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의 여파는 엄청났다. 사리에를 중심으로 반경 50보 정도의 공간에 큰 구덩이가 생겼고, 범위 밖의 나무들도 하나같이 뿌리가 뽑히거나 부러져 바깥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그런 나무들 사이에서, 숯검댕이 된 파디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사리에와 드리스덴, 그리고 파디스가 일직선으로 서있었기에 파디스는 드리스덴이 폭발을 직격으로 맞는 틈을 타 숲까지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무 뒤로 숨기 직전, 파디스는 드리스덴이 전 마나를 끌어모아 폭발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이 없어 채 실드도 만들지 못하고 마나만으로 폭발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역시나 폭발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드리스덴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뒤로하며 파디스는 힘껏 숲을 향해 몸을 날렸고..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폭심에는 폭발을 유도했던 장본인인 사리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디스는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약하게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선 이미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육체와 균형을 이루고 있던 마력이 단시간에 사라지게 되면 균형이 무너져 육체적으로 심한 무리가 가며, 사라진 마력의 양에 따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리에의 경우는 모든 신성력을 한꺼번에 해방했기 때문에 이미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두 가지 행운이 겹쳐 아직까지 숨을 유지할 수가 있는 상태였다. 첫째는 조금 전 드리스덴의 마법 때문에 신성력이 절반정도까지 서서히 감소되어 육체가 마력감소에 순응할 시간을 얻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드리스덴이 파디스에 대항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을 때 암속성의 마나를 많이 흡수해서 폭발의 위력이 약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은 사리에의 육체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녀의 오른팔 팔꿈치 위쪽부터 그 아랫부분이, 뭔가로 도려낸 듯 깨끗이 소멸된 것이었다. 절단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곧 죽음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파디스는 즉시 행동을 취했다. 먼저 사리에의 부츠에서 가죽끈을 분리해서 팔의 상처를 지혈하고, 사리에의 명치 부근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마력을 주입해서 육체와 마력의 균형을 맞추었다. 파디스의 마력은 흑마법을 익히기 위해 수련한 것이라 사리에의 몸과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지만.. 현재 사리에의 내부엔 신성력은 아예 존재 하지 않는 상태였기에 마력주입이 가능했다. 만일 사리에가 회생해서 신성력이 회복되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할 것이었지만 현재로선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리에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파디스는 그제야 마력주입을 멈추고 사리에 에게서 떨어져 그녀의 상태를 관찰했다. 평소 검술로 몸을 갈고 닦았기 때문일까.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아마도 회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말이지.”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린다 해도, 이제 어디서 적절한 치료를 받는단 말인가. 그녀의 군대는 이미 회군을 했고, 전신의 근육과 신경에 심각한 상처를 입어 혼자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 더구나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 적진의 한가운데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목숨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쫓기는 몸. 더구나 사리에 경은.. 나와는 적대관계. 도저히 이 이상 도울 수는 없다.”
파디스의 머리는 그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그의 가슴이 그것을 막았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결국 사리에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탓에 온몸이 축 늘어져 더 무겁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무게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그런 가녀린 몸으로 어떻게 자신에게 대항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
- 타닥.
모닥불의 기운이 사리에의 몸을 따스하게 녹여 주었다. 마치 꿈속 인 듯 아물거리던 사물이 점차 확실하게 모습을 갖춰갔다. 사리에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온몸을 목 아래를 뒤덮은 모포가 가장 먼저 눈에 띠었고.. 불을 헤집고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저 남자가 날 살렸구나.’
흐릿하게 흔들리는 남자의 뒷모습에 얼마 전의 기억이 살며시 겹쳐 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 거렸다.
“라이오넬..”
“정신이 들었소?”
남자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을 때, 사리에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으려 했다. 그 서슬에 모포가 뒤집어지며 그녀의 팔이 불빛아래 드러났다.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그나마도 상완근 아랫부분은 아예 없는 그녀의 팔이. 더구나 팔을 동여맨 하얀 천은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었다.
‘설마..’
팔을 잃은 충격보다도 그 천의 출처에 더욱 신경이 쓰인 것은, 그녀가 장군이기 이전에 여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천천히 얼굴을 내려 가슴 부위를 살피자, 젖가리개 없이 모닥불 아래 선명히 드러난 그녀의 아담한 가슴이 보였다. 파디스가, 어색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상처를 쌀 깨끗한 천이 필요했소.”
“...봤지?”
“젖가리개를 뺄 때는 고개를 돌리고 했소. 하지만, 지금은 보이오만.”
"아..!"
사리에는 빠른 속도로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통증이 밀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그녀의 전신에서 밀어 닥쳤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으..”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드리스덴공의.. 마법실패로 인한 반작용 때문에 아마도 전신의 신경이 망가졌을 터. 억지로 몸을 움직이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오.”
“왜지..?”
“왜라니..?”
모포속에서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왔을 때, 파디스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왜.. 나를 살렸지? 동정인가?”
