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2년 후
행복은 짧았다. 다연이 열두 살 때 어머니 연향이 갑작스럽게 죽고, 이번에는 속신시켜준 대감마저 돌아가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감의 아들들 주현과 주윤 두 형제가 입신양명하여 가장노릇을 한다는 거였다.
오늘밤 다연은 이 집에서 도망칠 계획이다. 다연은 바쁘게 짐을 챙기다 어머니의 유품인 해금을 매만졌다.
증거는 없지만 어머니의 죽음이 마님과 연관이 있다는 심증은 있었다. 윤씨 부인은 연향이 죽자마자 쓰던 문갑이며 패물이며 몽땅 처분했다. 그리고 대감마저 돌아가시자 기다렸다는 듯 혼사를 추진했다. 도망가고 싶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속신시킨 관비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어디 늙은 양반의 첩실이 되거나 관기로 끌려갈 팔자였다.
다연은 해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장남 주현이 다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해 두었다.”
“……도련님.”
“새어머니 때문에 콩알 네가 고생이 많았지.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널 짐짝 치우듯 혼례를 치루려 하다니.”
“제 나이 열여덟입니다. 혼사가 이상한 것은 아니지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콩알. 이젠 내가 가장이다. 새어머니 등쌀에 널 이 집에 둘 수는 없지만, 실컷 너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면서 살아라. 돈 모아서 청국에 갈 거라며?”
“네, 청에 가려구요. ……정말, 고맙습니다. 도련님.”
주현은 전낭을 다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은빛 달이 둘을 고요히 비췄다.
“이것이…….”
“얼마 안 되지만 요긴하게 쓰일게야. 칠복이 한테 일러두었으니 사찰까지 잘 안내해 줄 것이다. 거기 주지스님과도 말해놓았고.”
“도련님.”
“어서 가. 이 집안에 있으면 새어머니한테 화만 당한다. 무슨 일 있으면 칠복이 통해서 연락하고. 건강해라 콩알.”
어느새 방에서 나온 차남 주윤이 싱긋 웃었다. 다연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올리고 칠복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등에 맨 봇짐에는 그간 홍대감에게 받은 그림이 있었다. 흘러내리는 화구통을 치켜 올리며 다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대감이 속신해주었단 사실도 철이 들고서야 알았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도 철이 들면서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대감이 돌아가실 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감께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는다면 집안에 이익이 되는 혼사를 치러야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이 걸려서 결코 마님의 뜻대로 살아주긴 싫었다. 거기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었다. 그림만이 다연을 살게 하는 목표였다.
“아가씨. 말을 꼬박 하루는 달려야 도착합니다요. 괜찮으시겠습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런. 실례했습니다요. 도련님.”
다연은 칠복이 마을 어귀에 준비해둔 말에 올라탔다. 칠복이도 준비해둔 말에 올라타자 둘은 힘차게 내달렸다.
“이랴!”
달밤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다연은 고삐를 세게 움켜잡았다. 뺨을 스치는 바람결에 어머니의 임종만이 떠올랐다. 어머니 연향이 죽자 여종들이 갑작스럽게 많이 바뀌었다. 윤씨 부인이 맘에 안 든다며 바꿨지만 안채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다연은 칠복을 따라 도망가면서 반드시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낼 것을 하늘에 맹세했다.
윤씨 부인은 다연이 도망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곧 있을 혼례를 손꼽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갑분아 있느냐!”
“네, 마님.”
“별채로 가 그년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살펴봐라. 그년 성깔에 괜한 허튼짓을 할까 걱정이구나.”
“네, 마님.”
갑분이 명을 받고 별채로 건너갔다. 이미 별채는 텅빈 채였다. 갑분이 놀라 윤씨에게 고하자 펄쩍 뛰었다.
“뭐? 도망? 네 이년!”
윤씨의 고함이 들려오자 장남 주현이 안채로 건너왔다. 주현과 눈이 마주친 윤씨는 차갑게 흘겼다.
