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연이 사찰에서 머문 지도 보름이 지났다. 처음엔 무엇으로 돈을 벌까 하다가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판 돈을 모으고 있었다. 남장을 한 채 다연은 안료를 사러 산을 내려왔다.
“도유, 왔는가. 저번에 그려준 그림 인기가 아주 많아. 오늘도 그림 갖구 오셨나?”
다연이 그림을 파는 화방 주인이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안료가 떨어져서 왔습니다.”
“어떤 놈이 필요하신가?”
“우선 아교랑 호분(胡粉)…….”
주인은 호분을 보여주며 말했다.
“굵은 놈, 고운 놈? 어떤 놈으루 드릴까나?”
“둘 다 챙겨주십시오.”
“큭큭큭, 그림에 호분이 빠져서야 되겠나. 넉넉히 담아드리겠구만. 이놈 말고 더 필요한 것 없으시구?”
“네.”
“도합 1전만 주시게.”
다연은 주섬주섬 전낭을 풀어 셈을 치렀다. 셈을 치루니 전낭이 텅 비었다. 이래서야 돈을 벌 수가 없었다. 이름난 고관대작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주문받아 8첩 병풍이라도 팔아야 돈을 모을까 했다.
물건을 받아든 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앞 전시용으로 걸린 자기 그림을 보았다. 홍보역할로 걸어둔 그림인데 전혀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인맥이 없으니 고관대작의 그림을 그릴 수조차 없었다. 부랴부랴 대충 지은 낙관 도유(到裕)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다연은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도유라. 처음 보는 아호(雅號)네. 이 사람 그림 잘 팔리나?”
뒤에서 낯선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연은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애체를 낀 젊은 사내였다. 보랏빛 답호와 넓은 갓이 잘 어울리는 풍채였다.
“이 그림은 파는 게 아니지요. 손님. 혹시 도유의 그림 사시려구 하시우? 필요한 그림 있으면 주문 넣어드리리다.”
“아니, 난 그림보다 그린 도유를 보고 싶네만. 연락할 길이 없겠는가?”
사내의 말에 주인장은 어색한 눈빛으로 다연을 바라봤다. 다연의 눈치를 보다 싱긋 웃었다.
“저 젊은 총각이 도유이죠.”
사내와 다연의 눈이 마주쳤다. 애체 너머 보이는 눈빛은 예리했다. 다연이 침을 꼴깍 삼켰다.
“호오……. 시간 좀 있으신가? 도유.”
“무, 무슨 일이십니까?”
“그림쟁이에게 할 말은 무슨. 그림 얘기지.”
애체를 중지로 치켜 올리며 싱긋 웃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제법 시각이 지났음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애체 낀 수상한 사내를 따라 내외술집이 즐비한 도성 밖으로 나왔다.
“사람 많은 곳에서 할 얘기가 아니니 이해해주시오.”
“네…….”
규모가 작은 내외술집이라 방에 앉자 주인이 문을 빼꼼이 열고 상을 내밀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틈으로 애체 낀 사내가 상을 받았다. 주인이 문을 닫자 좁은 방에 단 둘만 있게 됐다.
“내 소개를 제대로 못했네. 다시 말하지 나는 박성규라고 하오. 난 지금 내 밑에서 그림 그려줄 사람이 필요하오.”
“무슨 그림말입니까?”
다연은 무슨 그림 의뢰기에 사람 이목을 피해 내외술집까지 와서 말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성규는 비릿하게 웃으며 술을 따라 한잔 들이켰다.
“술 맛은 고급 기생집 못지않은 게 내외술집 매력이지.”
“제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렵지 않아. 모사 몇 번 해주면 되네.”
“모사라니!”
모사라는 말에 다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놓고 위작을 그려달라고 하는 소리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형편도 어려운 것 같고, 무슨 이유인지 도화서 생도도 되지 못하는 것 같고. 잠깐 몇 장 그려주면 몇 백, 몇 천 냥은 쓸어 담을 수 있는데. 왜 화를 내시나. 도유.”
“당신 말대로 그림 팔아 버는 족족 종이와 안료 사는데 들이부으니, 밑 빠진 독에 물붓기요. 그렇지만 그림쟁이 자존심마저 흘려보낸 건 아니요!”
“하하하하. 자존심. 그깟 자존심. 꼴에 양반이라도 되시나? 그 자존심 지키는 양반 놈 되는 게 지금 조선에서 제일 쉬운 거 모르나? 돈만 있으면 공명첩사서 다 양반이지. 즉, 돈이면 뭐든 살 수 있다는 소리지.”
다연은 성규를 노려봤다. 모욕당해 화가 났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청나라로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질 않는가. 그깟 돈만 있다면 속신도 공명첩도 뭐든 할 수 있었다.
“일을 해준다면 계약금으로 삼백 냥 선금으로 주고, 물건 받으면 나머지 잔금 치루는 것으로 하지.”
삼백 냥이란 말에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렸다. 그것은 박성규는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깟 돈에 자존심 팔지 않는다 했습니다.”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 그 화방주인에게 박성규를 찾으시게.”
다연은 문을 발칵 열고 나갔다.
사찰로 돌아온 다연은 빈 전낭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방금 전 만난 박성규란 자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삼백 냥이라.”
눈이 휘둥그레 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연에게는 큰돈이었다. 대감이 주었던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
“兄雖責我(형수책아)나 敢抗怒(막감항노)하고 弟雖有過(제수유과)나 須勿聲責(수물성책)하라.”
또랑또랑한 사내아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홍대감은 기분 좋은지 웃고 있었다.
