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따라 유달리 꽃들의 색이 짙구나... ”
“ 마마- ”
“ 특히 청화의 쪽빛이 유달리 아름다워. ”
정오를 넘긴 지 세 시간 정도 흘렀을 때, 창공에 해가 저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화연이 늘 산책을 하는 즈음이 이 때였다.
황제가 기억을 잃은 지, 벌써 1주일이 지났다.
그 1주일 동안에도 화연은 습관처럼 정원에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아름답구나. ”
정원에서 자연을 보는 감화를 말하는 화연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그녀를 따르는 채연이 안쓰러운 눈으로 화연을 살폈다.
“ 폐하는, 강령하시다더냐. ”
“ …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옥체에는 이제 무리가 없다 하옵니다. 다만, 밀린 정무에 정신이 없으시다 하옵니다. ”
“ 빈 기억을 잡기 힘드시겠지. 일이 많을 것이다. 걱정이 되는 구나... ”
“ ……………………. 마마. ”
채연이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 그래서, 폐하께서...... ”
“ 마마아아! 귀비마마아아! ”
화연이 말을 이으려는데 저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우는 목청이 애타게 귀비를 불렀다.
“ 황자마마... 뛰지 마시옵...! ”
“ 흐윽... 귀비마마, 이게 어찌된 일이랍니까아아! ”
화연이 말릴 틈도 없이 5살된 어린 황자, 수가 화연의 치마 폭을 잡았다.
작은 손이 콩콩 거렸다.
“ 황자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 눈물을 이리 흘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
화연이 다리를 구부려 황자와 눈을 맞췄다.
청룡의 혈족인 청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난 적통 황자였다.
동시에 유달리 화연을 따르는 아이였다.
화연이 눈물을 감춰주려는데 황자가 콩콩 거리며 다시 울었다.
“ 아바마마가, 아바마마가 기억을, 기억을 하지 못하십니다!! ”
“ 마마... ”
“ 우아왕,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저와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셔요오! ”
화연의 치마를 쥔 채 흔들며 수가 울었다.
화연이 무어라 말 하려는 데 멀리서 황자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 황자- 황자! ”
황후 소진이었다.
황후의 등장에 어린 황자를 두고 귀비와 채연이 예를 갖추었다.
“ 황자... ”
“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서... 아바마마께서...! ”
청 황제를 쏙 빼닮은 수가 울먹였다.
맑은 눈망울이 계속 눈물을 쏟았다.
화연에게 매달렸던 수가 쪼르륵 소진에게 향했다.
“ 어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잠시 고뿔이 드셔 아프시다 일어나 그런 것이라구요. ”
소진이 품 안의 수를 토닥이며 말했다.
“ 그래두, 그래도 어찌 행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민가의 주전부리를 사다 주시기로 한 것도 잊고, 다음에 구슬치기를 함께 해주시기로 한 것도 잊을 수가 있으시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소자에게 해연지에서 물수제비를 가르쳐주시기로 하신 것도 잊어버리셨사옵니다!! ”
수가 소진의 품에서 응석을 부렸다.
5살 황자는 통통한 불을 부풀린 채 분이 풀리지 않는 울음을 삼켰다.
“ 다 잊어 버리셨습니다.... 아바마마가 이상하옵니다... ”
어린 아이에게 자신과의 약속을 모두 잊은 아버지는 모질 뿐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청이기에 수는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 아바마마가, 아바마마가...! ”
“ 귀비, 미안하오. 황자가 많이 놀란 것 같소.... ”
소진이 수를 데리고 돌아가려는데, 소진의 품에서 수가 바둥거렸다.
“ 내려주시옵소서, 어마마마!! ”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는 수에 소진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수를 내려주었다.
수가 쪼르르 화연에게 가더니 화연의 손을 잡았다.
“ 귀비마마, 저와 함께 가요!! ”
“ ……………… “
“ 그 때 구슬치기를 함께 해주신다 아바마마가 약조하셨을 때, 아바마마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아! ”
“ ………….. 마마. ”
“ 우리 함께 가요! 함께 갑시다! ”
수가 화연의 손을 끌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작은 손이 천근만근 쇳덩어리 같았다.
황제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어린 손에서 살아났다.
심장이 저미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 황자!! ”
그 때였다. 소진이 소리를 질렀다.
소진이 철없이 구는 수의 어린 손을 화연에게서 떼어냈다.
“ 어찌 이렇게 철이 없으십니까! 폐하께서 잠시 아프신데, 황자께서 잠깐을 못 기다려주셔서 이러시는 것입니까? 귀비 앞에서 이 무슨 체통 없으신 짓이에요! ”
“ ………… 어마마마....... ”
“ 폐하께서 많이 아프셔서, 황자께서 속이 상하실 수도 있다고, 그래서 아직은 뵙지 말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가서 알현하겠다고 한 것이 누구입니까? 이러려고 알현하겠다 그리 고집을 부리신 겁니까! ”
“ …………………….. ”
소진의 타박에 수가 고개를 숙였다.
어린 아이는 쭈뼛쭈뼛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눈물을 매달았다.
