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의 정비기간을 가진 후, 파디스 일행은 엘프의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비록 얼마 안 되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그동안만이라도 엘라인 왕자를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엘레나 까지 포함해 일행이 5명이나 되는데다가, 그중 여자가 3명이나 되었기에 어찌 보면 화사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 명의 여인네들이 저마다 엘라인을 안아보고, 뺨을 만져보고 하는 동안 파디스는 멀건이 그것을 바라보며 외따로 걸어갈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프리아의 애보기는 특이했다.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몇 장 주워 거기에 마법을 걸자 나뭇잎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엘라인의 주변을 떠다녔고, 엘라인이 큰 두 눈을 반짝이며 나뭇잎들을 잡으려 할 때마다 요리조리 몸을 피해 날아다녔다. 엘라인은 그저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프리아의 마법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신기한 마법이군요. 저렇게 정교한 조작을 할 수가 있다니.”
“마법이 아니라 정령을 불러낸 것이라고 하시네요. 어찌됐든 대단합니다. 과연, 전설상의 엘프..”
“음.. 허나 공격에 관련된 마법수준은 어떨지.”
무심코 내뱉은 파디스의 말에 엘레나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 이런 때조차 싸울 생각만을 하시는 겁니까?”
“이런.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엘라인 전하의 호위가 제 목적이다 보니 자연히 떠올랐을 뿐입니다.”
“변명은 정말 잘한 다니까. 그보다 엘레나, 혹시 인간도 정령마법을 익힐 수는 없는지 좀 물어봐주세요.”
“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자연과의 친화도가 높은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이중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사람은?”
엘레나는 살짝 양 볼을 붉혔다. 사리에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채구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뭐야, 사제님만 가능한 건가요? 나도 화초 같은 건 꽤나 좋아하는데. 하이드리아의 내 저택엔 화분천지 라고요.”
“저.. 화분을 키우기 때문에 오히려 안 되는 거라고 하시네요. 정령들은 집안에 같혀있는 것보다 숲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칫..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라, 파디스. 잠깐 나 좀 봐요.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지금 나 비웃었죠?”
“아니오. 생사람 잡지 마시오, 후후후후.”
“그 웃음! 그 웃음이 수상하다는 거예요. 자, 지금이라면 그냥 용서해 줄게요. 어서 불어요.”
“자, 프리아님의 말대로라면 이제 반 정도 온 듯합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이동하도록 하지요. 오, 마침 저쪽에 과일나무도 있군요.”
“이봐요, 파디스! 아, 도망가 버렸다. 정말 처음엔 몰랐는데 은근히 능글맞다니까.”
사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의 큰 나무그늘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프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엘레나가 종종걸음으로 사리에 에게 달려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쉬는 것은 위험하다고 합니다. 숲의 중앙에 무리를 짓고 있던 고블린 무리가, 갑자기 다수의 인간이 수해에 들어오는 것에 놀라 이 주변으로 주거지를 옮겼다고 하는군요.”
“고블린..? 그 인간의 반 정도 크기 밖에 안 되는 괴물이요? 사제님, 그런 정도는 걱정할 거리도 못된다고 좀 일러 주세요. 일단 파디스 혼자만 내보내도 100마리정도는 너끈히 상대할뿐더러.. 제가 합세하고 거기에 프리아가 뒤에서 화살로 지원 해주면 200, 300 마리정도는 상대가 아니에요.”
“확인된 것만 500마리가 넘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블린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근력과 순발력은 인간과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아무리 낮게 평가를 해도 잘 훈련된 인간전사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입니다. 전 숲속에서 고블린과 싸우다 다친 사람들을 많이 치료해 봐서 잘 알아요.”
프리아가 그렇게 까지 말하자 사리에도 비로소 긴장하는 기색을 눈에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또 다른 이유를 들어 프리아를 설득했다.
