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업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시아는 하완의 눈치를 설설 봐가며 헤어반으로 들어갔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칸막이 건너로 다른 반 수업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린은 하완 옆에 바짝 앉아 결국 그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대감과 설레임이 잔뜩 묻어있었다.
"가린...어이구...아주 갔네, 갔어. 저런 사기꾼이 뭐가 잘 생겼다고 홀딱 빠져가지고는..."
그렇게 시아가 옆반을 계속 곁눈질하는 걸 헤어반선생님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유시아, 넌 눈이 이어포인트에 달려있니? 앞에 안 봐?"
"네? 아, 네..."
"왜? 그 반에 누구 잘 생긴 애라도 들어왔어? 지금 우리반에 남자 없다고 집중 못 하는 거야?"
"아, 무슨 소리세요..."
"무슨 소리긴? 니가 지금 저 반 남자애 뒷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녀의 볼멘소리에 다른 애들은 키킥거렸다. 오해 받기 싫어 다시 마네킹 머리카락을 연신 잡아당기며 롯드를 말고 있는데 자꾸 생각은 저쪽으로 빠졌다.
‘쳇, 뭐가 잘 생겼다고 다들 난리야? 린이는 그렇다쳐도 이 선생님은 또 뭔 소리래? 진짜 얼굴을 보고 한 얘기인가? 하긴 선생님들끼리도 대화는 하니까 아말고 얘기도 나왔겠지. 이 학원에 남자래봐야 아말고랑 또 한 남자 뿐이니까.’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건너편 교실을 훔쳐봤다. 린이는 화장을 받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되는데 말똥말똥하게 뜨고는 열심히 아말고와 눈빛을 교환했다. 볼에는 그린 홍조가 아닌 자연 홍조가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듯 했다. 어느덧 입술을 바르는 순간이 다가오자 삐죽삐죽 거리며 오므렸다 폈다 아주 난리를 부렸다. 스스로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라도 되고 싶은 걸까. 아주 하는 짓이 요망했다. 순간 화가 났다. 저런 사기꾼한테 팔려 있는 한심한 친구에 대한 분노였다. 시아에게 분노의 이유는 분명 그래야했다.
"저게 아주 꼴값을 떨어요. 남자랑 뽀뽀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나..."
그때 예상했던 대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유시아! 집중 안 해!"
"네? 네, 아니, 제 친구가 저기서 이상한 짓을 해서요."
"이상한 짓? 뭐? 내가 보기엔 다들 열심히 잘 하고 있구만. 너만 딴 짓 하고 있잖아! 니가 제일 이상해."
"아, 그게 아닌데..."
"너 오늘 벌이야. 니가 시간 내에 와인딩 다 못 했으니까 오늘 여기 교실 다 쓸고 쳥소해놓고 가. 알았어? 곧 있으면 바로 시험이구만...등록한지 얼마나 됐다고 딴 짓이야. 초반에는 다들 긴장해서라도 집중해서 하는데 넌, 참..."
"진짠데..."
그렇게 시아는 초장부터 산만한 아이로 찍히고 청소까지 당첨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후 그녀는 혼자 남아 비질을 했다. 먼지에 뭉쳐진 머리카락 한 무더기가 발밑을 돌아다녔다. 재채기가 나왔다.
"에이취! 아, 니들이나 나나 발 밑에서 구르는 천한 신세로구나."
청소를 마치고 교실문을 닫고 나오는데, 어두컴컴해진 복도에서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게 보였다. 이미 바깥은 어두워졌고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퇴근 준비중이었다.
"아, 나 아직 집에 안 갔는데 왜 불은 다 꺼놨데 무섭게스리...난 학생도 아닌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남자였다. 왠지 께름칙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없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아, 씨...그냥 엘리베이터 타고 갈 걸 그랬나?’
초조한 마음에 속도로 높여 잰걸음으로 내려가는데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우다닥 치마자락을 휘날리며 날다시피 내려가는 중, 뒤에서 갑자기 그녀의 가방 고리를 잡는 손에 그녀는 소리를 꽥 지르며 주저 앉았다.
"악! 사람 살려!"
"아, 놀라라! 너 조용히 안 해?"
그는 하완이었다.
"아 ,뭐에요? 왜 따라오는데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도 만만치 않게 놀랐거든? 왜 갑자기 뛰어내려가는데?"
"아니, 내 마음이죠!"
"야, 나도 두고 온 게 있어서 왔다가 니가 뛰어내려가는 바람에 놀라서 뛰어내려왔거든? 뒤에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줄 알고..."
"귀신이요? 나, 참...귀신이 뭐가 무서워요? 사람이 무서운 거지?"
"난 귀신이 더 무섭거든? 난 어두운데 혼자 있는 거 끔찍히 싫어하는 사람이야."
"헐...나이가 몇 갠데...아, 나도 할 말 있어요. 낮에 그쪽이 했던 말 생각해보니 내가 완전 억울한 거더라고요.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누구에요? 누가 먼저 입 맞췄는데요? 엉덩이 얘기로 수치감 줬는데요? 아, 고등학생 허리는 왜 껴안는 데요? 미성년자 성희롱은 그, 뭐냐...친고죄? 나도 검색 좀 했거든요? 바로 구속이래요!"
"뭐? 야, 그건...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너 자살할까봐 끌어안은 거지."
"자살? 헐...그리고 난 증거는 없지만 증인은 있어요. 그...남자분이 뽀뽀하는 거 봤잖아요."
"누구? 새파랑? 야, 걔가 참도 정직한 증인이 되시겠다. 내가 걜 좀 아는데..."
"벌써 둘이 친구된 거에요?"
"아, 암튼...됐고, 그렇게 나오면 너가 내 팔뚝 깨문거 이것도 전치 2주는 뽑는다. 그럼 대략 총 310만원은 내야할 거야."
"헐..."
"언제까지 낼 거야?"
"내기 싫은 데요?"
"쳇, 너...그리고 성희롱이랬냐? 자꾸 성희롱, 성희롱 하는데, 진짜 성희롱이 뭔지 보여줘?
그때 그가 시아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더니 그녀를 벽으로 붙였다. 시아는 식겁해 아무 말도 못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사이에 두고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완이 서서히 둘의 공간을 좁혀왔다. 타이머등이 꺼진 비상계단에는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새어들었다. 체취 섞인 그만의 자두 냄새가 점점 더 강하게 풍겨왔다. 한 여름밤 과수원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310만원 안 낼꺼면 난 뭐라도 받아야지. 그래야 내가 손실이 없지 않겠어?"
그렇게 그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까이 들어왔다. 그가 내쉬는 날숨이 그녀의 인중에 닿았다. 온기에도 소름이 돋을 수 있다는 걸 시아는 처음 알았다. 슈퍼문이 눈 앞에 바짝 다가온 듯 버겁고 신비스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