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마, 책사께서 오셨습니다. ”
“ 뫼시거라. ”
수에게 이야기를 듣고 짐작만으로 한 시진을 보낸 화연이었다.
태진이 들어오는 마지막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화연을 보필하던 채연이 화연의 앞에 갈색 발을 쳤다.
“ 오셨습니까, 책사 어른. ”
“ 갑자기 알현을 청하여 송구하옵니다, 귀비마마. ”
화연이 일어나 태진과 나란히 예를 갖췄다.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발이 화연을 가렸음에도, 태진과 화연이 서로를 대하는 예가 극진했다.
“ 우선 차와 다과부터 드시지요. ”
화연의 권유에 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향이 나는 모과차였다. 태진이 맛을 음미하더니 옅게 미소지었다.
“ 모과차를 내어 주신 것 보니 벌써 들으셨나봅니다. 제가 알현을 청한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
“ ……………………………… ”
“ 요즘 옆에서 폐하를 보필하다 보니 제가 과거에 잠기고는 합니다. ”
태진의 말에 화연은 대답이 없었다.
태진이 다시 한 모금 차를 마시며 말을 붙였다.
“ 어찌 이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귀비마마께서 이 차를 통해 소신의 시름을 덜어주셨습니다. ”
“ ………… 무슨 일입니까. ”
화연이 물었다. 태진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 소신은, 폐하께서 기억을 찾으시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생각합니다. ”
“ …………………………… ”
“ 하지만 소신이 도울 수 있는 영역은 정사에 국한됩니다. 그 이상을 말씀드려도, 한계가 있습니다. “
“ ……………………………… ”
“ 그래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접근을 도와드려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
“ ………….. 그래서 찾으신 게 그것입니까. 물 수제비라니요. ”
태진이 화연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를 갖추었던 화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화연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책사 어른, 저는 폐하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길 원하지 않습니다. ”
“ ………………… ”
“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성군이 되시는데 항상 발목을 잡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
“ ………………….. ”
“ 주작을 품은 황제. 무엇을 하셔도 이 말이 폐하의 명성을 깎아내립니다. ”
“ …………………… ”
“ 한 때는, 한 때는 그리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에, 폐하가 이루시는 만민평등의 정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구요. 주작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리 모두에게 보여주시기 위함도 있을 것이라구요. ”
“ .......................... ”
“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제 대신 활을 맞는 폐하의 모습을 보며 사라졌습니다. 세간의 소문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는, 폐하는 그러셨으면 안 됐습니다. 만 백성을 버리고, 어찌..... 제가 감히 그 분을 정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내로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결심했습니다. ”
“ ............................ ”
“ 저는, 더는 폐하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사라진 폐하의 기억 속에 스러져, 원래의 직분으로 돌아가 먼 곳에서 그저 충심을 다하고 싶습니다. ”
화연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화연에게는 내려진 갈색 발 넘어로 불투명하게 보이는 태진의 그림자가 모질었다.
보이지 않는 태진의 입술이 화연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지금 물 수제비를 하시지 못하십니다. 꼭 귀비마마를 처음 만나셨던 그 날처럼요. ”
“ ……………… 책사 어른. ”
“ 닷새 뒤 해연지에서 경합을 해주셔야 합니다. 폐하께 물 수제비 하는 방법까지 알려드리라 부탁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
“ 책사 어른! ”
화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굴하지 않고 자세를 꼿꼿하게 한 태진이었다.
“ 폐하께서는 기억을, 찾으셔야 합니다. ”
“ 대체 어찌 제게 이러시는 것입니까. 제가 귀비의 자리에 오를 때 누구보다 폐하께 저를 반대하셨던 분이 누구십니까! ”
솔직한 화연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서운한 일을 캐묻는 속 좁은 말이 아니었다.
태진이 모과차를 마셨다.
입에 가져다대는 액체 사이로 투영된 자신의 눈동자가 잔인했다.
내뱉을 말을 화연보다 먼저 알기 때문이었다.
“ 폐하께서는 기억을, 찾으셔야 합니다. ”
“ 책사 어른. ”
“ 그게 신하의 도리라고 소신은 믿사옵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건 연정뿐만이 아닐 터, 폐하께서 자신의 기억을 찾지 못하시면 잃어버리시는 게 너무 많습니다. 무려 십 년을 넘는 세월이 폐하의 안에 봉인 됐습니다. 그 기억을 찾는데 가장 중요하는 것은 기억을 찾고자 하는 폐하의 내면 속 의지일 터. ”
“ ………………… ”
“ 폐하의 속에 봉인 된 32살의 폐하께서, 잠긴 기억에서 뛰쳐나오려 한다면, 누구를 위함이겠습니까? 누가 가장 그리워 안간 힘을 쓰시면서 나오실 것 같습니까? ”
“ ………………………. ”
“ 송구하옵니다, 마마. 잔인한 것을 알지만, 제 답은 귀비마마뿐이었습니다. ”
태진이 자리를 고쳐잡아 극진히 절을 했다.