“음.. 사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하시는 것을 보니 저도 조금 걱정되긴 해요. 하지만, 아침에 출발해서 꼬박 반나절을 걸어 왔잖아요? 기사인 저나, 파디스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사제님과 프리아.. 그리고 누구보다도 엘라인 왕자는 피로가 심할 거예요. 파디스는 아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곳에서 휴식을 하자고 제안했을 겁니다.”
“그도 그렇군요. 그럼 프리아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아는 나무그늘에 도착하자 안고 있던 엘라인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리에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마법이 걸린 나뭇잎들은 그때까지도 엘라인의 주변을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행동이 자유로워지자 엘라인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나뭇잎들을 쫓아다녔고, 마침내 그들 중 하나를 손에 잡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팡,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나뭇잎은 초록색 분말이 되어 폭죽처럼 흩어졌다. 사리에와 엘레나마저도 그 광경에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정말이지 대단하네요.”
“인간도 저런 마법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축제 때 쓸 폭죽 값도 절약할 수 있고 말이죠. 아, 정말이지 쓸데없는 불꽃놀이에 해마다 성도에서 지출하 돈만 생각하면.. 에휴, 그 돈이면 천민들에게 매년 곡물가루를 지원해 줄 수 있을 텐데.”
“프리아님은 그 의견에 반대라고 하시네요. 그리 되면 아마 온 세상에서 나뭇잎이 남아날 일이 없을 거라고.. 호호호.”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사제님도 참.”
엘레나의 통역을 사이에 두고, 세 여자는 종알거리며 짧은 휴식을 즐겼다.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끼는 법. 오랜만에 맞는 평화로운 시간에 취해 잠시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 여유로운 기분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혼자서 나뭇잎들과 놀고 있던 엘라인이, 갑자기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더니 곧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아니!!”
엘레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엘라인에게로 뛰어갔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이윽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백색의 덩어리를 발견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크, 큰일이에요! 엘라인 왕자전하께서 독버섯을 삼킨 것 같아요.”
“뭐라고요? 어서 치료마법을 걸어주세요!”
“안 돼요..! 이런 종류의 약물은 그냥 음식물과도 성질이 비슷해서 마법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해요. 해독제를 먹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해독제라니.. 그 버섯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독제를.. 일단 축복마법이라도 걸어서 내성을 증가시켜 보세요! 어서요!”
엘레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엘라인에게 축복을 내렸다. 아주 조금, 엘라인의 숨이 편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 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엘라인의 경련은 심해졌다. 조그만 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이 다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상황을 이해한 프리아가 급히 남은 버섯조각을 살펴보고는 이내 주변의 나무둥치를 살피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사리에가 눈 밝게 그 모습을 알아보고 엘레나에게 소리쳤다.
“프리아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뭘 찾아야 되는지 물어봐 줘요!”
“예..! 화심이 노랗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주황색을 거쳐 빨간 빛을 띠는, 손바닥 정도 크기의 꽃을 찾으라고 하네요. 잎사귀는 맥이 나란히 뻗어있고 줄기에 작은 돌기가 많이 솟아 있답니다! 보통 나무둥치에 많이 피어있다고 해요!”
멀리서 나무과일을 따 모으던 파디스가, 세 여자의 이변을 눈치 채고 황급히 달려왔다. 사정설명을 들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과일들을 다 떨어트리더니 미친 듯 엘라인에게로 뛰어갔다. 엘라인은 눈을 하얗게 뒤집고 입가에서는 하얀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파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엘라인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아, 안 돼!! 주군, 주군!! 정신을 차리십시오! 주군!!”
“파디스! 흔들면 안돼요! 진정하라고요! 독이 더 빨리 퍼진단 말예요!”
사리에가 기겁을 하여 파디스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사리에를 거칠게 떠밀어 버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엘라인의 이름을 외쳤다.
“이럴 순 없어!! 적의 화살에 돌아가시는 것도 아니고 한낱 버섯 따위에!! 오오, 바르토스의 마지막 등불이.. 안 돼!! 주군, 정신을 차리십시오!! 제발, 제발 누군가 도와줘!!”
