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뺨을 적셨다.
화연이 그 눈물을 바라보며 혼란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울어 준 청룡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 내가 그리는 해국에는, 그러한 자들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로부터 고통 받는 백성도 없어야 하오. 고하시오, 그 날의 이야기를. 해국에 다시는 그러한 슬픔이 없게 할 터이니. "
하지만 화연의 의심이 무색하도록 청의 목소리는 진정이었다.
대상을 향한 명백한 분노와 그로부터 고통 받은 화연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 ... 지금 그 말, 마마께서 흘리신 그 눈물에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
화연의 말에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맹세하겠소. "
화연이 눈을 돌려 강가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보았다.
무리지어 모인 그들이 별빛보다 영롱한 색을 냈다.
" 그 날은, 유난히 푸른 기운이 하늘을 가득 물들인 날이었습니다. "
오래된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됐다.
절대로 순간조차 잊을 수 없던 세월.
혼자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그 기억을 훑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 화연아, 일어나야 한다, 얼른! ”
화연의 어머니가 잠든 화연을 흔들어 깨웠다.
잡아 흔드는 손길이 얼마나 거센지 어린 화연의 팔에 자국이 날 정도였다.
“ 아, 아파 엄... 읍.. ”
놀란 화연이 큰 소리를 내려는데 어머니가 화연의 입을 막는 손이 더 빨랐다.
평소에 자신을 차분히 깨우던 어머니였기에 당황한 화연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자신을 깨운 어머니의 얼굴이 사색이었기 때문이었다.
“ 잘 들어, 화연아. 지금부터 소리를 내면 안 돼. 그리고 무조건 이 어미와 떨어지면 안 돼. ”
자신에게 조용히 말하는 얼굴이 송장 같았다.
표백한 듯 창백한 얼굴에 확장된 동공이 겁에 질려 있었다.
여전히 어머니의 손에 얼굴이 붙들린 채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한 순간에 달아났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방에서 나와 본 밤하늘이 푸른빛이었다.
빼곡하게 박힌 밤별들 사이로 은하수처럼 흐르는 청색.
“ 우와... ”
화연은 사연도 모르고 감탄을 뱉었다.
하지만 감탄이 탄성으로 바뀐 건 한 순간이었다.
“ 불길함을 부르는 악귀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
“ 악, 모르, 모르옵니다...! ”
푸른 기운이 숨을 죄어왔다.
그제야 화연의 귀에 킬킬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와 함께 청룡의 무리의 기운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중압감이 평소에 만 백성이 우러러보던 청룡들과 달랐다.
농밀하게 축적된 음습한 기운은 용보다 뱀에 가까웠다.
“ 이상하지 않느냐. 그 천것들이 흘려대는 음기가 청룡들의 절개를 흔들려 교태를 부리며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지는데. ”
“ 저는 정말 모, 모르옵니다.... ”
“ 지금 네가 청룡을 능멸하는 것이냐. ”
“ 아악! ”
청룡들의 목소리에는 오만이 흘렀다.
애초에 청룡들은 그 힘의 크기가 태생부터가 일반인들과 다른 존재였다.
전 국토에 일 할밖에 되지 않는 인구인 이 땅의 지배자들.
“ 엄마, 어디가는 거야...? ”
화연이 어머니를 따르며 물었다.
목소리를 낮추었음에도 어머니는 화연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 무서워... ”
하지만 화연은 아이였다.
대체 왜 이 밤에 어머니가 자신을 잡고 산 중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가 수상했다.
산짐승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연이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 어? 주작 냄새인데-? ”
밤공기는 차갑다 못해 살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고요 속 남자의 목소리가 지닌 오싹함에 비할 바가 못 됐다.
“ ................. 완전 근처인데 말이지- 어디 한 번 찾아볼까? 키킥. ”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 있는 게 틀림 없었다.
“ 화연아, 어서- ”
“ 어- 이쪽에 있는 거 같은데에-? ”
어머니가 화연을 안아드는데 뒤쪽에서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청룡의 무리였다.
* * *
“ 결국 그들은 어머니와 저를 발견했사옵니다. 그리고............. ”
화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소매 아래 감춰진 손이 덜덜 떨었다.
