 민증을 꺼냈다.
난간에 걸쳐있는 하경의 손을 잡아 그녀의 민증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우리 서로 친구 맞죠? 내가 어떤사람이든, 룽얼이 가현씨든 하경씨든
우리 그날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거 맞는거죠?”
하경은 주민등록증을 보고 깜짝 놀라 해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추궁했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우리 술 마신날 데려다 주면서 흘린걸 주웠어요. 오늘 찾아주려고 동네까지 찾아간거구요.
본의 아니게 숨기고 싶어하는걸 본 것 같아 미안해요”
하경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놓았다.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가득했었다.
벌써 윤도하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뒷조사라도 한건 아닌지
아니면 이상함을 눈치채고 뒷통수를 맞는 것 아닐지 일말의 의심이 있었다.
하경은 민증을 돌려받으니 그에게 악의적인 감정이 없다는걸 확신하게 됬다.
“아녜요. 해랑씨 지금은 내가 솔직하게 말해줄 순 없지만 언젠간 때가되면
말해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 서로 이정도로만 알고 지내요“
“기다릴게요 우리사이에 숨기는게 없어질때까지”
해랑은 강아지같이 순한 눈으로 반달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얀 윗니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는 모습을 보자
하경은 주책맞은 심장이 또 혼자 쇼를 할까봐 웃음을 휙 피했다.
“사실 어제 우울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하경씨 보러
부산까지 내려온거였어요”
“아.. 아니 그럼 연락하고 내려오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둘이 더 편하게 만났을텐데 라고 하려다 윤도하가 생각나서 말꼬리를 흐렸다.
“불청객이 하나 끼어서 안좋긴 했지만 오늘같은 날에 하경씨랑 이런곳에 있게된걸로
만족하려구요. 그리고 조금은 하경씨에 대해 알게된 것 같기도 하구요”
둘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참 묘한 인연에 하경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고
운명적인 인연에 해랑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웃다가 하경은 문득 위기를 느꼈다.
“아 근데 해랑씨, 다른사람들 앞에선 주하경이란 말 입에도 올려선 안되요”
“말 안해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럼 둘이 있을땐 하경씨라 불러도 되는거죠?”
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한적한 노을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냈다.
**
해가 완전히 지고 저녁이 돼서야 해랑은 하경을 J파크까지 데려다 줬다.
괜찮다고 사양해도 굳이 데려다주는 해랑 때문에 하경은 혹시나 도하와 마주칠까
졸리는 가슴을 부여잡기 바빴다.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J파크 정문에 차를 세워놓고 해랑은 운전석에서 내리려고 했다.
하경은 해랑의 팔을 잡고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괜찮아요.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 만으로도 고마워요”
“흠..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데..”
하경은 해랑에게 또 심장이 휘둘릴까 두려워 차 문을 벌컥 열고 도망가듯 나왔다.
“다음에 봐요 오늘 즐거웠어요 나 가볼게요”
짧은 말을 랩하듯 말하곤 후다닥 도하네 집이 있는 아파트 입구쪽으로 뛰어갔다.
해랑은 아쉬운 듯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오늘 함께 있었어도 여진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질 않았다.
진짜 이름은 뭔지, 왜 부산에서 지내게 된건지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하고싶은 것 그녀에 대해 모든게 궁금했다.
많은걸 함께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한지 도망가 버렸다.
아쉬웠지만 이젠 그녀와 다음이란걸 기약할 수 있음에 만족했다.
2년간 어딨는지도 몰랐던 그녀에게서 얻은 기약은 작은 소득이 아니였으니까.
다음에 만났을땐, 순수하고 맑은 그 눈이 나를 갈망하게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해랑은 혼잣말을 던지고 차를 몰았다.
“다음엔 하경씨도 나한테 아쉬울거에요”
**
벌써 저녁 8시다.
부재중통화 8통에 카톡이 10통씩이나 와있었다.
윤도하에게 완벽한 죄인이 된 하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톡을 읽었다.
죽이네 살리네 하는 협박성 멘트였는데 마지막 멘트가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올때까지 기다린다 안오면 각오해]
집착섞인 도하의 카톡에 하경은 도하네 집을 바라봤다.
새까맣게 불이 꺼져있는 집을 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설마..”
세시간동안 거기서 기다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 도하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건
[고객님이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딱딱한 여자기계음이였다.
설마 나를 이시간까지 기다릴리는 없겠지만 부산타워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하경은 큰길가로 뛰어가 택시를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저씨 최대한 빨리 부산타워로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