“ 훗날 황위를 이어받아 이 나라의 만 백성을 책임지실 황자께서 어찌 이리 생각이 짧단 말입니까! ”
서릿발 내리는 호통이었다.
어미로서 자식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황후로서 훗날 황제가 될 황자에게 이르는 진심이었다.
화연이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 어서 귀비께 사과 드리세요. 그리고 아까 천청궁으로 가시기 전에, 귀비께 전하실 게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
풀이 죽어 있던 수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다시 영락 없는 어린애였다.
“ 맞습니다! 귀비마마께 전할 것입니다! 마마, 제가 대제학께서 내주신 숙제를 다 했사옵니다! ”
“ 또 귀비께 무례를 범하면, 내 이제 황자께서 더 이상 귀비를 만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
“ 히잉...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
어느새 화연의 옆에 자리한 수였다.
황후의 말에 다시 풀이 죽어, 화연의 치마자락을 잡은 채 수가 쭈뼛거렸다.
“ 괜찮습니다, 마마. 안 그래도 저도 며칠 황자마마를 뵙지 못 해 많이 보고싶던 터였습니다. ”
“ 귀비........ ”
“ 황자마마, 폐하께서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맡겨 두고 황자마마께 전해 달라고 하신 게 며칠 되지 않았는데요. 아마 바쁘셔서 잠깐 깜빡하신 게 분명합니다. 부탁하셨던 주전부리,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
화연의 말에 수의 눈이 빛났다. 화연이 허리를 굽혀 수의 손을 잡았다.
우주를 삼켜 별을 박은 아이의 눈에 가득 화연이 담겼다.
“ 진정입니까? ”
“ 진정이지요. 제가 채비를 하여 현해궁(현해궁: 황자 수의 거처)으로 가겠습니다. 먼저 황자께서 가셔서 저를 기다려주세요. 저에게 주실 것이 있단 것도, 그 때 함께 나누어요. ”
“ 우와! 진정이십니까? 어떤 주전부리이옵니까? 사과꽃 조각 과자를 꼭 사다달라 소인이 부탁을 드렸는데요! ”
“ 우선 기다리시면, 가지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려주세요. ”
“ 우와, 그럼요! 소자 얼른 현해궁에서 귀비마마를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였다.
수가 콩콩 뛰더니 소진을 따라온 황자를 보필하는 상궁과 함께 길을 잡았다.
꺄르륵 소리를 내어 웃으며 황자가 정원에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황후가 한숨을 쉬더니 귀비에게 말했다.
“ 미안합니다, 귀비. ”
“ 아닙니다. 황자마마께서 많이 놀라셨겠사옵니다. ”
“ 폐하께서 변을 당하신 걸 현해궁에는 철저히 비밀로 해두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황자께서 폐하가 복궁하시는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서..... 폐하께서도 황자가 놀라지 않을까 여러모로 기억을 잃지 않은 척 연습을 하신 모양인데... 그게 쉽지 않으셨나 봅니다. ”
“ …………. 그러셨겠군요. ”
“ 어찌 아이에게 그대로 말하겠습니까....... 황자가 태어나신 게 폐하의 마지막 기억보다 나중의 이야기라는 걸. 폐하께서 황자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신다는 걸 말입니다...... ”
“ ………………. ”
소진이 한숨을 쉬었다.
“ 천청궁에서 놀라 뛰어 나가시더니, 그대로 귀비에게 오는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미안하오, 귀비. ”
“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
화연이 고개를 숙였다.
소진이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더니, 한 마디를 보태려다 멈췄다.
“ 그럼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혹여 황자가 또 무례하게 굴거든, 꼭 혼을 내어주세요. ”
“ 망극하옵니다..... ”
돌아서는 소진의 뒷모습에 끝까지 화연이 예를 표했다.
옆에서 함께 극진한 예를 갖추던 채연이 말했다.
“ 괜찮으십니까, 마마. ”
“ 무엇이. ”
“ ………….. 너무 하십니다, 마마. ”
화연의 대답에 채연이 울컥한 듯 말했다.
“ 어찌 모두 이리 마마의 감정은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황자마마께서 이렇게 뛰어오실 때, 어떤 사단이 날 지 모두 알면서 이래요! ”
“ 채연아. ”
“ 황자마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지는 않으십니까? 황후마마와 황자마마께서 나란히 계실 때..... 어떻게 괜찮으시냔 말입니까. ”
“ 채연아! ”
“ 너무 하옵니다. 다 너무들 하옵니다. 애초에 마마께서 들어오고 싶으셔서 들어오신 황궁도 아닌데요.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는 모두 잊어버리시고, 황후마마와 황자마마께서는 이리 모질 수가 있습니까. ”
“ 내 네가 한 마디만 더 하면 경을 칠 것이다. 어서 현해궁으로 갈 채비를 하거라. 주전부리가 마땅치 않을 것이지만, 저번에 그 쪽 지역에서 진상된 다과가 아직 조금 남아있을 것이다. ”
화연의 단호한 말에 채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눈에는 아직도 슬픔이 가득했다.
“ ……. 채비하거라. ”
채연이 결국 고개를 숙이더니 사라졌다.
