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상처의 아픔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사리에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파디스는 주변 정찰을 하러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엘라인 왕자만이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햇빛아래 보이는 모습은 모닥불빛 아래서 보는 모습과는 또 달랐다. 자세히 보니 과연 눈매나 코의 생김새 같은 것에서는 선대 바르토스왕의 강인한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하이드리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바르토스의 왕자.
사리에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곁에 놓여있는 검을 응시했다.
“검은 집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는 토끼를, 다른 한손에는 과일더미를 안고 있는 파디스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한 왕국의 수호기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평범한 사냥꾼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리에는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렇게 살기를 내뿜지 않아도 되요. 저 또한 은혜와 수치를 아는 하이드리아의 기사. 적어도 당신과 다시 적으로 마주치는 그 순간 까지 엘라인 왕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 할 수 있어요. 그보다.. 완전 사냥꾼이 다 되었군요.”
“...그리 보이오? 다행이로군. 적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파디스는 과일더미를 사리에의 곁에 내려놓더니 구석진 곳으로 가 토끼를 다듬기 시작했다. 단검으로 토끼의 배를 그어 내장을 긁어내면서, 파디스는 지나가듯 사리에 에게 말했다.
“고기를 다듬는 동안 과일이라도 들고 있으시오.”
“친절하군요.”
“..그리고 그대에게 해둘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
“...알고 있어요. 마력에 관한 거겠죠.”
잠시 동안, 고기를 다듬던 파디스의 손이 멎었다. 그리고 괴로운 듯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급해 어쩔 수 없이 내 마력을 주입했소만.. 아마 상처가 회복되어감과 동시에 그대의 신성력 또한 점차로 회복될 것이오. 다행인 것은, 드리스덴공의 경우와는 달리 그대의 신성력이 아주 미미해서 큰 반발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나.. 내가 주입했던 마력이 신성력에 의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대는 신성력도, 마력도 사용할 수가 없소. 또, 신성력이 회복된다고 해도 이전의 절반조차 회복되지 않을 것이오.”
“그 일로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희생’을 쓰고도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건 당신이 마력을 주입해준 덕분이니까. 더구나, 절반이라고는 해도 신성력 또한 회복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충분하다고..?”
“물론, 충분하죠. 상처만 다 나으면 당신을 쓰러트리는 데는 절반정도의 신성력이면 충분하고도 남아요.”
파디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리에를 바라보았다. 사리에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렇듯 적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사람인줄 알았다면 훨씬 전에 제가 승리했을 거예요.”
“후후후..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그런데 몸은 어떻소? 입담의 반만큼이라도 회복되었다면 좋겠소만.”
“아쉽게도 난 평범한 인간이라 트롤처럼 하루 만에 상처가 재생되지는 않네요. 하지만 걸어 다니는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럼 아침을 먹은 뒤에 바로 움직이도록 합시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보다 그녀의 육체가 입은 상처는 심각했다. 아침을 먹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 걸음을 옮기려던 사리에는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꼼짝없이 바닥에 부딪치겠다, 하고 생각했을 때 든든한 팔 하나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사리에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아니.. 도리어 내가 미안하오.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는데……. 마음이 조급해 그만 무리를 하게 만들었소.”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그리 생각지 않소.”
파디스의 예상대로, 그로부터 꼬박 3일간 사리에는 사경을 헤맸다.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사리에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파디스는 단호히 그녀의 행동을 억제했다. 그는 유적과는 정 반대방향인 우물 쪽으로 이동해 임시 거처를 마련한 뒤,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사리에는 평소보다 가뿐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전날까지 그렇게 쑤시던 상처의 고통도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어 있었다. 찌프둥한 몸을 풀고자 이리저리 몸을 틀자, 검에 기대 졸고 있던 파디스가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이 들었소?”
“아..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소. 배고프면 거기 있는 과일로 요기를 하시오. 아쉽지만.. 추적자들이 근처까지 도달한 것 같아 불은 피울 수 없소.”
먹을 것을 보자 갑작스럽게 허기가 몰려왔다. 3일 동안 물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 한 탓이었다. 사리에는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과일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파디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과일 중 물이 많은 것을 골라 엘라인의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엘라인은 반 넘게 입 밖으로 흘리면서도 과일즙을 맛있게 받아 넘겼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엘라인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아무리 파디스가 애를 쓴다고 해도 쫓기는 중에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물엔 한계가 있었다. 엘라인이 말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막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후엔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엘라인 왕자 때문인가요.”
“추적자들이 근처까지 수색을 하는 모습을 확인했소. 그리고 더 이상의 야외생활은 왕자님께 무리요. 앞으로 이틀 이내로 엘프와 접촉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는 숲을 벗어나 마을로 숨어들 작정이오.”
“그냥 날 버리고 갔으면 됐을 것을..”
“중간에 버릴 것이었다면 아예 구하지도 않았소.”
한 치의 주저도 없는 파디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사리에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부서져 내렸다. 사리에는 언젠가 이것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지금으로선 그저 막연한 예감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빗나갈 리가 없는 예언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애써 그 예감을 부정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이렇게 잘해줄 필요 없어요. 언젠가 난 당신과.. 엘라인 왕자의 목을 노릴 거예요.”
“그때가 되면 잘해달라고 해도 잘해 줄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지금도 딱히 잘해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처 입은 자를 돕는 것은 기사의 당연한 의무요.”
“의무.. 인가요.”
“그렇소. 의무요.”
예감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제 상처는 많이 나았어요. 이제 헤어지죠. 다음에 만났을 때는 우리는 적이에요.’
“그렇군요. 자, 과일도 다 먹었으니 슬슬 이동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