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화연의 처소에 궁인들이 분주했다.
저마다 들고 있는 비단이며, 장신구가 화려하지만 소담함을 담았다.
화연의 미색과 성품의 조화를 절묘하게 담고 있었다.
‘ 그럼 오늘, 오늘 밤에 내 귀비에게 갈 것이오. 괜찮겠소. ’
궁인들이 분주한 이유는 하나였다.
청이 화연에게 건넨 말은 궁에서 큰 의미였다.
황제가 밤에 든다는 것, 예전 화연에겐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역시 마마께는 붉은 비단포가 제일입니다. ”
채연이 화연의 곁에서 말했다.
경박하지 않게 보이려 목소리를 눌렀지만, 감격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 예전에 폐하께서 좋아하시던 이 떨잠은 역시 오른쪽이 더 예쁘겠지요? ”
장신구들까지 살피며 채연이 입을 달싹였다.
지난 일주일, 황제가 귀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황궁 밖까지 파다했다.
그 후 궁인이며, 백성들이 마음대로 화연에 대해 떠드는 말은 험악했다.
그런데 황제가 다시 귀비의 처소에 든다고 한다.
뒷말들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일이었다.
“ ........................ 누가 보면 다시 혼례를 치르는 줄 알겠구나. ”
기대에 부푼 채연에게 화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느새 몸에 발라진 향유에서 은은한 꽃향이 났다.
황제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가 좋아하던 것들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 ........................... 푸른 노리개, 혹시 준비 되어 있느냐. ”
한참 말이 없던 화연이 말했다.
화연의 말에 채연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 물론이지요! 노리개를 그것으로 할까요? ”
“ ............. 그게 좋겠구나. ”
화연의 치장은 어느덧 끝을 달리고 있었다.
평소에 치장하는 걸 즐기는 화연은 아니었지만, 천청궁에서 극진히 예를 갖추라는 기별이 떨어진 탓이었다.
“ 여기 있습니다, 마마! 노리개요. ”
단정하게 비녀를 꽂은 머리 위 수수하지만 귀한 보석을 박은 떨잠이 화연의 미색을 돋보이게 했다.
그 아래 흰 피부에 오목조목 화려하게 박힌 이목구비는, 길 가던 이 누가 보아도 황제를 사로잡은 청국 최고의 미색이라 칭할 만 했다.
적빛을 담은 비단옷은 화연의 미색을 더 돋보이게 했다.
“ 그래, 고맙구나. ”
많은 장신구를 달지 않아서, 붉은 비단옷에 푸른 노리개가 돋보였다.
푸른 노리개에는 바다에서 나는 귀한 보석들이 정교하게 박혀 있었다.
“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
채연이 감탄했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화연이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꾸며 놓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했다.
누가 그녀가 전쟁터를 누비는 해국의 대장군이라는 걸 믿을까.
“ .......................... 혹시 천청궁에서 기별이 있었느냐. ”
“ 반 시진 뒤에 오신다고 하옵니다. ”
“ ............................. 그래. ”
화연이 소매 끝자락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상처투성이인 손이 면경에 비친 제 얼굴과 사뭇 거리감이 있었다.
“ 채연아, 잠시 쉬고 싶구나. 모두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련? ”
화연의 말에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는 궁인 모두가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 ............................................... ”
고요해진 방 안, 화연이 자신의 모습을 면경에 몇 번이고 비춰보았다.
한참이 지났을까.
흑요석을 담은 맑은 눈에 순식간에 투명한 물줄기가 차오르더니,
투둑,
붉은 비단옷에 추락했다.
“ 흐윽............ ”
화연이 입술을 깨문 채 울음을 삼켰다.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손이 애처롭게 떨었다.
청이 기억을 잃은 이후 처음으로 귀비의 처소에 들리는, 첫 날 밤, 그 직전.
아무도 모를 화연의 이야기였다.
* * *
“ 고하거라. ”
귀비의 궁 앞에 서, 청이 말했다.
푸른 용포는 평소의 것보다 화려했다. 치장에 힘을 다한 건 화연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높은 콧대에 선이 굵은 청의 얼굴이 달빛에 비춰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 마마, 황제 폐하 드셨나이다! ”
일주일,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화연의 위치가 불안해질까 걱정했던 상궁 하나가 큰 목소리로 화연에게 고했다.
“ .......................... 극진히 뫼시거라. ”
안에서 들려오는 화연의 목소리였다.
첫 번째 문이 열리고, 그 후로 몇 겹의 문이 더 열렸다.
