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스보다 출발이 이틀이나 뒤쳐졌다고는 하나, 사리에에게는 지도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숲은, 바르토스의 수도였던 사크리드의 열배가 넘는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수해. 더구나 파디스에게는 엘라인 왕자라는 무거운 짐까지 딸려있었다. 사리에가 파디스보다 먼저 엘프의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위치까지 도달했을 때, 사리에를 반긴 것은 엘프의 마을이 아니라 단지 작은 고대의 유적에 불과했다. 여섯 개의 돌기둥이 육망성의 모양을 이루며 반구형의 구조물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그라시아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고대의 하이엘프의 신전을 작게 옮겨 놓은 듯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리에는 대번에 그 유적에서 뻗쳐 나오는 서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유적 주변엔 마치 아지랑이 같은 빛무리가 간간히 피어오르곤 했는데, 이는 강력한 마나가 한 장소에 과도하게 집중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만한 장소가 어떻게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행동을 멈춘 것도 잠시. 사리에는 이내 품속에서 작은 녹색의 통을 꺼내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 하이드리아의 정찰병이 위치를 표시할 때 쓰는 연막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한줄기 연기가 곧장 하늘로 치솟았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막 연막탄이 땅에 닿기 직전, 연막탄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지더니 한순간에 연막탄을 삼켜버린 것이었다. 사리에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품속에 손을 넣어 연막탄을 꺼냈다. 이번엔 한 개가 아니라 다섯 개였다.
“이거, 감정적인 사람은 아닐 거라 예상했는데 제가 틀렸었군요.”
드리스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치 누군가 닦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리에 뒤쪽의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그곳에서 드리스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사리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있으면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파디스가 이 연막탄을 보고 쫓아오면 피차 곤란해질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심지를 빼 놓은 거라서 터지지도 않아.”
“하아? 후후후.. 이거, 오랜만이군요.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흥.”
“후후.. 그래서..”
드리스덴의 얼굴에 예의 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엔 웃음과는 정 반대로 칼날처럼 시린 날이 서 있었다.
“빛의 나라의 기사께서 어둠의 마법사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글쎄요.. 남을 속이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속내를 짐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리에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지만 드리스덴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드리스덴을 노려보던 사리에는 결국 한숨을 터트렸다.
“후..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바르토스의 기사는 흑마법에 능통하다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일시적으로 신체능력을 증강시키는 마법에.”
“사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파디스경은 특출나지요. 후후.. 뭐, 거의 오우거에 필적하는 힘을 낼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분의 검을 10여합이나 받아넘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요.”
“...그 마법, 나에게 걸어줄 수 있나.”
드리스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탐색하는 눈초리로 사리에를 살피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가 흑마법을 익히면 어찌 되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당연하다.”
“아니, 전혀 모르시는 것 같군요. 우선 교단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흑마법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는 교단은 없으니까요.”
“알고 있다고 했잖아.”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단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되면 신성기사의 작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같은 말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냥, 걸어줄 건지 안 걸어줄 건지만 대답하면 된다.”
사리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드리스덴은 그녀의 표정은 못 본척하고 자신의 질문을 이어갔다.
“파디스경에게 패해서 실추된 명예를 다시 세우려는 것 아닙니까?”
“반쯤은 맞았다고 해두지. 난.. 그에게 2번이나 패하고 말았어. 반드시.. 설욕해야만 해.”
“후후..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성기사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신성기사의 작위를 포기하다니. 주객이 전도된 꼴입니다.”
“신성기사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했어. 그런 실속도 없는 명예 따윈 개나 줘 버리라지. 내가 되찾아야 할 것은 자신과... 긍지다.”
“자신과.. 긍지.. 라고 하셨나요? 후, 후후후후.. 후하하하!!”
사리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리스덴은 배를 움켜쥐고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마치, 온 숲이 흔들릴 것만 같은 광소였다. 사리에는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드리스덴을 쳐다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녀의 눈에 독기가 맺혀갔다.
“뭐가 우습지!”
“우습고말고요. 자신과 긍지를 찾겠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을 빌리겠다니, 이런 촌극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힘으로 이루지 못한 일에는 자신도, 긍지도 없습니다. 흑마법의 힘을 빌어서 파디스경을 이긴다 해도, 그 뒤에 남는 것은 떳떳치 못한 승리감뿐.. 도리어 자신과 긍지는 더 잃게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분노가 당신의 냉정함만을 앗아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이성까지도 빼앗아 버린 모양이군요. 후후.. 후하하하하!!!”
“이.. 이게!!”
검을 뽑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드리스덴의 몸을 베고 있었다. 검을 뽑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엄청난 속도의 발검에 드리스덴의 이마에서 가슴까지 순식간에 핏빛의 금이 생겨났다.
곧 뿜어져 나올 피보라를 생각하고 사리에는 한걸음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갔다. 상반신이 반으로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드리스덴의 몸에서는 단 한 방울의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양 옆으로 갈라져 드러난 절단면은 살코기를 벤 듯 붉게 반들거렸지만 뼈도, 내장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드리스덴 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벤 듯 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섬뜩함을 느끼고 뭔가를 해보려 했지만 이번엔 드리스덴이 빨랐다. 섬뜩한 감각 때문에 행동이 굳은 얼마간의 시간동안, 드리스덴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닿은 것이었다. 미처 실드를 펼치기도 전, 싸늘한 감각이 가슴에서 척추를 통해 그녀의 온몸을 관통했다. 마치 얼음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도는 것만 같은 감각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악!!”
“참으십시오. 당신의 신성력이 너무나 순수한 것이라 이런 식으로 주의를 흩트리지 않으면 흑마법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으..!”
