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아와 에리카는 첫 검술 훈련을 마친 뒤 깨끗하게 목욕을 마치고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궁인들이 내온 시원한 음료와 달콤하고 차가운 젤리는 몸의 노곤함을 풀어주고 기분마저 상쾌하게 해주었다.
“라키스트 공작과의 훈련은 어떠하셨나요?”
레오는 산드리아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난 기사로 칭송을 받았지만, 훌륭한 기사가 많은 메르헨에서도 그 실력이 통할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에리카는 메르헨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유한 아버지와 오라비를 두고 있는 여인이 아니던가.
혹여 레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을지 엘레아는 살며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잘 가르쳐주었어요. 공주님을 훈련시킨 경험이 있어서인지 섬세하게 잘 가르쳐 주더군요. 공주님께서는 전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요?”
‘즐거운 시간’이라는 말에 엘레아는 방금 전 옷을 벗고 있던 루이스가 떠올라 버렸다. 사실 엘레아가 상의를 벗은 남자의 맨 몸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비체 산에 있는 레오의 사병이 있는 개인 훈련장에 갈 때면, 산드리아의 더운 날씨를 탓에 상의를 벗고 훈련 중인 사병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레오의 몸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엘레아였는데 루이스의 맨 몸은 왜 이렇게 야하게만 느껴지는지 – 스스로에게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아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못하자 에리카는 그런 엘레아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에리카가 겨우 한 살 많았지만, 에리카는 엘레아가 친구 같기도 하다가 귀여운 막냇동생 같기도 하였다.
“전하께서도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시지요? 공주님이 실력이 뛰어나서 별로 가르치실 것은 없겠지만요.”
“실력이 뛰어나다니요. 저는 체격도 작고 힘도 부족해서 그런지 사실 라키스트 공작이 공을 들인 만큼 실전에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어요.”
엘레아는 절로 그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레오와 수로를 빠져나가자 메르헨의 군사들이 수로를 막고 있었다.
레오와 그의 사병들이 앞서 나가며 그들을 베었지만, 베어도 베어도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엘레아 역시 자신에게 달려드는 병사를 베어냈지만, 훈련과 실전은 많이 달랐다. 체격이 작은 엘레아가 키가 큰 메르헨의 장정들을 베어내기란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사병은 모두 죽고 레오는 온 몸의 부상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둘러 싼 셀 수 없이 많은 적군들 – 죽음을 목전에 둔 진정한 사지의 기억이건만 엘레아는 그 기억이 고통스럽거나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로를 빠져나와 눈앞의 풍경을 보자마자 이렇게 싸우다가 내 자신을 지킬 수 없을 땐 자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오히려 맘이 편했다.
엘레아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전쟁 당시의 일을 말을 꺼내니 에리카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만큼 그 때의 일이 마음의 충격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그나저나 라키스트 공작은 원래 이렇게 무뚝뚝한가요?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말 수 없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에리카가 푸념하듯 말하자 엘레아가 웃음을 보였다. 분명 레오는 훈련 내내 필요한 말 외에는 건네지 않았을 텐데 활달한 에리카 공녀는 레오에게 계속 말을 걸었을 것 같았다. 그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며 절로 웃음이 나온 것이다.
“레오, 아니 라키스트 공작은 원래 조용하고 말이 없었어요. 저도...... 말 주변이 있는 편이 아니라 저희가 훈련을 할 때면 사방이 고요했지요.”
“그렇게 서로 아무 말 않고 있으면 어색하지 않으신가요?”
“어색하다는 생각은 해 본적 없어요. 라키스트 공작은 제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요.”
“공주님에게는...... 가족 같은 사람이겠네요.”
‘가족’이라는 말에 엘레아의 표정이 잠시 쓸쓸함이 스쳤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독살하고 저를 감금한 오라비보다는...... 더 가족 같은 존재이죠.”
* * *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 루이스는 환한 얼굴로 엘레아를 맞았다. 엘레아 역시 살며시 미소를 보이며 화답을 하였다.
처음 엘레아의 미소를 보았을 때, 루이스는 무척 감격스러웠다.
저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드디어 미소를 보다니! 루이스에게는 땅을 정복 한 것만큼이나 기쁘고 성취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엘레아와 가까워지는데 검술훈련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최근에 엘레아는 미소를 보이기도 하고, 먼저 말을 건네기도 하였다.