“ 예- 청룡들은 거짓이라 말하고 다니는 주작사냥, 그 주작사냥의 실체를 그 날 저는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희롱 당한 채로 돌아가셨고, 저는 어머니 말씀대로 무작정 산을 넘고 넘었습니다. 어머니가 쥐어준 노리개는 아버지와의 사연이 담긴 것이었죠. 그 노리개를 들고 아버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
“ .......................... ”
화연이 노리개가 잠들어 있을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제 아버지가 청룡이신 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청룡에게 당해 피눈물을 흘리며 왔는데 기댈 곳이 청룡이라니요. 처음에는 아버지를 보아도 벌벌 떨 정도로 청룡이 두려웠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로부터 자라고, 또 무예를 익혀 해국의 무관으로 일하며 수많은 청룡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만.................. ”
“ .......................... ”
“ 사실 여전히 가슴 한 켠에 그 날 어머니를 잃어 울던 아이가 살아있습니다. ”
“ .......................... ”
“ 그리하여 폐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
화연이 말을 마치며 청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청을 보며 화연의 얼굴은 체념으로 물들었다.
“ 말을 잇지 못하시는 걸 보니, 폐하 역시 이 말을 믿지 못하시겠...... ”
청의 반응을 보며 ‘역시나’하고 단념한 화연이 말을 잇던 때였다.
첨벙.
청의 뒤로 크게 물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물보라가 튀었다.
정체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노한 청룡이 거기 있었다.
청의 뒤로 든든하게 자리한 청룡은 용맹 그 자체였다.
분노를 느껴 꿈틀 거리는 근육 위로 촘촘히 박힌 비늘이 물에 젖어 반짝였다.
“ 내 그 노리개를 찾아주겠소. 잃어 버린 곳이 이 강이였지요. ”
화연을 보며 말하는 청의 눈과 목소리가 결연했다.
“ 어찌 황족이 청룡의 힘을 이리도 사사로이 쓰시려는....... ”
“ 그 기억을 안고 살면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웃어본 적이 있소. ”
자신의 말에 반박하려는 화연의 말을 청이 끊었다. 한없는 진정이 담긴 얼굴이었다.
백성을 섬기는 진정한 황제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화연은 청의 말에 울컥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웃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 혈육인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다.
“ 어찌 이것이 사사롭다고 할 수 있겠소. ”
“ 마마. ”
“ 절대로 사사로운 일이 아니오. ”
화연에게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청이 말했다.
“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해국의 주인이오. 이 나라 만백성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란 말이오. ”
“ ...................... 마마. ”
자신을 바라보는 화연에게 한 걸음 씩 청이 다가갔다. 굳건한 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순간이었다.
“ 백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백성을 지킬.... 아악! ”
화연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며 말을 잇던 청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빠른 속도로 날아 온 무언가 때문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청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그저 균형만 잃었으면 좋았으련만 휘청거린 몸이 화연을 껴안버렸다.
“ 어어, 미, 미안하오! 악! ”
품에 와락 안은 화연에게 미안해 청이 또 허둥지둥했다.
손을 휘적거리던 몸이 결국 완전히 균형을 잃어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 아, 으........ ”
청이 신음을 토했다. 동시에 머리 위에 앉은 무언가를 느꼈다.
짹짹.
놀란 청의 속도 모르고 지저귀는 참새 한 마리가 청의 머리 위에 앉았다.
“ 아, 아니 그게... ”
“ .............. 풋. ”
“ 아오... 부끄럽소. ”
“ 하, 하하 ”
부끄러워 변명하려는 청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화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계산하고 어림하는 것이 아닌, 순수히 청을 보며 웃는 얼굴이었다.
“ 성군이 되셔서 만 백성을 지키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마. 하하. ”
“ 아니 그게- ”
활짝 웃으며 화연이 청에게 손을 뻗었다.
“ 확실히 미물이 따르는 걸 봐선 자질이 있으십니다. ”
내뻗어진 손에는 무관답게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손을 바라본 청은 세상 제일의 섬섬옥수가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
내밀어진 손을 한 번, 화연의 웃는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보는 청이었다.
“ 일어나십시오, 바닥이 찹니다. ”
웃음을 따라 화연의 입꼬리가 상향선을 그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청은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 어, 고, 고맙소. ”
심장박동을 숨기며 청이 화연의 손을 잡았다.
