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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로스
작가 : 아마란스
작품등록일 : 201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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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마을로 가는 길 (6)
작성일 : 17-07-31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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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떨어진 후에 이동하는 편이 좋소. 그때까진 쉬도록 합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현재 적대관계에 있는 상황이지만, 드리스덴공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이해를 일치 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만.”

 “말을 어렵게 하는 군요. 즉, 당분간 동맹을 맺자는 소리지요?”

 “그렇소. 단 두 사람뿐인 동맹이긴 하지만.”

 사리에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선 거절할 수도 없겠군요. 좋아요. 묻고 싶은 게 뭐죠?”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오. 첫째는 드리스덴공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하이드리아와 밀약을 맺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오.”

 “아쉽지만 그 문제는 제가 아는 영역 밖이군요. 다만, 제 선임대장이었던 기란 장군과 모종의 계약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요.”

 “전쟁 전부터 배신한 상태였다는 것이군.”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아주 중요하오. 전쟁 전부터 이미 배신을 작정했다면, 아주 세밀한 작전을 미리 짜 놓았을 것이오. 왕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영주들에게도 이미 손을 써 놓았다고 봐야 옳을 것이오. 회유했거나 아니면..”

 “암살.”

 “그렇소. 어느 쪽이든 영주들의 성에 몸을 맡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요.”

 “결국 엘프의 마을을 찾는 수밖에 없군요.”

 “...그것도 힘들 것이오. 유적 쪽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았소. 나무들 때문에 흩어졌는데도 굉장한 연기가 일었소. 예상컨대 삼천 명 이상의 병사가 유적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오.”

 사리에는 파디스의 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떠올리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삼천 명? 그만한 병사가 갑자기 어떻게 수해에 들어온 거죠? 불가능해.. 드리스덴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병사를 다시 모아서 돌아오기까지는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텐데요! 피로 때문에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난 아마도 그 대답을 그대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소.”

 “제가요?”

 파디스는 말없이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북쪽 끝에는,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성.. 바르토스의 상징이었던 사크리드 성의 잔해가 위치하고 있었다. 사리에는 그제야 파디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바로 그거요. 3만 명의 하이드리아군이 갑자기 사크리드성을 포위했을 때..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소. 식량후송.. 군마의 피로. 그리고 병사의 피로. 모든 요인을 감안할 때, 도저히 그만한 수의 병사가 국경을 통과해 아군의 전령보다도 빨리 기습을 가해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요. 하지만.. 분명 현실이었소. 그들은..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었소.”

 사리에는 대답에 앞서 잠시 망설였다. 지금부터 하게 될 말은, 말하자면 하이드리아의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이었다.

 “후.. 목숨을 구해준 답례는 해둬야겠죠. 좋아요, 말해드리죠. 단, 이걸로 목숨 빚은 갚은 셈 칠거예요.”

 “딱히 빚을 지울 생각으로 구한 건 아니었소만. 뭐 그리 생각하는 게 맘이 편하다면 그리 하시오.”

 “그건.. 아마도 마법일 거예요. 하이드리아의 집결지에는 커다란 대리석 개선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통과하자 사크리드 성 뒤쪽 야산의 공터에 서있었죠.”

 “마법이라고..! 그것이야 말로 불가능하오. 사람 한명을 워프 시키는 것도 대마도사 한명이 모든 마력을 쥐어짜내야지만 비로서 성공할 수 있소. 한데 3만 명을 워프 시킨다니?”

 “하지만 분명 사실이에요. 우린 그렇게 해서 이곳에 왔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3만 명만을 보낸 거요. 그냥 국경방위를 할 만큼의 병사만 남기고 전군을 출진시켰다면 훨씬 전에 사크리드성이 무너졌을 텐데.”

 “그 정도가 한계라고 들었어요.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군사회의 때 얼핏 들은 기억이 나요.”

 “3만 명이 한계라고? 납득하기 힘들군. 3만이란 숫자는 마법에서 무한대와 마찬가지 숫자요. 3만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30만도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보면 되오.”

 “하지만, 실제로 3만 명이 통과하고 나자 개선문은 무너져 내렸어요.”

