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 자신의 사초를 살폈다.
" 기억을 잃기 석 달 전, 대신들과의 격렬한 대립이라............. "
청이 사초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사건은 이랬다.
황상에 앉은 청이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을 살폈다.
“ 요즘 들어 현천관에 식음을 전폐하고, 짐과의 만남을 청하는 유생들이 많다고 들었소. ”
청 황제 7년.
태평성대를 이룬 역사적 성군이라 불리는 명 황제로부터 태생한 유일한 청룡의 혈족인 청 황제였다.
청룡의 혈통은 청룡인 부체와 청룡인 모체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명 황제는 황후를 제외한 모든 비를 일반 인간의 종족 중에 골랐다.
따라서, 비들로부터 소생한 황자들은 모두 청룡의 혈족이 아니었다.
태후로부터의 소생 또한 청 황제 혼자였다.
그렇기에 청 황제의 위상은, 흔들 수 없는 절대 왕권이었다.
백성들의 신임이 높은 명 황제로부터 유일하게 청룡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제였다.
나이 또한 32살로 정치적 관록이 무르익은 황제, 그 자체임을 청은 기백으로 증명했다.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고위 대관의 양성소이자, 지식의 원천인 현천관에서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 청 황제의 장인 되는 영의정의 목소리였다. 청이 영의정을 바라봤다.
부딪힌 눈동자에서 청은, 영의정 속의 늙은 청룡을 느낄 수 있었다.
“ 선 황제인 명 황제께서 일찍이부터 진행한 이(異)종족 차별 금지안에 이제야 식음을 전폐하는 건 대관절, 나를 향한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 그 때는 전 국토 인구에 1할이 채 되지 않는 ‘그들’을 눈으로 본 적이 없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
“ 그들, 꼭 불러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을 부르듯 하시군요, 영상. ”
“ 이종족....... 주작을 부르면, 화마가 덮친다는 속설을, 늙은이들은 믿는 터라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
주작.
영의정이 두 글자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주름이 가늘게 떨리는 건, 늙은이 속에서 분노하는 나이 먹은 용의 그르렁 거리는 소리였다.
“ 허, 본 적이 없다가 봐서 그런다, 라. ”
청이 말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 설마 그것이 귀비인... 대장군 윤씨를 말하는 것이오. ”
“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 ”
“ 영상, 말을 가려 하시지요. 귀비를 누구보다 아끼는 황후가 들으면 많이 섭섭해 할 말입니다. ”
영의정을 바라보는 청 황제는 웃고 있었지만, 숨긴 노기 사이로 청룡의 기백이 꿈틀거렸다.
대신들 모두가 청룡의 혈통이지만, 황가의 그것과는 힘의 근본이 달랐다.
“ ....................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이대로 가면, 마찰만 일어납니다, 폐하. ”
“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
“ ............................ 황망하옵니다. ”
푸른 용포를 입은 청이 황상에서 일어났다.
오만스럽기까지 한 기운은, 분명 황제의 운명을 타고 난 먹이사슬 최강자의 것이었다.
“ 다들 똑똑히 들으시오. ”
청이 황상으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내려와 대신들과 같은 바닥에 섰다.
“ 주작의 나라였던 화국의 마지막 황제, 염 황제가 폭정을 일삼던 때로부터 청룡들이 들고 일어나, 백성들을 구해 해국이 건설된 지가 100년이오. 100년. ”
“ ................................ ”
“ 해국은 끝없는 심연의 바다처럼 영토를 확대했고, 그 명분은 항상 개국의 명분과 같았소.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위한 세상을 건설한다. ”
“ .......................... ”
“ 그 세월동안 많은 백성들을 해국으로 품었고, 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소. 이 명분에 반대하는 자가 대신들 가운데 있소? ”
“ .................................... ”
“ 그럴 리 없을 것이오. 이것이 해국의 근본이고, 이에 반하는 자가 바로 역심을 품은 자일 터이니. ”
일순간 고요가 찾아왔다. 청이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 쪽으로 늘어선 대신들 사이를 거닐며 훌쩍 키가 큰 청이 그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 그런데 그 100년 간 주작은 어떻게 살았는지 다들 아시오. 그래, 그들이 죄를 지었던 것은 맞소. 그런데 그 때 황권을 쥐었거나 폭정에 연루되었던 모든 자들은 9대를 멸해 처형 당했소. 청룡이고 주작이고, 사방신의 혈통을 타고 난 이들은 각 종족이 전 국토의 1할도 되지 않소. 9대를 멸했다면, 그 때 연루된 주작의 혈통이 모두 아작이 난 건 누가 보아도 당연한 것. ”
“ .................................... ”
“ 지금 살아남은 주작의 혈통은, 100년 전의 화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 그저 우리가 똑같이 품어야 할 백성들이오. ”
“ ................................ ”
“ 근데 그 100년 동안, 주작이란 종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말해주어야 아시오. ”
“ ...................................... ”
청이 걸음을 옮기며 대신 한 명, 한 명의 앞에 머물러 한 마디씩 했다.
