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씨하고 시아는 어디 간 거죠? 왜 둘 다 아직까지 안 들어오고 있는 건가요?"
"글쎄요. 시아는 아까 엘리베이터 타고 집에 가는 것 같던데요? 김하완은...변비가 심한가보죠."
"시아가 집에 갔다고요?"
"네, 가방까지 들고 있던데요? 막 급하게 뛰어가던데..."
"그냥 가버리다니...그래도 집에 간다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나가서 걱정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다시 수업을 시작한 로사는 파랑의 보고를 그대로 믿었다. 파랑이 학원을 빠져나가는 시아를 목격한 건 사실이었다.
지잉...지잉.
하완이 벗어놓은 겉옷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전화기도 놓고 나갔네?"
"어지간히 급했나보죠."
그리고 이내 아무 일 없었던 양 수업을 시작하는 로사였다.
***
시아가 문을 잠그고 달아난 후 30분째 옥상으로 올라오는 이는 없었다. 연신 문을 두들였지만 반응이 없었다. 밤은 깊어가고 찬 바람이 얇은 셔츠 속을 파고들자 하완은 오한이 들었다.
"으...춥다...왜 아무도 안 올라오는 거냐...이 건물은 관리 아저씨도 없는 거야? 유시아...너 걸렸담 봐...너, 살인방조죄까지 뒤집어 씌울 거야. 여기서 내가 심장마비라도 생겨서 죽으면 넌 살인자라구...으...추워..."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말없는 충견처럼 흰둥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옆에 파랑의 바이크도 있었다. 아직 저 녀석이 이 건물에 있단 소리였다. 힘껏 아래층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잘도 만들어진 이중창은 번번히 그의 목소리를 팅팅 튕겨냈다. 물론 그 녀석이 하완의 애닮픈 외침을 듣는다해도 응답해줄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스파이더맨, 배트맨, 슈퍼맨, 마블...그 어떤 것이라도 될 수만 있다면 이 벽을 타고 내려가서 따뜻한 흰둥이 품에 안길 텐데...아, 형아가 미안하다. 이렇게 여기서 안타까운 청춘이 끝나는구나...부디. 할부도 안 끝났지만 좋은 주인 만나서..."
그렇게 유언을 남기며 쭈구리고 앉아 최후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러고 웅크린 채 또 30분이 지났을 즈음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벌컥 옥상문이 열렸다.
"와!"
하완이 벌떡 일어나 좀비처럼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누가 문을 잠궈...으악, 깜짝이야!"
"아, 왜 이제 왔어?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뭐야? 아, 뜨거! 너, 왜 여기 있냐?"
"이씨, 말하자면 길어."
마침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던 그는 깜짝 놀라 불을 놓칠 뻔 했다.
"오, 불, 불...아, 따뜻해. 아, 이 학원은 무슨 너구리굴이냐? 애고 어른이고 죄다 흡연자야?"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호모 에렉투스처럼 하완이 라이터 불 앞으로 파고 들었다. 꾀죄죄한 몰골인 그였다. 명품 셔츠도 그저 몸을 가리기 위한 천조각처럼 보였다.
"너 담배 안 핀다며?"
"좀전부터 다시 피우기로 했어."
"쳇..."
"야, 너 설마 여기 갇혀있었냐?"
"이게 다 유시아 때문이야. 걔 지금 밑에 있어?"
"아니, 예전에 날랐지. 아...너 걔한테 당한 거냐? 푸핫, 대박! 완전 재밌다."
하완은 그의 입을 손으로 다급히 막았다.
"너, 어디 가서 이 얘기 하지마라."
"헐, 야, 너 지금 나 협박하냐? 나 니 생명의 은인이야. 너, 오늘 나 아녔음 여기서 꼬박 밤 새웠을 수도 있어. 몰라?"
"암튼...하고 다니지 말라고..."
"허, 참...나도 어디 가서 밉상 소리 좀 듣고 사는데 너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뭐?"
"어우, 야, 너 사람 치겠다?"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하완을 보고 파랑은 멈칫했다. 독기가 꽤 오른 눈빛이었다. 여기서 깐족임을 멈춰야 옥체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파랑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이 바닥 질이 떨어진단 얘기가 맞구나. 학력도 낮고 어중이 떠중이 고등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것들이란..."
"뭐어? 너 지금 뭐랬냐?"
중얼거리는 하완의 소리를 들은 파랑은 순간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반응했다. 그대로 하완의 아구창을 가격했다.
"아!"
제대로 들어간 한 방에 하완은 뒤로 나자빠졌다.
"야, 너는 뭔데? 너는 얼마나 고급져서 여기 기웃거리는 건데? 너도 여기 온 이상 같은 부류 아냐? 외제차 몰고 다니면 미용사 아니야? 아티스트 아니냐고? 넌, 뭐 신의 손이냐? 수료하면 바로 원장급이야? 너도 자격증 따면 허드렛일 하는 말단 종업원부터 시작하는 거야. 왜, 니네 부모님이 샵이라도 차려준다던? 그럼 바로 누가 기능장으로 인정해준다던?"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하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생각보다 아픈걸? 야, 나도 응급실에서 조폭한테 총알받이로 몇 번 맞아봤거든?"
"응급실?"
"쳇, 틀린 말도 아니네. 휴우...그래, 그러는 너는 뭐냐?"
"나? 니가 말한 대로 고등교육도 안 받은 딴따라다!"
"딴따라? 무명가수? 연습생? 아님, 백댄서냐?"
"그래, 어쩔래?"
"넌 왜 이거 하냐? 목표도 있으면서? 이 시간에 춤연습이나 하지."
"목표? 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으려면 돈도 있어야하니까. 못 될 걸 대비해서 서브잡도 있어야하고...이 길에 대해 니가 뭘 아냐?"
"어, 맞아. 몰라."
"쳇...잘난 척 혼자 다하더니."
몸싸움은 어느새 대화로 바뀌었다.
"에, 에취! 아...오늘 참 다사다난하네. 계속 피려던 거 펴라. 난 하산한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하완은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파랑이 흙먼지 잔뜩 묻은 그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야...반격이 없어. 더 재수 없네. 마치 지가 이긴 것 같잖아. 아, 기분 더러워. 뭔가 통쾌하지 않아. 찜찜해."
하완은 혼자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면서 맞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래...다른 길을 선택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하는 거지. 쳇, 김하완! 아직 학교에 미련이 남은 거냐? 젠장...엄마 말이 맞네요. 깨지고 부셔지고 조각이 나고...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한 말...근데 어쩌죠? 나 맞았는데도 되게 통쾌한데? 신고식한 기분이야. 후련해. 하긴, 제정신이면 못 한다고 했지. 미쳐야 할 수 있다고 한 거 맞네, 맞아. 크흐...나 변태인갑다."
허탈하게 웃으며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는 하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