촤르륵, 천청궁에서도 수도 없이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청이 그 사이를 걸으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 오셨나이까, 폐하. ”
일어선 화연이 예를 갖추었다.
청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더니, 상전으로 청을 안내했다.
여전히 화연의 시선은 바닥에 있었다.
“ 마마, 다과를 들일까요. ”
“ ........................... 그리하여라. ”
상궁의 말에 화연이 답했다. 앉은 청의 앞에 화연이 자리했다.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은 채 둘의 자세 모두 꼿꼿한 채 흐트러짐이 없었다.
밤을 밝히는 호롱불만 흔들렸다.
“ 아까 폐하께서 들여 주신 호국에서 진상된 다과와 술이옵니다. ”
상궁의 말에 화연이 청의 쪽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여전히 화연의 시선은 청을 향하지 않았다.
청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청이 말했다.
“ 듭시다. ”
화연이 손을 뻗어 잔에 술을 담았다.
먼저 청에게 잔을 올리더니, 자신의 것을 잡았다.
먼저 청이 잔을 비웠다. 그에 맞춰 화연이 입에 잔을 가져다 대려는데 덜컥 청이 말했다.
“ ........................ 그 술, 못 먹지 않으시오. ”
그 말에 화연이 놀라 청을 바라봤다. 놀라는 화연의 표정을 보며 청이 씁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 태진이가 알려주었소. 혹여나 귀비가 그 술을 마시려 들면, 속이 많이 상한 상태이니 잘 다독여 주라고 하더구려. ”
“ .......................... ”
“ 참 못난 지아비오. 그렇다면 술을 바꾸라 명하였어야 하는데, 그대가 그 술을 마시려 할 지, 아닐지, 그게 알고 싶더구려. ”
처음 마주친 시선이었다. 그 눈빛에서 마음을 읽은 화연이 다시 바닥을 보았다.
“ ........................ ”
화연이 대답하지 못 하고 있는데, 청이 화연의 손에서 잔을 뺏어갔다.
청이 그것을 마시더니 탁하고 소리 나게 상에 올렸다.
“ 후.........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느낌이 드는구려. ”
“ ....................... 송구하옵니다. ”
“ ................. 무엇이. ”
청의 말에 화연이 답했다.
“ ...................... 저 때문에 괜한 상념을 만들어 드리는 것 같아........ ”
“ 그렇게 말하는 이가 세 번이나 천청궁으로 걸음하라는 황제의 명을 모두 거절했소? ”
“ ............. 송구하옵니다. ”
화연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청이 화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짐 때문에 귀비가 수고가 많다고 들었소. 혹여나 안 좋은 소리가 들려도 괘념치 마시오. ”
“ .................. 아니옵니다, 폐하. ”
“ 지난 일주일 간, 많은 걸 살펴보았소. 책사에게 물어, 기억하지 못하는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소. ”
“ ................................. ”
“ ................ 귀비. ”
청의 말에 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청이 오기 전 울며 아픔을 토하던 화연은 없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화연이 청을 바라봤다.
“ .................. 미안하오. ”
청의 그 말에도 화연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마음을 굳건하게 먹은 덕분이었다.
청의 사과에 화연은 칼날이 찌르는 비수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 폐하. ”
“ ........... ”
화연은 이미 청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다시 혼인하듯 꾸미라 황명을 내린 것도, 자신조차 화려한 용포를 입고 직접 귀비의 처소에 행차한 것도, 모두 땅에 떨어진 화연의 입지를 올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 이러실 필요, 없사옵니다. ”
“ 무엇이. ”
화연의 말에 청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행동에 청의 눈에 노기가 담겼다.
화연이 천천히 붉은 비단 사이로 화려하게 자리한 푸른 노리개를 풀어냈다.
두 손으로 가지런히 노리개를 잡아 청에게 올렸다.
“ ........... 거두어주소서. ”
“ ............. 귀비. ”
푸른 노리개. 화려하게 박힌 바다의 보석들.
화연과의 기억이 없는 청도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 폐하의 총애로부터 있게 된 자리였습니다. 이제 그것이 없으니 폐하, ”
“ 귀비. ”
“ 저는 전쟁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이옵니다. 부디, ”
“ ..................... 귀비. ”
“ 귀비의 자리에서............... ”
화연이 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 저를 파하여 주소서. ”
“ 귀비! ”
화연이 그 날 밤 가장 오래, 그리고 진실 되게 청을 바라보며 애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