“그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오.”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전에는 가차 없이 베어버렸으면서.”
“그때는 기사와 기사로서 마주했었기 때문에 벨 수 밖에 없었소.”
“...그럼, 지금의 난 기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소.”
파디스가 너무도 단호하게 대답했기에, 사리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싸울 수 있지만 몸을 다친 기사는 ‘상처입은 기사’지만.. 싸울 수 없는 자는 기사가 아니라 왕이라도 그냥 ‘환자’요.”
“난 지금도 싸울 수 있어.”
“무리요.”
“당신을 상대론 무리지. 하지만 한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어떨까.”
“한 살짜리가 아니라 갓 태어난 아이가 상대라도 지금의 당신으로선 무리요.”
사리에는 그 말을 듣자 모포를 차올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팔로 근처에 있던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파디스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나직이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후.. 사리에 브랑쥬드경. 그만 검을 내려놓으시오. 내 말을 수정하리다. 당신은 지금도 당당한 기사요.”
“정말 무르군. 상처가 회복되면.. 난 또다시 너와 왕자를 노릴 거야.”
“상처가 회복되면 난 당신을 버리고 떠날 거요.”
사리에는 검을 거두었다. 사실 그녀는 현재 일어서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녀는 작게 투덜거렸다.
“모닥불 따위는 필요 없었는데.”
“딱히 당신을 위해 핀 것은 아니오. 나의 주군께서 추위를 타실까봐 피웠을 뿐.”
“...그렇다고 해 두죠. 그리고.. 일단, 감사드려요. 적인 나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보통 일단.. 이란 말은 빼고 말하곤 하오만.”
“배배 꼬인 성격이라 미안하군요.”
사리에는 모포를 둘둘 감고는 팩 돌아누웠다. 파디스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피식 웃음 짓고는 다시 모닥불을 헤짚기 시작했다.
“그 정도까지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다행이오. 내일부터는 또 강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강행군..? 드리스덴이 죽었는데 뭣하러..? 수도를 포위하던 하이드리아군도 이미 후퇴했고.. 당신을 위협하는 세력은 이제 없다고 생각해도 될 텐데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당연하죠. ‘희생’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어요.”
“있소. 바로 당신 앞에 있지 않소.”
“그건.. 드리스덴 덕에 직격을 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세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소. 첫째, 그때 폭발에 말려든 것은 드리스덴의 마법으로 나타난 환영이었다는 것. 둘째, 직격을 맞고도 드리스덴이 어떻게든 회피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세 번째, 드리스덴 외에 이번 일의 배후가 더 있을 가능성.”
“의심이 많은 성격이군요.”
“...실제로 아직까지도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움직임이 있소. 더구나 아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오.”
사리에는 파디스의 말을 듣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정적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거짓말. 반경 70보 이내에서 그 어떤 움직임도 없어요.”
“굉장한 탐지범위요. 나보다도 넓게 탐지할 수 있다니.. 하지만 분명히 있소. 마치 입안에 숨긴 어금니처럼 갈무리된 살기가 온 숲에 진동하고 있소. 아마도 암살자.. 아니면 레인저일 것이오.”
“만일 그렇다면, 불을 끄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파디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리에는 그의 무응답이 그녀를 위한 배려라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상처를 입어 쇠약해진 그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피운 것이리라. 다만, 그녀의 자존심이 상할 걸 우려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일 터였다.
사리에는 발간 모닥불빛 덕에 자신의 얼굴빛이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에 감사했다.
“좋아요.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쳐요. 그럼, 어디로 향할 셈이죠?”
“유적이 있던 곳으로.”
“...이유는?”
“만일 엘프의 마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제 당신의 ‘희생’에 의해 소멸된 유적의 이변을 분명히 눈치 챌 것이오. 그리되면 분명 뭔가 행동을 취하겠지. 가장 먼저 취할 거라 예상되는 행동은 유적 주위를 조사하는 것이오.”
“...드리스덴이 살아있다면 같은 생각을 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야만 하오. 그가 뭔가 다른 행동을 하기 전에 엘프와 접촉해야만 하니까. 자, 피곤할 테니 그만 자 두시오. 상처가 더 악화되면 내가 곤란하오.”
사리에는 못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반바퀴 몸을 굴려 파디스를 관찰했다. 모닥불 곁에서 검에 기댄 채 바위처럼 앉아있는 남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바늘 하나가 들어갈 틈마저 없이 완벽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 저 경계의 대상 속엔 나도 포함되어 있겠지.’
파디스의 곁에는 강보에 싸인 아이 한명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사리에는 그 아이가 엘라인 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자면서도 웃고 있는 그 얼굴은 한없이 천진스럽기만 했다. 사자왕이라 불리던 선대 바르토스왕의 패기에 가득 찬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으리만큼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할 경계 속에서 포근히 잠든 엘라인 왕자를 사리에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아주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