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린에게 뷰티아카데미 다니는 게 허무히 탄로났다.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혼자 다니는게 심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니기 싫증나면 친구랑 놀기 위해서라도 학원에 나오겠지 싶어 그녀는 긍정적으로 여겼다. 학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린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와, 와! 여기 대학교 같다. 피부미용과, 스타일리스트과, 네일아트과, 헤어디자인과, 메이크업과...야, 다 내가 좋아하는 거 잖아?"
"그랬냐?"
"그럼, 오, 연예인 사진도 있네? 이거 배우면 아이돌도 만날 수 있는 거야? 와, 대박!"
"만나기만 하겠냐? 얼굴 가까이 가서 만질 수도 있지."
콜럼버스의 신대륙이라도 보여준 것처럼 시아는 어깨가 한껏 올라간 채 득의양양해졌다. 본인도 이제 두 번째 출석했을 뿐인데.
"진짜? 꺅! 강리훈도 있어."
"나도 그거 보고 완전 놀랐다니까. 얼굴도 만지고 머리카락도 빗어주고 옷도 입혀주고...아, 좋다."
어느 새 시아의 뺨에도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옷도 입혀줘? 그럼 막 속옷도 보고 그러나? 야, 웬일이야..."
"아, 몰라...뭐, 그러지 않겠냐? 바쁘고 그러면 흐흐흐."
"나 여기 완전 잘 온 것 같아. 야, 니네 반은 어디냐?"
그렇게 넋을 잃고 따라오는 린을 데리고 시아는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그때 메이크업 반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시아를 보고 아는 척 했다.
"아, 니가 유시아니?"
애쉬 그레이 칼라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하고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눈은 크고 동그랬고 코는 작았지만 오똑했다. 입술은 오동통하고 윤이 났다.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모였다. 그 순간 시아는 기가 눌렸다. 그녀가 기가 세보였던 아니나, 시아는 예쁜 여자 앞에 서면 살짝 열등감을 느끼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어른이 아닌데 어른인 척 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킨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있었다.
"네? 저요?"
"응, 헤어반이지? 앞으로 메이크업도 할 거 잖아? 오늘 우리반 인원이 홀수라 메이크업 파트너가 한 사람 부족한데 수업 들어가기 전에 한번 받아주면 안 될까?"
사실 시간이 많이 남기도 했다. 그녀는 메이크업반 강사였던 것이다.
"아, 난 여기 반 선생님이야. 장로사 선생님."
아니, 별로 그렇게 나이 차이도 많이 날 것 같지 않은데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붙이는 게 좀 띠껍긴 했지만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일 거 같으니 일단 숙이기로 했다. 그리고 교실 안을 둘러봤다. 다들 서로의 파트너에게 메이크업을 해주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아말고 빼고...잠깐 망설이는 중에 린이 치고 나왔다.
"어, 선생님, 제가 받아도 될까요?"
"어? 넌, 누구..."
"저 오늘부터 여기 학원 다닐 거에요."
"아, 진짜?"
시아는 린을 한 번 쳐다봤다. 이 친구가 이렇게 빠른 기동력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처럼 지각하는 지각대장에, 준비물이며 숙제도 가장 늦게 내는 아이였고, 수업 시간에는 늘 쿨쿨 자기 때문에 애칭이 ‘오스트레일리아 나무 늘보’인 아이다. 오스트레일라는 단지 호주에서 어릴 때 살다 왔기 때문에 붙여진 나름의 학명이었다.
"네, 지금 가서 등록할게요."
분명 린은 아말고가 혼자 핸드폰을 하고 있는 걸 본 것이다. 시아는 속으로 잘 됐네를 외치며 돌아섰다. 그리고 접수 하러가는 린을 따라갔다. 그녀가 엄마 카드를 꺼내 6개월치를 긁고 교실로 돌아서는 그 순간, 그녀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 나 학원 옮겼어. 어? 맞아, 미용학원이야. 아니, 나중에 이 길을 갈 수도 있...괜찮을 것 같...나 하고 싶..."
린은 통화에서 어떤 문장도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엄마 목소리는 학원 천장까지 울릴 듯 했다. 아마 들리진 않았지만 쌍욕도 하는 것 같았다. 린은 용기를 내 열심히 반박하려했으나 그녀의 엄마는 당장 이곳에 찾아와 문이라도 부쉴 기세였다. 시아는 마치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로 친구를 끌고 온 기분이었다. 통화를 마친 후 린은 완전 풀이 죽은 얼굴로 시아를 쳐다봤다.
"엄마가...허락을 안 해. 오늘은 일단 안 되겠어. 일단 설득 좀 해봐야..."
"그래, 니네 엄마 화나면 무섭잖아. 잘 설득해봐."
"지금 집으로 안 가면 여기 찾아와서 불이라도 지를 기세야. 미용이 어때서 그래? 나, 참...완전 짜증 나."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거지. 그래도 넌 얼마 전에 상까지 받았었으니까..."
이 말은 자존심에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같이 나간 대회에서 시아는 빈 손이었지만 가린이는 동상을 받아왔다.
"우리 엄마도 니네 엄마처럼 쿨했으면 좋겠다."
"뭐, 나도...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어. 완전 쫄았었다고..."
"아, 저 사람 이름이라도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두고 봐. 나 여기 다시 온다. 아윌 비 백!"
"저 사람 이름은...아니다. 니가 직접 물어볼 수 있는 기회로 남겨두마."
"이름도 알아?"
"주워 들었어."
"암튼 오늘은 가지만 다시 올 거야. 내 왕자님을 사수하러."
시아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저런 인간더러 왕자라니, 세상 왕자 다 죽었지. 니가 아직 대화를 안 해봐서...’
로사 선생님이 다시 데스크로 나왔다.
"그럼 가린이 가서 받을까?"
"아, 죄송해요. 저희 엄마 좀 보고 다음에 올게요."
"그, 그래? 어, 알았어. 다음에 보자."
그렇게 린은 미련을 가득 안고 학원 문 밖을 나섰다. 결국 혼자 남은 시아는 누가 봐도 당첨이었다.
"그럼 시아가 하완씨 파트너 해줄 거지?"
"네? 아, 네..."
처음 보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정도로 그녀가 바닥은 아니었다. 고삐 잡힌 소처럼 시아는 메이크업반으로 그렇게 끌려들어갔다.
"자, 시아는 이 의자에 앉아."
로사가 지정해주는 대로 그녀가 하완의 앞에 앉자 그 역시 놀라 쳐다봤다.
"어? 너냐?"
"아, 묻지 말고 빨랑 해요."
로사는 뒤를 돌아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웨딩 메이크업 들어갈게요. 자, 하완씨 시작하세요."
"네, 로사 샘."
하완은 로사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헐...대박 친절하시네. 지도 남자라고 예쁜 여자 앞이라 끼부리는 것 좀 보래? 그래, 잘 어울린다. 니네.’
속으로 그렇게 비웃으며 시아는 하완의 앞에 마주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런데...그가 붓을 들고 손을 올리는 순간 향기가 났다. 그의 손이 이마 가까이에 와서 그림자를 만드는데 그 향기가 더 강하게 풍겼다.
"로션? 샤워 코롱? 향수? 그것도 아니면 섬유유연제?"
그게 이 남자에 대한 최초의 궁금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