“ 살인 ”
“ 폭행 ”
“ 간음 ”
한 참 입에도 담기 험악한 죄명을 읊던 청이, 마지막으로 영의정 앞에 섰다.
“ 주작 사냥이라는 걸 아시오? 영상? ”
“ ....................... ”
“ 설마 나랏일을 한다는 사람이 그걸 모르진 않겠지. ”
“ 괴이한 헛소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
청의 말을 영의정이 단호하게 받아쳤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영상이었으나, 그 음성은 기고만장했다.
청의 유일한 약점, 귀비의 출신은 영상에게는 무기였다.
“ 헛소문, .... 헛소문이라. 그래, 그럼 영상께서 알고 계시는 그 괴이한 헛소문의 내용은 무엇이오? ”
“ 어린 주작 아이들을 청룡들이 부모의 앞에서 간음하고 육신을 찢어 갈긴다는 이야기입니다. 해국의 변방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해괴한 소문입니다. 하지만 폐하, 폐하도 아시다시피 이는 음해입니다. 청룡의 정통을 흔들고 다시 일어나려는 주작들의 몸부림입니다. 주작들이 만드는 형태 없는 소문입니다. ”
“ 그렇소? ”
“ 그렇습니다. ”
“ 어찌 그리만 생각하시오? ”
“ 주작의 힘을 아시지 않습니까. 귀비이신 대장군만 보더라도, 여인의 몸임에도 초인적인 힘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정녕 일어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 ”
“ 하지만 청룡의 힘이 그보다 강하지 않소. ”
청의 말에 영상이 더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힘이 들어간 어깨는 오만했다.
“ 그래도 나는 좀 궁금했소. ”
“ .......................... ”
“ 그게 과연, 그냥 뜬소문일까? 하고. ”
“ 폐하. ”
“ 그냥 뜬소문이라기엔 신기하지 않소. 해국 변두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데, 해국 변두리에 사는 청룡이 무관 말고 몇이나 되오. 내가 알기엔 없소. 청룡들 대부분 고관대직이니 황궁과 가까운 도성에 모여 살지 않소? ”
“ ........................... ”
“ 해국은 청룡의 나라. ”
“ ..................... ”
“ 대부분의 청룡은 황궁이 있는 이 수도에 살고 있소. 변방에 살고 있는 건 무관들 뿐이지. 하지만, 선 황제가 차별금지안을 내세우고 출세의 길이 막혀있던 주작들에게 등관의 기회를 허락하셨소. 주작 중 일부가 태생된 힘을 사용해 황군에서 일하고 있소. 청룡인 무관들에게 주작은 일찍이 동료고, 귀비 또한 그런 방식으로 등용돼 대장군까지 오른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소. ”
청이 두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 근데 왜- 하필, 소문에서 사건들은 항상 해국 변두리에서만 일어난다고 말을 할까. 그럴 리가 없는데. 주작을 능욕하면서 사지로 몰고 갈 청룡들이 해국 변두리에는 살지 않는데. ”
“ 그러니 헛소문이라 아뢰는 것이옵니다. ”
“ 글쎄, 헛소문이라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해서 오히려 의심된달까. ”
청이 걷던 걸음을 멈춰서 고개를 숙인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 그래서 저 자리. ”
턱짓으로 청이 자신의 옥좌를 가리켰다.
대신들은 고개를 숙여 보지 못했지만, 느낌으로 황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었다.
“ 저 자리에 앉자마자 생각을 좀 해보았소. 이 소문의 정체를 어떻게 밝혀야 하나...... ”
황제가 다시 걸어 영상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 그래서 짐이 아-주 아끼고, 또 아-주 신임하는. ”
아-주.
청이 두 글자의 음운을 늘이고 입술을 과장되게 벌려 발음했다.
그 모습이 싸늘한 겉모습과 만나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헛소문보다 괴기스러운 건 청의 모습이었다.
“ 적임자에게 일찍이 이 일의 수사를 은밀하게 맡겼소. ”
“ .............................. ”
“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던 그 적임자가 며칠 전 보내 온 전갈에 내 기가 막혀 잠을 이루지 못했소. ”
“ ..................... ”
“ 천청궁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오. 누군가 궁에 퍼뜨린 이야기처럼- 전장에 나가 있는 귀비 걱정에 몇날 며칠을 시름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자, 모두 맞이할 이가 있습니다. 놀랄 수도 있으니 모두 청룡의 기운을 숨기시오. 황명이니. ”
청이 걸음을 옮겨 영상 옆에 선 대신에게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대신의 낯빛이 굳는 모습에 청이 피식 웃었다.
“ 들라하라. ”
청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한 쪽에 서있던 태진에게 말했다.
근엄한 목소리가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하자, 상궁 하나가 어린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상궁이 아이를 대신들에게 보이고는 다시 구석 한 편으로 사라졌다.
“ ..................... 폐하, 설마. ”
“ 그래, 맞소. 우리에게 소문의 답을 말해 줄, 주작의- 아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