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앵
검과 검이 마주치며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싶은 순간, 파디스를 상대하던 적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신이 그 눈에 맺혀 있었다.
“으.. 괴물 놈..”
- 촤아악
말을 미처 맺기도 전, 붉은 핏줄기가 그의 목에서 솟구쳤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적의 시체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파디스는 검을 힘껏 휘둘러 검에 맺혀있던 핏물을 털어냈다. 숲 중앙의 함정을 벗어난 이후 벌써 세 번째 마주친 추격자의 무리였다. 바닥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파디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추격대가 나타나는 간격이 빨라지고 있어. 이대로는.. 숲을 벗어나기 전에 포위되겠군.'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자, 온몸의 상처가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응급처치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싸워온 탓에 화살을 맞은 상처가 벌어져 다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출혈과다로 쓰러질 판이었다. 하지만, 파디스가 조용한 장소를 찾아 상처를 치료하려고 할 때마다 매복해 있던 적이 계속해서 습격을 해 오는 탓에 도저히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마치 파디스가 어디로 향할지 미리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배치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바르토스의 전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배반한 것이 틀림없어. 하지만 대체 누가.. 이 숲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세 사람 뿐인데.. 그중 둘은 이미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국왕폐하께서는 승하하셨고.. 드리스덴 수석참모는 성과 함께 묻혔다.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인데 대체 어찌된 일이지.'
배신자에 대한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파디스는 냉정하게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은 배신자가 누구인가를 가려낼 시간이 아니었다. 그저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해야만 했다.
숲의 지도를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파디스는, 되도록 으슥한 곳만을 골라서 이동하려고 골라놓았던 현재의 루트를 과감히 삭제해 버리고 새로운 루트를 선정해 냈다. 아니, 선정했다고 할 것도 없었다. 숲의 지도에는, 가장 가까운 대로를 향한 직선이 한 개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잉크조차 없어 피로서 그은 한 개의 직선. 말 그대로 피의 길이었다. 파디스는 품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주군을 지긋한 손길로 확인하고, 눈을 돌려 숲의 서쪽을 노려보았다. 저녁 어스름, 붉게 타오르는 노을 아래서 숲은 마치 붙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목숨을 바쳐 지키겠나이다, 나의 어린 주군. 그리고.. 베어버리겠나이다, 당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
- 이히히히이이잉!
요란한 말울음소리가 사리에의 막사를 온통 휘감고 울렸다. 마침 생각에 잠겨있던 사리에는 살짝 아미를 찌푸렸지만 뒤이어 뭔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즉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는 온통 피투성이가 된 병사 하나가 헐떡거리며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 우윽.. 사, 사리에 부장님을.. 어, 어서...”
“여기 있다. 무슨 일인지 말해라, 병사.”
“그, 그놈.. 괴, 괴물... 으윽..”
“그놈? 파디스의 이야기냐?”
“크.. 크헉... 드리스덴이 예측해놓은.. 매복장소로 오지 않고.. 수, 숲의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이, 이동.. 포위부대는.. 전멸.. 했습니...”
병사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피거품을 게워내며 온몸을 뒤틀자, 사리에는 지체 없이 손을 들어 병사의 뺨을 호되게 내려쳤다. 하얗게 풀리던 병사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바르게 돌아왔지만 그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사리에는 병사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임무를 완수해라, 병사! 놈의 상태는? 그리고 마지막 놈의 도주방향은? 어서 말해!”
“괴, 괴물.. 화살을.. 십여 대나 맞춰도 움직... 쿠.. 쿠헉... 마, 말을 빼앗.. 서.. 서..”
-쿨럭
병사는 마지막으로 피석인 기침을 뱉어내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사리에는 얼굴에 온통 범벅이 된 병사의 피를 한손으로 쓱 문질러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얼음처럼 냉정한 음성으로 막사의 호위병을 향해 말했다. 안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잔혹한 장면에 굳어있던 호위병은 그녀의 음성이 마치 악마의 음성이라도 되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잔존 기병대가 얼마나 남았나.”
“배, 백기 정도입니다.”
“지금 곧 기병대 막사로 달려가서 그들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자에게 전해라. 필요최소한의 장비만을 갖춰서 추격대를 편성하도록. 말이 부족하면 수송부대의 말을 모두 끌어다 써도 상관없다. 편성이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하도록 전해라. 목표는.. 숲의 서쪽에서 가장 가까운 마르딘. 놈은 무리하게 포위를 돌파하느라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 틀림없이 치료를 하려 할 것이다.”