화연 혼자 덩그러니 남은 정원에는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로 분홍색 꽃들이 많았다.
* * *
황자가 좋아하는 다과와 함께 길을 나선 화연이었다. 채연이 길을 잡았다.
궁 곳곳에 꽃이 만발하고, 새들의 지저귐이 화음을 이뤘다.
곳곳에 궁녀들이 제 일을 하느라 바빴다.
높은 기둥 사이로 살짝 보이는 빨래터가 있었다. 궁녀들이 치마를 걷은 채 빨래를 밟았다.
“ 어휴, 오늘따라 많네. ”
“ 그러게- ”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궁녀들이 안에서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연이 지나가는 것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 귀비가 요즘 매일 매일 은공을 드린다며? 폐하께서 기억을 되찾게 해달라고. ”
“ 얼마나 간절하겠냐. 청룡 궁궐에 주작이 웬 말이었어? 폐하께서 귀비를 기억하지 못하시는데 이제 귀비는 끈 떨어진 연이지, 끈 떨어진 연. ”
“ 그 궁 상궁과 나인들이 그래서 다 살 길 찾아 나서고 있다며? ”
“ 아오 꼬셔라. 황제 은총 하나 믿고 지금까지 귀비가 떵떵 거리고 산 게 벌써 몇 년이야! ”
채연이 화를 내려는 걸 화연이 손짓으로 막았다.
궁녀들은 아직 화연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 끝 떨어진 연이래, 키킥. 그래서 이름이 화연인가? ”
“ 저잣거리에서 그런다며- 폐하 꼬신 난 년. 그래서 화연, 화년- 한다고. 키킥. ”
키득키득 웃는 궁녀들의 목소리에 채연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해졌다.
황자에게 가져가는 다과를 쥔 채연의 손이 덜덜 떨었다.
“ 근데 진짜 어떻게 되는 거야? ”
“ 뭐 별 수 있겠냐. 은총으로 버티고 있던 삶, 이제 황궁에서 쫓겨나겠지. ”
“ 키킥. 귀비면서 대장군 직함은 왜 안 버리나 했더니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였나봐. 폐하를 모시는 자가 왜 피바람에서 사냐고 그렇-게 욕을 먹더니, 미래를 보는 눈이 달라요~ 역시 난 년은 다르다- 달라. ”
채연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화연의 눈치를 살폈다. 화연의 표정은 담담했다.
“ 마마, 제가 혼쭐을 내주고 오겠어요! ”
채연이 말했다.
“ 내버려두어라. 어차피 내가 있는 지도 모르고 나누는 말들이니. ”
“ 마마! ”
“ 폐하께서 지금 심기가 어지러우실텐데, 괜한 소란을 만들어 일을 보태드리고 싶지는 않구나. ”
“ ................... 마마. ”
뼛속까지 연정에서 비롯된 이유에 채연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 가자. 황자마마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
“ ............................... 예............. ”
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화연의 말에 대답하며 채연이 궁녀들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화연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궁녀들이 까르륵 웃을 뿐이었다.
화연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지척에서 큰 목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궁녀들이 돌아보며 화연을 발견했다.
“ 황제 폐하 납시오!!! ”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예를 갖추었다.
빨래를 하던 궁녀들은 신도 신지 않은 채 땅으로 뛰어 나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청에 대한 충심이기도 했지만, 화연을 본 공포이기도 했다.
“ 멈추어라. ”
인력거에 앉았던 청이 화연을 보고 인부들에게 말했다.
청이 곧장 내리더니 고개를 숙인 화연의 앞에 섰다.
“ 귀비. ”
“ ........... 강령하셨나이까. ”
“ 어디로 가는 것이오. ”
화연을 보는 청의 얼굴에는 화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청에게 대답하는 화연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 황자마마께 가던 길이었습니다, 폐하. ”
“ 어인 일로 말이오. ”
황제의 곁에 선 태진이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채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청이 화가 났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 어인 일로 내게는 오지 못하는 걸음이, 황자에게는 그리 쉽게 간단 말이오. ”
“ ........................... ”
“ 천천궁에서 몇 번이나 내가 찾는다는 기별이 갔을 터인데, 한 번을 오지 않더구려. ”
화연이 대답하지 않은 채 숙인 고개 사이로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화연의 감정을 감추었다.
“ ..............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간 몸이 좋지 않아, 황명에 응할 수 없었사옵니다. ”
거짓말이었다.
이를 모를 청도, 청이 속을 것이라 생각한 화연도 아니었다.
“ 그럼 오늘, 오늘 밤에 내 귀비에게 갈 것이오. 괜찮겠소. ”
동의를 구하는 듯 했지만 견고한 어조는 분명 명령이었다.
선명한 음성의 의지를 읽은 화연이 마지못해 입을 달싹였다.
붉은 입술이 내뱉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 황공하옵니다. ”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청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또 한 번 깨달은 화연이 속으로 고통을 씹었다.
기억을 잃은 후 제대로 화연이 황제를 마주한 처음이었다.
홀로 했던 상상보다, 낯선 공기는 훨씬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