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에의 병사들이 출발한 직후, 마을 입구에 모여 웅성대던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 중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신전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맨 처음 파디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노인이었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신전 안쪽의 제단으로 향하더니, 한가운데 있는 여신상의 머리장식 부분을 어루만졌다.
- 드드드드
그러자 돌이 갈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제단이 옆으로 이동하더니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그들이 떠났습니다, 기사님.”
“고맙소, 노인. 신세를 졌군.”
지하실 안쪽의 어둠속에서, 파디스는 뽑았던 검을 다시 거두며 노인의 앞으로 나섰다. 갑옷도 없이 온몸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였다. 사리에가 기절해 있던 이틀사이, 파디스 역시 제단 지하에 숨어 화살을 뽑아내는 수술을 마친 것이었다. 지하실 바닥에는 뽑아낸 화살촉과, 검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혹시나 수술도중 적군이 들이닥칠 까봐 마취조차 하지 않고 화살촉을 제거한 탓에 고통이 심했지만, 대신 회복속도 역시 빨랐다. 사제의 치료마법과 적절한 약초 덕택에 이미 화살을 맞은 상처는 대부분 아물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향했소?”
“동북방향으로.. 아마도 마르딘을 향해 간 듯 합니다. 아마 엘레나님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엘레나님과 이 마을에.. 말로는 다 못할 폐를 끼치고 말았군. 변명할 낯짝조차 없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기사님. 국왕폐하께서는 항상 사요르에 관대하셨습니다. 신을 모시는 마을이라고 세금조차도 감면해 주셨었지요.. 이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엘레나님을 큰 위험에 몰아넣고 말았소. 그저 하이드리아 놈들이 신을 모시는 사제님께 검을 들이대지는 않기를 기원할 뿐이라니..”
“허허허.. 엘레나 사제님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분은 슬기로운 분. 또한 에스텔라의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어지간한 위험은 그분께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그보다, 이제부터 기사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생각만 있으시면 앞으로도 계속 숨어 계신다 해도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파디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비록 사리에가 마을을 떠났다고는 하나 얼마 안가 속은 것을 깨달을 것이었다. 도리어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벗어나는 것이 안전했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소. 더구나 혹여 그들이 이 마을로 돌아와 내가 있던 흔적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큰일이 벌어질 것이오. 난.. 이곳을 떠나 숲으로 되돌아가겠소.”
“숲으로 말입니까..”
파디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노인이 준비해온 옷들을 몸에 걸쳤다. 검은색 일색의 상하의 한 벌과 두건이 그것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장비 중에는 검 하나만을 골라 허리에 찼을 뿐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갑주들은 5년여간의 왕실수호기사로서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파디스는 애수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갑옷들을 쳐다보았다. 수년간 같이해왔던, 수족과도 같은 갑주들. 어디에 몇 개의 상처가 있는지, 그 상처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도 파디스는 다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 갑옷들을..
"마 다스커드, 태초부터의 어둠의 힘이여, 지금 마족의 피와 계약을 맺은 자가 원하노니.."
노래 같기도 한 음율. 파디스는 한 개의 주문을 천천히 노래하듯 읊었다. 주문이 이어짐에 따라 파디스의 손에는 검은 구체가 형성되어 가기 시작했다.
-파직.
더 이상 검어질 수 없으리만큼.. 한밤의 어둠보다도 더욱 검은 칠흑의 구체. 완성되어진 그것을 파디스는 주저 없이 갑주들을 향해 뻗었다. 스윽. 마치 검은 물감이 다른 색깔을 지우듯, 갑옷이 있던 공간이 검은 구체에 빨려 들어갔다. 파디스가 손을 거두었을 때, 움푹 패여진 구덩이 한 개만이 그 자리에 뭔가가 존재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이, 이것은..”
노인은 뜻밖의 광경에 경악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파디스는 그런 노인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별거 아닌 암흑마법이오. 바르토스의 기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망국의 기사의 흔적은 그 자체로 해를 끼치게 되오. 차라리 깨끗이 사라지는 편이 모두에게 이득이지.”
파디스는 지하실의 구석에서 잠자고 있는 엘라인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엘라인은 깊이 잠이 들어있지는 않았는지 곧 잠이 깼다. 요 며칠 새 벌써 낯이 익은 탓일까. 엘라인은 파디스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지었다.
“바아~! 바!!”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