“혼사가 코앞인데!”
“그 혼사 무를 것입니다.”
“감히 이 어미의 뜻을 반대하는 겁니까? 그 아이도 혼사를 치룰 나이가 되었습니다. 규방일은 사내가 나설 것이 못됩니다!”
“나 홍주현이 이 집안의 가장입니다!”
주현의 일갈에 윤씨 부인은 팩하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연은 밤새 말을 몰아 산속에 있는 사찰에 도착했다. 사찰 밖에는 이미 인상 좋은 주지승이 누군가를 배웅하고 있었다. 다연과 비슷한 나이의 사내는 다연을 슬쩍 쳐다보더니 산을 내려갔다. 다연 또한 사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주지는 다연을 환하게 맞이했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방은 잘 치워두었습니다. 원하시는 때가 온다면 언제든 산을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주는 것이 다연은 좋았다.
“감사합니다.”
“아가, 도, 도련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요. 절 찾아야할 일이 계시면 여기 있는 효원동자승께 말씀하십시오. 저랑 연락이 통할 겁니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몸 건강히 계십시오.”
칠복이 인사를 하고 산을 내려가자 다연은 주지승이 소개해준 방안에 짐을 풀었다. 제대로 챙겨온 것이라곤 그림과 화구 그리고 어머니의 해금뿐이었다.
“후우…….”
다연은 주현이 챙겨준 전낭을 살폈다. 당장 얼마동안 버틸 돈 밖에는 되질 않았다. 청나라에 갈 비용까지 차마 대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돈을 벌어야했다. 가진 재주라곤 그림밖에 없다. 다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안채에서 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방안 가득 여기저기 그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결국 화공이네. 제대로 실력만 있는 화공만 구한다면 은광 찾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텐데…….”
방안에는 동양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역의 그림들도 심심찮게 깔려있었다. 동래(부산)에 부분적으로 개항을 한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조선은 많이 바뀌었다. 양인들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고 그들과 부분적이지만 교역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채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 이게 정말 조선에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한 자들의 작품 전부인 것이야?”
“아가씨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에휴…….”
채경은 송상의 거두 한홍윤의 딸이었다. 송상 내에서도 그림 감별능력은 채경이 최고였다. 지금의 조선은 사대부들만이 아니라 돈만 있음 양반도 되기 때문에 중인들마저 그림 사모으기에 열풍이었다. 대부분이 감별할 눈은 없는 자들이라 위작을 집 한 채 살 돈 내고 사는 일이 허다했다. 채경은 이 그림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그림은 사치품이었다. 단순 사치품이 아니라 집이나 땅같이 사두면 계속 돈이 오를 수 있는 상품이기도 했다.
돈만 번다면 아비인 한홍윤은 채경이 무엇을 하든 반대하지 않는다. 혼인을 안 해도 상관없었다. 그림 판매업은 채경의 꿈이었다.
“9년 전 잠깐 나돌던 그 그림 주인 아직도 못 찾았어?”
“낙관도 없는 그림 아닙니까? 상단 사람들 다 풀었어도 지금껏 못 찾는 사람입니다. 그런 옛날 사람 찾아야 할 정도면 아가씨 얌전히 혼사 치루는 것이 빠를 겁니다.”
너무 옳은 말이다. 질릴 정도로 사실이라서 채경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곱게 빗어진 머리카락들이 흐트러졌다.
“안되겠다.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지! 율! 따라와!”
채경은 푸른 장옷을 챙겨들었다. 이 더운 여름날 장옷을 뒤집어쓰는 건 죽을 만큼 싫었지만 여인은 장옷 없이는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되는 곳이 조선이다.
효원 동자승이 다연의 방에 아침상을 들고 왔다.
“사찰이라 음식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연은 고개를 절래 흔들며 감사하다고 답했다. 그때 문을 열고 주지승이 들어왔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연향이를 많이 닮았구만. 모친 일은 안타까울 뿐일세.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뜰 줄이야.”