 사리에는 기억을 더듬느라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히 마지막 병사가 통과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개선문은 가루처럼 무너져 내려 완전히 사라졌었다. 그 마지막 병사가 바로 사리에 자신이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렸다? 헌데 이상하군. 당신 말대로라면 개선문을 통과한 순간 당신은 이미 바르토스의 영지에 서있었어야 하오. 즉.. 당신이 본 개선문은 바르토스에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죠?”

 “중요하고말고. 브랑쥬드경, 말해 주시오. 하이드리아의 개선문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소? 아니길 빌고 있지만.. 혹시 엘-그라니아 의 주변은 아니었소?”

 “아니, 그걸 어떻게..?”

 사리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파디스를 만난이래 처음으로 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사리에는 뜻밖의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파디스? 대체 왜 그러는 거죠?”

 “사리에경.. 아무래도 이번 전쟁.. 뭔가 큰 음모가 있는 듯하오.”

 “음모? 당연히 있고 말구요. 드리스덴의 음모 때문에 사크리드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잖아요?”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것조차 음모의 일부에 지나지 않소. 사리에경, 기왕 군사기밀을 누설한 김에 한 가지만 더 말해 주시오. 현재 엘-그라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오?”

 “엘-그라니아엔 전통적으로 1만 명 이상의 크루세이더가 수비하고 있어요. 그들은 성황폐하의 직속이지요.”

 “하지만 이번 전쟁을 위해 많은 기사단들이 파견되었을 텐데?”

 “물론이죠. 크루세이더 역시 예외는 아니에요. 현재 그곳에 남아있는 크루세이더는 대략 2천 명 정도일 거예요.”

 “2천 명..!”

  파디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리에는 답답한 마음에 새된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이봐요, 파디스!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나에게도 좀 알려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엘-그라니아는.. 아마도 함락 당했을 거요.”

 파디스의 말에 사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잠시 말을 잊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이봐요, 파디스. 당신이 뭘 말하려는지 이제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바르토스에 있던 개선문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니까요?”

 “사크리드 주변에 있던 개선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봤으니, 아마도 하이드리아군은 그 문을 통해 다시 엘-그라니아 로 누군가 침략해 가리라고는 의심하지도 않았을 거요. 하지만, 만일 바르토스내에 개선문이 하나 더 있었다면?”

 “그럴 리가요. 개선문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바르토스 내에서도 드리스덴, 그자 한명 뿐이었을 텐데요.”

 “바로 그 드리스덴공의 직할지에, ‘진실의 문’ 이라는 이름의 옛 유적이 존재하오. 대리석으로 된 개선문 모양의 유적이오.”

 “뭐, 뭐라고요!!”

 사리에는 그제야 파디스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르토스 공략을 위해 대부분의 병사들이 빠져나간 성도, 엘-그라니아에 갑자기 수만의 바르토스 병사들이 들이닥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크루세이더들이 제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고착 2천명으로 할 수 있는 작전은 한계가 있었다. 내성의 문을 닫고 필사적으로 농성을 하는 것이 고작인데다, 그나마 군량조차 거의 없다시피 할 터였다. 제 아무리 신에게 축복받은 크루세이더들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 3일 이상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소.. 바르토스와 하이드리아의 수도가 동시에 함락되면, 통제를 잃은 두 나라의 대영주 사이에서 분열이 생길 것이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시작되고.. 결국 누군가가 다른 영주를 제압하고 왕좌를 차지한다 해도 두 나라의 국력은 눈에 띠게 약해지겠지. 대륙을 이분하던 강국 2개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 것이오. 그리되면 두 나라의 통제 하에 있던 크고 작은 나라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오. 패권을 잡기 위해! 대륙의 주인이 되기 위해 저마다 병사를 모으고 전쟁을 시작하겠지.. 긴 전란의 시대가 닥칠 것이오. 인간끼리 서로 죽고 죽이며.. 약탈, 강간, 강도..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이 찾아오겠지.”

 “...마치, 바르토스와 하이드리아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통일하기 전처럼 말이죠.”