화연의 손을 잡는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걸 청은 느꼈다.
달아오른 귀는 차마 숨기지 못할 마음의 시작이었다.
“ 어, 찾았나보오-! ”
그 날 천기의 흐름이 좋았던 것일까.
알맞은 때에 청의 청룡이 물 위로 떠올랐다.
용맹스럽게 솟은 청룡의 비늘에 노리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 그대의 것이 맞소. ”
“ 맞... 맞사옵니다! ”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노리개. 화연의 어머니가 비극의 날에 건넨 유품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연의 발걸음에 청룡이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비늘을 건들이지 않게 조심하며 화연이 노리개를 손에 쥐었다.
“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황자마마의 은혜를 충심으로 갚을 것입니다. ”
화연이 노리개를 손에 꼭 쥐며 몇 번이고 청과 청룡에게 인사했다.
움직임을 따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뒤늦은 바람에 흩날렸다.
그림과 같은 장면에 청은 온 몸의 혈관이 팽창하는 아찔함을 느꼈다.
“ 부디, 염원하시는 성군이 되시옵소서. 부족하지만 소신 또한 그 길을 지켜드리기 위해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
화연이 말하며 청 앞에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볼 수 없어진 화연의 얼굴에 청은 애가 탔다.
심장의 박동, 붉어지는 귓불, 계속 보고자 하는 이상한 마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라도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청은 그것을 깨달으며 화연을 보았다.
“ 그대에게 무엄하다고 농을 하며 말하려 했던 것을 다시 말해도 괜찮겠소? ”
“ ................ 마마. ”
“ 나를 보며 들어주시겠소? ”
연정, 그 깊은 마음을 깨달으며 청의 음성에는 화연을 향한 더 깊은 예우가 담겼다.
“ 처음이었소. 나에게 백성들의 삶을 알려주고, 나를 꾸짖어주는 사람. 그런데 내 어찌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겠소. 이제는 내 결심까지 굳건히 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니 더더욱 나는 말을 놓을 수가 없겠소. 그런데 자꾸 말을 놓으라 하니 나는 그게 야속하게 느껴졌소. ”
“ .............................. ”
“ .... 이거. ”
청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뜻밖의 물건에 화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청의 손에 들린 물건은 푸르디 푸른 노리개였다.
청룡의 증표. 연정의 맹세.
“ 어려서부터 성군을 꿈꾸며 품었던 노리개요. 방금 내가 그대에게 했던 모든 말을, 여기에 걸고 맹세하겠소. 꼭 그대의 바람대로 성군이 되겠소. ”
“ ....................... 마마. ”
“ 내 이 말을 잊거든, 그대가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그저... 태워버리시오. ”
“ .............................. ”
“ 아마도 그럴 일은 없겠소만. ”
청이 건넨 노리개를 받지 못하는 화연이었다.
적어도 해국에서 그 노리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 어찌 이것을.............. ”
“ 어서 받아주시오. 내 이 상황에 황자의 명이라고 말하기도 우습지 않겠소. ”
“ ............... 마마. ”
계속 청의 손이 허공에 맺혀있는 걸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화연이 그것을 받지 못한 채 망설이며 물었다.
“ 마마, 혹여나 하여 여쭙는 것인데 청룡의 증표를 이리 건네시는 연유가........ ”
“ 연정을 품은 정인에게 주는 것이라 배웠소. ”
“ 마마. ”
“ 그래서 그리 하려는 것이오. ”
“ ..................... ”
“ 만난 거 같으니. ”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청이 화연의 손에 노리개를 들려주었다.
어쩌다 쥐게 된 노리개의 촉감이 생경한 화연이었다.
“ 흠흠, 시각이 늦었으니 어서 돌아갑시다. ”
화연이 쥔 자신의 노리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청이 뒤돌았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던 것이었지만 달아오른 귀는 숨길 수가 없었다.
“ 어서 갑시다아- ”
게다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하는 게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사내였다.
그 뒷모습을 따르는 화연이 몇 번이고 노리개를 내려다 보았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파란 노리개를 따라 화연의 마음도 이상하게 두근, 두근. 서투른 움직임을 시작했다.
바야흐로 첫 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