“제 어머니를 아십니까?”
주지는 효원을 내보내고 단 둘이 있게 되자 입을 열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갓 돌 지난 자네를 데리고 사찰에 온 게 마지막이었지. 무척 불안해했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가 첩으로 살면서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는지. 안방마님의 노여움을 살까 불안해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 자네의 앞일 때문에 늘 걱정이 많았기에 내가 감초 달인 물을 즐겨 마시면 그나마 편안해 질 거라고 일러줬었지.”
감초 향이 항시 어머니 곁에서 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종종 홍대감이 찾아왔었는데, 그치도 안됐구먼. 내 자네 사정이야 익히 들었네. 준비가 되면 언제든 이곳을 내려가시게.”
“……스님.”
“청나라로 갈 생각이라고 들었네만. 어디든 이 조선보다야 낫겠지 않겠나.”
주지는 다연에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다연은 꾸벅 인사하며 예를 갖췄다. 동자승이 가져온 아침상을 한참 바라보다 결심했는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저자에 나온 채경은 율의 호위 속에 걷고 있었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인데도 장옷을 쓰고 온몸을 구속하는 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장옷을 쓰니 시야가 좁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안 쓸 수도 없다. 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도성 육의전 거리가 맞기는 한 거야?”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어느 지전이든 화방이든 제대로 된 화공의 그림 한 점 없는 게 말이 돼?”
“아가씨께서 지금까지 찝어 둔 화공들이 많지 않습니까?”
채경은 율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들만으론 부족하다는 거지. 그들은 내가 생각해낸 전시회라는 것을 할 정도가 아니야. 책가도(冊架圖)나 그려서 대량 판매하는 것이 알맞은 정도지.”
“그렇습니까?”
툴툴대며 걷던 채경은 고개를 팩 돌렸다. 이름 없는 화방에 걸린 화조도(花鳥圖)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 필법.”
“눈이 높으십니다. 아가씨.”
낙관도 제대로 없는 그림이었지만 그림실력은 졸렬하지 않았다. 아니, 9년 전 갑작스레 나타났다 사라진 그림과 같은 화풍이었다.
“이, 이 그림 누구 거야!”
채경은 급한 마음에 장옷마저 던져버리고 화조도 앞에 코를 박듯 들고 살펴보았다. 지체 높은 반가의 여식이 장옷도 던져버리고 백주대낮에 소리를 질러대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흘겨보았다. 하지만 채경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살폈다. 힘 있고 섬세한 필법. 마치 꽃의 향기가 진짜 느껴질 법한 그림이었다.
“하아, 그것이 저도 잘 모르옵니다.”
“아니, 주인장이 모르는 게 말이 돼? 당신이 그러고도 장사치야?”
“낙관도 없는 걸 제가 무슨 수로 압니까요?”
“낙관이 없어도 그림 갖다 준 화공이 있을 거 아니야.”
주인은 답답한지 가슴을 막 치면서 소리쳤다.
“갖다 준 이가 벙어리라서 말도 못하고 까막눈이라 글도 못쓰고 무슨 수로 알아냅니까요!”
벙어리라는 말에 채경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흐르던 땀들도 싹 식었다. 채경은 말없이 장옷을 챙겨 다시 뒤집어썼다. 숨이 헉 막혀왔다.
“이 그림 얼마 하는가?”
“주인도 제대로 없는데 값을 비싸게 부를 수도 없지요. 닷냥만 주십시오.”
“뭐, 뭐 닷냥? 주인도 없다면서?”
“제가 주인이죠.”
어이가 없었지만 저자거리 장사치에게 상도나 양심 같은 걸 따지는 것도 우스웠다.
“알았네. 율.”
옆에 서있던 율이 닷냥을 주자 주인은 화조도 족자를 잘 말아 묶어 율에게 내밀었다.
“가자!”
“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