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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로스
작가 : 아마란스
작품등록일 : 201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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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기사 (2)
작성일 : 17-07-31     조회 : 305     추천 : 0     분량 :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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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프의 마을로 향하면서 파디스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제멋대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나뭇잎 사이로 날아가는 새 따위를 볼 때마다 파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곤 했다. 그것이 추적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꾸짖었지만 다음 순간에는 벌써 뒤를 돌아보곤 하는 것이었다.

 마을이 가까워 졌음에도 파디스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잘 익은 나무열매는 아무도 따지 않아 바닥에 떨어져 썩고 있었고, 주위의 풀들도 누군가에게 밟힌 흔적 하나 없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안 좋은 징조였다.

 ‘설마.. 지도가 잘못된 것인가.’

 지도가 봉인된 상자를 다급히 건네던 드리스덴의 얼굴이 파디스의 눈앞을 스쳤다.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상자를 건네던 그에게 파디스는 같이 성을 빠져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는 강인한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안되오. 왕도가 함락당하는 이 시점에.. 수석참모라는 자가 도망을 쳐서야 그 이름이 어떻게 되겠소.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바르토스의 이름까지도 더럽히는 일이오. 왕도와 함께 이곳에 뼈를 묻으리다. 그러니, 파디스경.. 부디 엘라인 전하를 부탁하오. 그대만 믿겠소!”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파디스는 처음 했던 생각을 애써 물리치고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점차 나무가 뜸해지더니, 그 빈자리를 키 작은 관목과 수풀이 메우기 시작했다. 깊은 숲속에 뜻밖에 평원이 펼쳐지자 파디스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조심스레 살폈다. 지도에 표시된 부분을 틀림없이 평원의 한 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원형의 평원 어디에도 마을 따위는 없었다. 대신, 커다란 돌비석 하나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 일을 뿐이었다.

 “이럴수가..”

 파디스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깊은 숲 속,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추적자들이 쫓아오고 있을 터인데 단하나 믿고 있던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할 말을 잊고 돌비석을 노려보았다. 그러던 그가 이중 장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돌비석의 하부에서 문자로 보이는 검은색 자국들을 발견한 뒤였다.

 “아..!”

 왕가의 혈통을 지키려는 이 작전이 달랑 지도 한 장으로 구성될 리가 없었다. 아마도 돌비석의 하부에는 엘프의 마을로 가기 위한 다음 힌트가 적혀있을 터였다. 왕가의 혈통만이 접근 할 수 있는 어떠한 장치가 돌비석의 근처에 되어있어 일반인의 접근을 막아왔으리라. 새로운 희망의 빛줄기가 돌비석에서 뻗쳐 나오는 것만 같았다. 행여나 빛줄기가 사라질 새라, 파디스는 급히 걸음을 옮겨 돌비석으로 다가갔다.

 돌비석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그 어떠한 장치도 없었다. 누구라도 알아보기 쉬운 간결한 문체로 단 한 문장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바르토스 최후의 왕자 엘라인 드 바르토니안, 이곳에서 숨을 거두다.’

 “이런!”

 파디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평원을 둘러싼 숲으로부터 대량의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하늘을 가득 메우며 돌비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디스는 사방이 탁 트인 평원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함정. 그야말로 지독한 함정이었다.

 “으아아아!!”

 절체절명의 순간, 파디스는 검을 뽑아 있는 힘껏 돌비석을 내려쳤다. 그의 검을 맞은 돌비석이 마치 두부처럼 반으로 쫙 갈라지더니 그중 윗부분이 파디스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파디스는 엘라인은 온몸으로 감싸며 석판의 상부와 하부가 만든 기역자모양의 틈새에 파고들었다. 거의 동시에 화살의 비가 사정없이 파디스를 덮쳤다.

 - 퍼벅!

 비석과 갑옷이 몸을 가려주었지만, 화살이 너무나도 많았다. 갑옷이 가려주지 못하는 부위엔 예외 없이 화살이 파고들었다. 등골을 타고 퍼지는 지독한 고통에 파디스는 이를 꽉 깨물었지만,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왼쪽! ‘

 파디스는 궁수들이 화살을 재장전하는 짧은 틈을 타 비석 틈새를 빠져나와 왼쪽의 숲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가장 적은수의 화살이 날아든 방향이었다. 개중에 장전이 빠른 자가 쏜 화살이 파디스의 얼굴을 스쳤지만, 다음순간 그는 파디스의 검에 머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일단의 궁수들은 일제히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 파디스에게 대항했지만, 갑옷조차 변변치 않은 그들이 파디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궁수들은 전의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파디스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고 더 깊은 숲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 쉬이익!

 다른 방향에 잠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그제야 장전을 마치고 두 번째 화살을 날렸지만 이미 숲속에 들어선 파디스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운 좋게 나무를 헤치고 날아든 화살을 검으로 쳐 떨군 뒤 파디스는 숲의 어둠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한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던 파디스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뒤에야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그는 혹여나 추적자가 있지는 않는지 주의 깊게 뒤쪽을 살폈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상처에서 고통이 몰려왔다. 비석이 미처 가려주지 못했던 팔과 다리에 서너 발씩의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는 화살을 뽑아보려 했지만 이미 피와 살이 단단히 엉긴 뒤라 도저히 뽑아낼 수가 없었다. 화살이 박힌 주변의 근육이 팽팽히 부어올라 화살촉을 꽉 잡고 있어서, 화살을 뽑으려고 힘을 주니 팔의 근육 전체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칼로 째고서 화살촉을 도려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파디스는 화살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검으로 깃대만을 겨우 쳐버렸다. 움직일 때마다 살 속에 박힌 화살촉이 욱신거렸지만 지금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숲 밖으로 나가 상처를 치료하는 수밖에 없나. 물론, 살아서 나갈 수 있을 때 얘기겠지만.'

 파디스를 함정에 빠트렸던 무리들이 그를 그다지 심하게 추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 한가지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했다. 파디스는 검에 묻은 피를 망토에 문질러 닦아내고 싸늘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비록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파디스의 검사로서의 감각이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미 포위망을 형성해 놓았다는 것이겠지. 내가 지칠 때를 기다려 느긋하게 사냥하시겠다, 이건데. 좋아. 어디 누가 사냥 당하게 될지 두고 보자고.'

 피로 얼룩진 은발아래 은빛의 눈동자가 점차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파디스의 전신에서 숨기지 않은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바람도 없이 주위의 나뭇잎이 파르르 떨었다.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문 뒤, 파디스는 숲의 외각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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