“요즘 좋아 보여. 네 모습.”
루이스가 아침식사로 나온 닭고기와 야채를 포도주로 조린 요리를 먹으며 무심코 말하였다. 루이스는 혹시 이 말에 엘레아가 날을 세우며 아니라는 반박을 하지는 않을까하며 얼굴을 살폈지만 엘레아는 가만히 그 말에 동의 하였다.
“요즘..... 정말 편안하고 좋아요.”
엘레아는 정말 요즘 편안하고 – 조금은 행복하다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악몽을 꾸지도 않고 편안하게 잠도 잘 자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우도 생겼고, 복수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되었다. 유폐생활도 아니었고, 레지덴 궁도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엘레아는 조프리에 대한 복수심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채찍질했는지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복수심도 정치적인 욕심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편안하고 즐거웠다.
루이스는 엘레아가 처음 미소를 보였을 때만큼이나 감격스러웠다.
“지금처럼 평생 지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뭐?”
루이스의 감격스러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지금처럼 평생’이라니. 지금처럼 안지고 가까이 하지도 못한 채, 그저 아무 관계도 아닌 채로 평생을 보내고 싶다니!
자신에게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었다고 생각했던 루이스에게는 참담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엘레아는 진심으로 – 지금처럼 평생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루이스를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고마워하면서.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지도 내어주지도 않으면서. 지금 이대로 조용하게 지내다가 생을 마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지금처럼 지내다가 나중에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마음을 내준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투정을 부리면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루이스도 지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 그렇게 나이가 들다보면 자신을 잊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그 때는 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감도 있었다.
엘레아가 야채와 닭고기를 한 입 넣고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루이스는 충격을 받은 듯 한 굳은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의 여인으로 사는 것이...... 너에게는...... 그토록 힘들 일인가? 너를 곁에 두고 안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평생을 보내라고?”
“제 나라와 제 몸은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제 마음만은..... 온전히 저만의 것이니 절대 전하께 내어드리지 않을 거예요.
루이스는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쥔 채로 여전히 충격이 가시질 않은 얼굴이었지만, 엘레아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 이어갔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이내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 식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네가 온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할 때 까지.”
엘레아는 참담하게 굳어버린 루이스의 표정도, 방금 전의 말도 모두 가슴이 아팠다. 그에게 미안해서 마음이 아팠다.
너무 편안하고 즐거운 지금의 생활에서 단 한가지 힘든 일 – 바로 눈앞의 이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 * *
에리카는 요즘 들어 문득문득 레오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입술을 굳게 꾹 다물고선 여태 의례적인 말 외에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 미련스러운 곰탱이 같은 남자의 얼굴이.
그런 레오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에리카는 마음속에서 왠지 화가 치솟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명 마음에는 안 드는데 – 이상하게도 그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은 싫지 않았다. 아니 만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생긴 건 멀쩡한데 말이야.’
루이스와 레오 모두 어디를 가도 ‘미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준수한 사내였지만 느낌은 매우 달랐다.
루이스는 선이 고운 턱선과 웃고 있는 듯 한 선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선한 눈매와 달리 눈빛은 깊고 날카로워서, 따스하고 다정한 성품 이면에 숨어있는 국왕으로서의 냉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반면 레오는 선이 굵은 전형적인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과 믿음직하고 우직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 마치 ‘기사의 표본’처럼 느껴지는 남자였다.
오늘도 검술훈련을 위해 만났지만 레오는 의례적인 인사와 훈련에 필요한 말 외에는 전혀 하질 않았다. 에리카는 오늘은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 마디를 하였다.
“아니 라키스트 공작! 이 정도 얼굴 보고 지냈으면, 훈련은 힘들지 않은지, 재미는 있는지, 아니면 최소 식사는 했는지 정도는 물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에리카의 분노는 적어도 레오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고도 뜬금없었다. 레오는 잠시 에리카를 응시하더니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걸... 굳이... 왜 물어야 하죠? 정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 안부 정도는...... 묻도록 하지요.”
레오의 대답은 에리카의 부글부글 끓는 마음에 더 불길을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내가 반드시 저 놈의 꾹다문 입술로 수다 떠는 것을 듣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