“옛!”
병사는 경례를 올리고는 황급히 기병막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남은 한명의 호위병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병사의 시체로 다가가 눈을 감겨주는 것을 지켜보다가 사리에는 호위병에게 말했다.
“거기, 너!”
“예, 옛!”
“그 병사의 소속과 이름을 조사해서 내게 보고해라.”
“옛!”
사리에는 호위병이 시체의 몸을 뒤져 참고가 될 만한 물건을 찾는 모습을 뒤로 하고 다시 막사 안으로 향했다. 씁쓸한 탄식이 그녀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칫.. 썩어도 준치라더니.”
“흠.. 이거 이거, 예상외로군요.”
“누구냐!”
사리에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집에 손을 옮겼다. 하지만 검이 뽑히려던 찰나, 강한 힘이 사리에의 손을 억눌러 검이 뽑히는 것을 막았다. 그제야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사리에는 아미를 찌푸리며 소리쳤다.
“드리스덴!! 네놈, 언제부터!”
“언제부터.. 라고 해 봐야, 까마귀로 변신해서 날아든 것뿐이니.. 아까 향료를 전해 드릴 때부터 주욱 함께 있었다고나 할까요, 하핫.”
“이 자식..!”
“뭐, 그리 흥분만 할 일은 아닙니다. 저도 혹시 이런 사태가 일어날까봐 남아있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나저나.. 애써 그가 향할 만한 방향을 짚어줬는데도 실패하시다니, 이건 좀 실망이군요. 아니, 뭐.. 파디스경이 좀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요.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후후..”
“흥.. 네놈이 말해줬던 매복 포인트는 주효하지 않았어! 놈은 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갔단 말이다. 아까 네놈이 말했듯.. 예상외로 말이지.”
사리에의 목소리에는 바늘이 돋쳐 있었다. 드리스덴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잡고 있던 사리에의 손을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아니, 그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일국의 최강의 검사의 칭호는 단지 검술실력이 뛰어난 것만으로 주어지지는 않지요. 검술실력에 합당한 지혜가 있어야만 비로소 일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후후.. 아마 두세 번 정도 매복을 당하고 나서 배반을 당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최단 경로로 숲을 벗어난 거겠죠. 애당초 매복부대는 그의 체력을 저하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제가 실망한 것은 하이드리아의 정규군이 그렇게 체력이 저하된 파디스경과 조우하고도 그를 죽이지 못한 부분입니다.”
“도구라고? 네놈, 사람의 목숨을 뭐라고 생각..”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드리스덴은 당호하게 사리에의 말을 끊었다.
“도구, 그렇습니다. 바로 도구입니다. 전장에서 병사의 목숨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죠? 상대를 향해 검을 든 순간, 상대의 검을 받을 각오 역시 해야 마땅합니다. 하물며 전쟁이란 대립되는 사상을 가진 두 무력집단의 충돌! 그 목적은 사상의 관철! 지휘관이 신경써야할 최우선 과제는 전쟁의 승리지, 병사의 목숨이 아닙니다. 사리에, 방금 전 소식을 전한 병사가 말을 미처 못 맺고 죽으려 할 때, 당신이 취한 행동은 훌륭했습니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정한 처치.. 그리고 탈출한 파디스경에 대한 대책까지. 그런데 그 뒤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최악이지요!”
“최악이라고?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병사에게 포상을 내리기 위해 이름을 조사하라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거냐? 목숨까지 내걸어 책임을 다한 병사야!”
“잘못이지요. 훌륭한 일을 하고 죽었으니까 죽은 뒤에 그 명예를 높인다? 웃기지도 않는 소립니다. 제국의 황제라 해도 죽은 뒤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아요. 만일 그 병사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면, 그가 죽기 전에 해줬어야 했던 겁니다. 즉시 의무병을 부르고 상처를 치료해서 살려내지 못한 바에는.. 더구나 숨을 거두려는 사람을 때려 정보를 얻어낸 바에는, 감히 죽은 뒤에 보상을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세상에서 그런 것을 뭐라 하는지 아나요? 바로 위선이라고 부르지요.”
“이, 이 자식!!”