“본래의 신성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발 또한 강한 법. 아마 당신에게 마법을 걸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고통 또한 심하겠지요. 허나 모쪼록 정신을 놓지 않으시기를.. 만일 도중에 정신을 잃거나 해버리면 신성력도, 흑마법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제 마법이 당신의 운동신경을 향상시키고, 또 근력을 증가시키는 동안 이야기를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신성력과 흑마법은 애초에 상극의 힘. 제가 마법을 검으로서, 당신은 하나의 몸에 두 가지 힘이 모두 깃들게 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균형을 잃게 되어 두 가지 힘이 섞여버리게 되면.. 두 힘이 서로 부딪혀 소멸하거나, 아니면 대 폭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한쪽의 힘이 월등하게 강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신성력이 강한 만큼이나 제 흑마법 또한 강력하니까요. 소멸하든, 폭발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몸이 이 세상에 남느냐, 아니면 남지 않느냐의 차이가 생길 뿐이죠.
이것이, 신성력을 가진 이가 흑마법을 익히지 못하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몸에.. 폭탄을 이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마법이 성공한 다음부터 당신은 잠을 잘 때조차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이후, 완벽한 안식이란 당신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드리스덴의 말소리가 하나씩 흘러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두 힘이 몸속에서 반발을 일으키며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사리에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수습하며 띄엄띄엄 말했다.
“이.. 나쁜 자식. 그런 건 마법을 걸기 전에.. 말했어야지..”
“미리 말해버리면 대비하게 되어 버리니까요. 그렇게 되면 흑마법을 걸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후후후.. 뭐, 그리고 이렇게 돼야 다짐을 받을 수가 있거든요.”
“뭐..라고?”
“다짐 말입니다. 후후.. 설마 제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흑마법을 걸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겠지요?”
온몸을 바늘로 쑤시는 듯 한 격통 속에서도 사리에는 드리스덴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실은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을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에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녀는 이를 부득소리가 날 정도로 악물었다.
“이.. 악마..!”
“최고의 찬사로군요. 후후..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대답여하에 따라 저는 마법을 중지하고 제 마력을 그냥 당신의 신성력에 섞어 버릴 테니까요. 자,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뭐 저도 사람이 워낙 좋아놔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람이.. 좋다고?”
“좋고 말구요! 만일 제가 나쁜 인간이었다면, 이런 경고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마법을 걸어주고 이용해 먹는 걸로 끝냈겠지요. 하지만 전 사람이 워낙에 좋아서!! 이렇게 친절하게 경고도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후후후후..”
서서히 고통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계에 이른 신경이 스스로를 닫아 정신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분에 사리에의 호흡에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한결 정돈된 목소리로 말했다.
“잡소린 집어 치우고.. 그 요구라는 걸 읊어봐.”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살아가십시오.”
“..뭐?”
사리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살아가라니. 드리스덴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생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사리에가 뻥진 표정으로 드리스덴을 쳐다보자, 드리스덴은 천천히 이야기를 덧붙였다.
“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흑마법까지 익히는 것은 애초에 금지되어 있는 일입니다. 교단이 금지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신이 금지해 놓은 일이지요. 아니, 자연이 금지했다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겠군요. 애초에 어떤 사물이든 두 가지 이상의 힘을 한꺼번에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기껏 여러 가지 힘을 소유해 봤자 스스로 붕괴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사리에 당신은.. 말하자면 스스로의 의지로 자연의 금기를 깨버린 격이지요. 당연히 응분의 역반응이 당신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당신에게 나타날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신체에 변형이 일어난다거나.. 정신의 일부가 붕괴된다거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요. 심할 경우엔 리치나 좀비가 될 수도 있고.. 약하게 나타난 다해도 무언가 한 가지는 반드시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힘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요.“
“뭐..?”
“뭐.. 그렇게 때문에 다짐을 받아 두겠다는 겁니다. 앞으로 그 어떤 변화가 당신에게 일어나든지, 당신은 살아가십시오.
겉모습이 흉악한 괴물처럼 변한다 해도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당신을 찾아낸다 해도 그들의 목을 베어가며 살아가십시오. 혹여 그 사이에 아는 얼굴이 있다 해도.. 그자를 베어 영혼에 죄를 더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두 힘 사이에서 겁에 질려 떨면서도 끝까지 목숨을 이어 가십시오. 그 어떤 고통이 닥친다 해도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소멸에의 공포에 정신이 이상해 진다해도 끝까지 살아가십시오.
앞으로 당신은 하이드리아의 군대와 바르토스의 저항군 양쪽 모두에게 쫓기게 될 것입니다. 암수로 왕을 잃은 바르토스의 복수와 배신자를 척살하려는 하이드리아의 추적자들에게 위협을 받으면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십시오. 그로인해 당신이 가는 길에 늘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해도 끝까지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까지 해서 손에 넣은 힘이지만 그것마저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굴하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아니면 땅바닥에 엎드려 빌어서라도 살아남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당신의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마법을 걸어주는 조건입니다.“
드리스덴의 표정은 진지했다. 늘 달고 다니던 비웃음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진지한 시선 속에 사리에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갔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잔인해.”
“정말로 잔인한 사람은 이런 경고조차 해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혼이 업에 휘말려 지옥에 떨어지든 말든 그냥 수수방관할 뿐이지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대가라는 게 존재합니다. 만일 그 대가를 치르지 못하고 육신이 죽어버리면 남은 대가는 영혼에 넘겨집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무거운 영혼은.. 높이 올라갈 수 없지요. 후후후..”
“마치, 지옥에 갔다 와본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자,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제 요구를 들어주실 겁니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끝내버리시겠습니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