 “드리스덴, 그 자는 처음부터 이것을 바란 것이 틀림없소. 좀 더 빨리 눈치 챘어야 했는데.. 엘라인 왕자전하를 보호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나의 불찰이오.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세상이 전란의 시기에 돌입한다 해도 정작 드리스덴 그자에겐 무엇 하나 이로울 것이 없었을 텐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죠. 어찌됐든 이것 하나는 분명해 졌어요. 엘라인 왕자는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것. 드리스덴의 계획에서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엘라인 왕자가 살아남았다는 것뿐이에요. 왕자가 살아있다면 대영주 사이의 분열도 최소한으로 통제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바르토스의 분열을 막고.. 각 국가 간에 전란이 발발하는 것을 막아야만 해요.”

 “물론 엘라인 전하는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킬 것이오. 하지만 그대는.. 여기 남을 필요가 없소. 원래는 몸이 완쾌될 때까지 최대한 보호해 주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부상을 무릅쓰고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하이드리아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그.. 주교들 사이의 분쟁을 막는 편이 좋지 않겠소?”

 사리에는 이를 앙다물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대신해서 말해 주었다.

 “분하지만.. 성황폐하께선 자식이 없으세요. 이런 경우 전통적으로 성황께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대주교들 사이에서 한분을 차기 성황으로 지정하는 것이 관례죠. 하지만 만일 당신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다음 성황을 지정할 틈조차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대주교들 사이의 분쟁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하필이면 이번 대주교들의 인망과 역량은 서로가 비슷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예요. 나 같은 말단 신성기사가 돌아가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적어도 이 사실을 전해주기는 해야 하지 않겠소?”

 “후.. 이봐요, 파디스. 솔직히 말할게요. 상처가 회복됐다고는 해도 지금의 저로선 걷는 게 고작이라고요. 더구나, 전 원래 오른손을 쓰는 검사.. 그 오른손이 어깨 아래로 송두리째 사라진 상태인걸요. 이런 몸으로 바르토스를 통과해 다시 하이드리아의 성도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하이드리아의 상황은 바르토스와는 달라요. 개선문을 통해 엘-그라니아가 함락당한 사실이 퍼지게 되면 드리스덴이 양국을 동시에 공격했다는 사실을 바보라도 단번에 알 수 있다고요. 더구나, 하이드리아에도 인재는 많아요. 아마 당신이 읽은 국면정도는 그들도 예상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뒤늦게 도착해 그 사실을 알릴 필요도 없이 아마 나름대로 일을 진행해 나갈 거예요.”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럼..”

 파디스는 불쑥 사리에 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사리에는 그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추격당하는 중이라 급한 건 알겠지만 손을 좀 씻는 게 좋겠어요. 흙도 묻어있고.. 음..”

 “동맹관계를 재확인하고 싶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바르토스 내에서는 아직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소. 방금 전까지 적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긴 좀 쑥스럽지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이오.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사리에 브랑쥬드 경.”

 “후후.. 그 말을 할 줄 알았죠. 물론, 협력할 생각이에요. 그 드리스덴에겐 나도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하시오”

 “첫째는 내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나를 보호해 줄 것.”

 “당연하오.”

 “둘째는, 내 상처가 완전히 나은 뒤에 나와 한 번 더 겨룰 것. 물론 전력을 다해서!”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지금까지 난 당신에게 검술로 한번, 지혜로 한번 지고 말았어요. 이대로 그냥 물러서는 건 하이드리아의 기사로서 용납되지 않아요.”

 파디스는 사리에의 도발적인 눈빛을 차분히 받아 넘겼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흑마법을 익혀서까지 날 이기려 했던 이유요?”

 “그래요.”

 “세 번째도 패하게 될 텐데?"

 ”아니요! 세 번째는 제가 이겨요. 반드시!“

 “하하하! 좋소. 전력으로 겨뤄 드리리다.”

 근육질의 검은 손과 희고 매끄러운 손이 서로를 굳세게 마주잡았다. 평화를 위한 작은 한걸음을 축하하듯, 아침햇살이 수해를 뚫고 들어와 둘의 모습을 감싸 안았다. 마주잡은 손 위로 서로를 마주보는 두 남녀의 눈빛에는 아침햇살 빛을 닮은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은 작지만 언젠가 온 어둠을 거둬줄 희망의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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