“오오.. 흥분하지 마시지요. 아직 더 있으니까요. 뭐, 좋습니다. 이름을 조사한 것은 군율에 따른 포상을 내리기 위한 조치라고 칠 수도 있으니 이정도로 넘어가지요. 하지만, 아까 막사로 들어오실 때, 눈물이 맺혀 있더군요. 그것은 대체 뭐로 설명하실 거죠? 후후후.. 핏방울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나기라도 한 겁니까? 분명히 말하지요. 당신은.. 위선자입니다.”
“시끄러워! 네놈.. 우리는 병사이기 이전에 인간이야.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게 뭐가 나빠?”
사리에는 발악하듯 커다랗게 소리쳤다. 드리스덴은 그 호통소리에 되레 차분함을 되찾은 듯 했다.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대꾸했다.
“병사는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장교가 되기 위한 수업 중에도 이미 배우셨을 텐데요. 그리고, 설혹 인간이라 주장하고 싶으셨다면 병사가 죽었을 때 바로 눈물을 흘리셨어야지요. 뭐, 어찌됐든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병사가 인간인지, 도구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더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아까 제가 예상외라고 했던 것은 .. 맨 처음 당신을 봤을 때 저와 비슷한 유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되레 정 반대였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네놈 따위와 동류가 아니라서 말이야. 자,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내 막사에서 슬슬 꺼져 주실까, 모범적인 지휘관 나리?”
“후후후.. 비꼬는 실력만은 아주 일류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드리스덴은 입 끝자락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올리고는 이내 막사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막 막사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정말 그냥 갈 셈인가?”
사리에의 나직한 한마디가 드리스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드리스덴은 씨익, 특유의 왼쪽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는 웃음을 얼굴에 띠며 돌아섰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아있으신지요?”
“후우.. 정말 못 당하겠군. 이 마당에 내 지휘방법을 지도하려고 날 찾은 건 아닐 텐데? 갈 때 가더라도 정보는 뱉어놓고 가라.”
“이야, 이거.. 꼴보기 싫은 상대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용한 다라. 하물며 자신을 욕한 상대인데도 말이죠. 제가 바로 당신의 이런 점이 맘에 드는 겁니다. 후후후..”
“후.. 말해두는데, 난 내가 잘못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아니,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믿어. 그러니까 네 말에 모욕 따윈 느끼지 않는다.”
“흐흐.. 뭐, 좋습니다. 길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 결론만 말하지요. 파디스경은 마르딘으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자의 검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병사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까 그 병사는, 파디스경이 일부러 보내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저, 잘못된 정보를 흘리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려고 말이지요.”
드리스덴은 일부러 도구라는 말에 악센트를 줘서 사리에를 도발했지만, 사리에는 담담했다. 그녀는 되레 착 가라앉은 소리로 반문했다.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서쪽으로 일직선.. 이라는 것은 제 예상치를 벗어난 행동인데다, 설마 정말로 포위를 벗어나는 것 또한 제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라서 말이지요. 허나, 그자를 곁에서 지켜봐온 경험에 의하면 도망치는 병사를 놓칠 만큼 만만한 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또 하나,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매복부대는 검과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용합니다. 파디스경은 왕성을 떠나기 직전 최고신관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독에 대한 저항성이 올라간 상태입니다만.. 뭐, 축복의 효과는 금세 떨어지니까요.”
“전혀 결론만 말하는 게 아니잖아.”
“남쪽의 사요르. 그곳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예부터 에스텔라의 신전이 있던 곳입니다. 독을 해독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지요.”
“치료의 여신의 신전.. 인가.”
“뭐,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사리에는 드리스덴의 예의 그 비웃는 듯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휘저었다.
“이봐, 너. 난.. 네놈이 정말 싫다.”
“후후.. 뭐 괜찮습니다. 증오도, 관심의 일종이니까요. 사실 증오니 사랑이니 하는 인간의 감정들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 일뿐. 관심이냐, 무관심이냐..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논할 자격은 있는 건가?”
“그거.. 무슨 의미로 하는 말씀이시죠?”
“네놈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거야, 난.”
서로를 탐색하는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절묘하게 얽혔다. 하지만, 사리에는 이번에도 드리스덴의 마음을 전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하하, 재미있는 소릴 하시는 군요. 그럼 제가 무슨 악마라도 된다는 건가요? 후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엘프가 실존하는 마당에 악마가 있다고 해서 뭐가 이상해.”
“후후후.. 뭐, 그렇다면 악마의 도움을 받은 걸로 치시지요. 단, 악마는 공짜로 도움을 주지 않는 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대가는 비싸게 받아갈 겁니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