- 짜악!
파디스의 얼굴이 거칠게 돌아갔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프리아가 있는 힘껏 파디스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녀는 손에 든 발간 꽃을 입안에 넣고 급하게 씹더니 엘라인을 빼앗아 들고 입으로 즙액을 넘겼다. 엘라인의 입안에 든 거품 때문에 즙액이 잘 들어가지 않자, 프리아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거품을 긁어냈다. 아이를 너무 거칠게 다루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꽃과 줄기를 씹어 엘라인에게 먹이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두 손 놓고 지켜볼 뿐이었다.
엘라인이 액즙을 모두 삼킨 뒤, 프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엘라인의 상태를 살폈다. 파디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잊고 떨리는 목소리로 프리아에게 물었다.
“어, 어떻습니까? 전하께서는.. 전하께선 괜찮으시겠습니까?”
“기다리라고 하네요. 늦지 않았다면 반드시 약효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20살에 당당히 바르토스의 기사단에 입단한 이래, 수많은 전장을 헤쳐 왔고, 또한 위험한 순간도 수없이 맞아봤던 파디스였다. 하지만 그 어떤 전투에서도 기다림이 이렇듯 어렵고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가끔씩 엘라인의 손이 떨릴 때마다, 파디스는 경기 걸린 사람처럼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1분이 1년 같은 긴 기다림의 끝에, 엘레나의 외침이 숲에 울렸다.
“성공입니다! 약효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프리아는 엘라인의 입이 바닥을 향하도록 뒤집더니 계속해서 엘라인의 등을 쳐주었다. 얼굴이 발갛게 되어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엘라인이 이윽고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잘게 씹힌 버섯송이같은 것을 뱉어내고 난 뒤에도, 프리아는 엘라인이 맑은 애액을 토해낼 때까지 계속해서 엘라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한 엘라인은 이내 제풀에 지쳐 잠들어 버렸고, 프리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라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때를 맞춰 엘레나가 회복마법을 걸어주자, 잠이 든 엘라인의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
“와, 왕자전하께선 무사하십니까!!”
안절부절 못하던 파디스가 고함치듯 프리아에게 물었다. 온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에 프리아는 긴 두 귀를 손으로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그녀는 빠른 몸놀림으로 엘레나의 뒤에 숨더니, 그녀를 통해 파디스에게 이야기 했다.
“급한 고비는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야기 할 때는 되도록 소리를 죽여서 이야기 해달라고 하네요. 엘프는 귀가 무척이나 예민해서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파디스는 뒷부분의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 엘라인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커다란 목소리로 프리아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외쳤기에, 프리아는 그때마다 온몸을 움찔움찔 떨어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파디스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숫제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을 행한 것뿐으로, 그저 버섯과 함께 독액을 토하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미 몸속에 흡수된 독액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여기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노라고 이야기 하시는 군요.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조금 더 나은 치료를 행할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합시다!!”
“예.. 그리고, 이번 일은 프리아님에게 큰 책임이 있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사과를 하고 싶다고, 괜찮다면 마을까지 동행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파디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이유야 어찌됐든 엘라인 왕자를 다른 종족의 손에 맡겨야만 한다는 게 영 꺼림칙했던 터였다. 염치를 무릅쓰고 파디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하십시오. 전해 드리겠습니다.”
“엘레나님과 사리에 경도 함께 가겠노라고, 그리 전해 주십시오. 두 분만 드리스덴의 추격 앞에 남겨 놓을 수는 없습니다.”
프리아는 파디스의 제의를 흔쾌히 승낙했다. 뜻밖에 엘프의 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사리에는 드러내 놓고 좋아했고, 엘레나는 표정에 좋은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예부터 성스러운 종족이라 전해지는 엘프의 성지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는 것 같았다. 저마다의 목적을 싣고, 일행은 마을로의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