발 넘어로 보이는 그림자에 화연이 고뇌를 삼켰다.
이미 화연의 마음 속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황궁을 떠나야 한다.
사내 이 청이 아닌 청 황제는 기억이 사라졌어도 분명 다시 성군의 지위를 이어나갈 것이었다.
굳이 자신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명성에 짐이 됐던 자신이 사라진다면 더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책사 어른, 그래도 폐하께 저는- ”
“ 정 그러시다면, 황자마마를 위해 부탁드립니다. ”
“ 책사 어른...... ”
거절하려는 화연의 말을 자르고, 태진이 다급히 말했다.
승부수와 같은 말에 화연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 황자마마께서는, 폐하가 변을 당하신 것에 대해, 아시는 것이 없사옵니다. ”
“ 지금............... ”
“ 예, 마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소신, 황자마마께 폐하가 늘 커다란 태양이길 바라옵니다. 그 기초는, 황자마마와의 언약을 늘 이행하는 황제 폐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옵니다. ”
“ .............................. ”
“ 폐하께 명 황제께서 그러셨듯, 폐하가 황자마마께 성군으로서 따라가야 할 이정표로 보이길 원하옵니다. 아주 작은 경험일 뿐이지만, 황자마마께서 폐하와 함께하는 모든 경험에서 폐하를 동경하시길 바라옵니다. ”
“ ................................ ”
“ 부탁드립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태진의 말에 화연이 이마를 짚었다.
애초부터 태진은 화연이 이길 수 없는 패를 들고 있었다.
“ 제가 폐하를 이기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
“ 몸이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 기억하는 것보다 쉽게 돌아올 것입니다. ”
“ ........................... 저는 정말 책사 어른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
“ .......... 아마도 제가, 귀비마마와 폐하를 믿기 때문이겠지요. ”
화연이 소리가 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척, 태진이 첨언했다.
“ 폐하께서, 귀비마마를 물 수제비로 한 번 이겨보겠다고 얼마나 힘을 쓰셨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이기면 한 번 더 만나주겠다 그리 말씀하신 귀비마마를 이기려 참-, ......... 참으로 눈물 겨운 구애였습니다. ”
“ .................................. ”
“ 결국에는 해내셨지요. 마마를 이기고 참 아이 같이 기뻐하셨는데, 소신은 아직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
“ ............................................ ”
“ 사실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폐하의 그 얼굴이, 제가 귀비마마를 폐하께 반대했던 이유기도 했습니다. 아마, 선 황제께서도 마찬가지셨을 것입니다. ”
“ ..................................... ”
“ 귀비마마께서도, 그 자리에 오르기를 수없이 거절했던 이유셨을 것입니다. ”
얼굴을 가린 발 사이로 화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 참으로 시작부터 깊은 연정이었습니다. 위험했습니다. 결국 급박한 순간에 황제이기보다 사내이기를, 지아비이기를 택했던 폐하가, 저 또한 신하로서 깊이 원망스럽습니다. 대장군이신 귀비마마처럼요. 하지만, 마마. ”
“ ..................................... ”
“ 그래도 기억은 살려야 한다는 것이 소신의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
“ .......................... ”
“ 나와주시리라, 그리 믿사옵니다. 닷새 뒤, 해연지로 행차하시는 길, 해연지에서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
화연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 없는 모습을 보며 태진이 마지막으로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작은 잔에 담긴 모과차는 모두 사라졌다.
“ 그 때 내어드렸던 모과차를 기억해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
태진이 다시 한 번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발 너머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며 화연이 이마를 짚었다.
사연을 말하지 않고, 그저 태진의 것으로 하나 내오라 지시한 모과차였다.
하지만 부지런한 채연은 화연의 것까지 만들어왔다.
“ 후.... ”
깨끗이 비워진 태진의 잔과는 다르게, 화연의 잔에서는 여전히 강한 모과향이 아찔하게 퍼졌다.
화연이 손을 뻗어 잔을 움켜쥐었다.
미세한 움직임에도 액체의 표면이 파르르 떨렸다.
화연이 흔들리는 모과차 표면 위로 모습을 비춰보았다.
천천히 손목을 움직여 잔을 이리저리 흔들자, 자신을 비춘 액체가 출렁였다.
모과차의 표면 위로 누가 흘렸는지 모를 눈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떨어졌다.
톡- 톡-
액체 위로 내던져 지는 무언가와, 그로 인해서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것.
물의 파장.
그 속에서 몇 주간 지우려 애쓴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청과 화연의
...............................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