“뜻풀이는 다연이가 해보아라.”
“형이 비록 나를 꾸짖더라도 감히 항거하고 성내지 말고 아우가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모름지기 큰소리로 꾸짖지 말라.”
홍대감은 다연이 천첩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남녀차별 없이 글을 가르쳤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조선 땅에서 홍대감의 이런 교육방침은 파격적이었다.
“잘했구나.”
칭찬에 다연이는 싱글벙글 웃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는 지금까지 배운 거 시험을 볼 것이니 다들 잘 준비하여라.”
홍대감이 자리를 벗어나자 장남 홍주현은 다연이에게 쪼로록 다가갔다.
“잘하던데 콩알.”
“도련님!”
“형님은 또 다연이 괴롭히는 겁니까?”
차남 주윤의 말에 주현은 딱밤을 때렸다. ‘딱’ 하는 소리가 나자 주윤은 형을 노려봤다.
“누가 보면 내가 콩알 괴롭히는 줄 알겠다. 칭찬한 거거든?”
“그럼 왜 콩알이라고 하십니까?”
“콩알처럼 쪼꼬만하니까 그렇지. 완전 콩알 만해. 이 볼 말캉말캉하고.”
다연의 하얀 볼을 찹쌀떡인양 신기한 듯 꼬집었다.
“아아! 도, 도련님!”
다연은 소리를 지르며 양쪽 볼을 쪼물딱 거리는 주현을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그만하세요. 이러다 또 다연이 울리면 아버지께 혼납니다.”
“쳇, 말캉말캉해서 재밌는데…….”
아직 어려서라고 하기엔 전혀 신분의 허물이 느껴지지 않는 셋이었다. 볼이 벌개진 다연은 조그만 손으로 아팠는지 문질렀다. 작은 입술은 심통이 났는지 삐죽 나왔다.
다연은 붓을 쥐고는 하얀 종이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현은 다연이 그리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림 그리냐? 누가 계집애 아니랄까봐.”
“형님, 그래도 완전 똑같아요. 저기 벚꽃나무랑요.”
사랑채 건너 보이는 벚나무에는 연분홍빛 벚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그리고 다연이 그리는 하얀 종이에도 똑같이 피어있었다. 다연은 꼬집힌 볼이 아픈 것도 잊고 환하게 웃으며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
***
“그리고 얼마 후 속신 시켜주셨지……. 그것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었는데.”
대감께서 주신 그림을 쓰다듬으며 다연은 눈물을 삼켰다. 청으로 가고 싶은 만큼, 어머니의 죽음도 밝혀내야했다. 하지만 지금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방 한 켠에 세워둔 해금을 바라보았다.
연향은 한양 제일 해금을 잘 켜는 예기(藝妓)였다. 그런 연향 밑에서 자란 다연의 해금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조심스럽게 해금을 잡아 다연은 천천히 활을 켜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헤집는 수많은 일들이 사라져갔다.
사찰에 때 아닌 해금 소리가 들리자 주지와 차를 나누던 사내가 물었다.
“웬 해금 소리입니까?”
“귀한 손님이 계시지.”
더는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차를 마시는 주지를 보자 사내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지난 번 주신 송진은 잘 썼습니다.”
“이제 그것도 마지막이지. ……자네는 여전히 업을 쌓고 계신가?”
업이라는 말에 사내는 입술을 뾰로통하니 내밀었다.
“그게 업이라면 계속 쌓아야지요. 이 나라 조선이, 성리학이 내게 해준 게 뭐란 말입니까?”
“……민찬아.”
“잘난 양반님네들이야 성리학이니 유학이니 하고 있는 거지만, 저 같은 일개 민초야 사정이 다르지요. 스님, 제 사정이야 뻔히 다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게 다 세상 탓이라고 하는 건 여전하구만.”
민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지는 그러든 말든 차를 마시기 바빴다.
“차라리 저 해금의 주인이 제 마음을 알아줄 듯하군요. 한동안 찾아 뵐일 없을 듯 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민찬은 해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귀한 손님이라니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용무가 생각난 그는 서둘러 사찰을 내려갔다.
한창 해금을 켤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상입니다.”
효원 동자승의 말에 다연은 방문을 열었다. 그때 멀리 황급히 사찰을 빠져나가는 사내가 보였다. 그 뒷모습이 처음 이곳에 온 날 봤던 사내 같았다.
상을 내려놓고 나가는 동자승을 붙잡았다.
“방금 바삐 내려가신 분은 누구신지 아십니까?”
“……주지스님의 손님이십니다.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다연은 저녁상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박성규가 말했던 삼백 냥이 귓가에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위작이라.’
다연은 처음으로 위작을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은 처음으로 저자 구경을 했던 날이기도 했다.
막금이와 함께 처음으로 저자에 나온 다연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포목점의 알록달록한 비단이나 방물점의 칠보장식이 다연의 시선을 훔쳤다.
“유모, 완전 예뻐.”
고운 노리개 앞에서 다연은 시선을 뺏겼다. 막금은 답답한 듯 다연을 흘깃 보았다.
“아가씨. 그냥 구경한다고 해서 모시고 나온 겁니다.”
“알아. 그냥 보는 건데 뭐 어때.”
노리개에 시선을 때지 못하던 다연은 막금이 억지로 끌고 가자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호객하는 소리부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막금이 이끄는 대로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 한곳에 발걸음이 멈췄다. 사랑채에서도 안채에서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이 쭉 걸려 있었다. 다연은 막금의 손을 놓친지도 모른 채 그림 구경이었다.
“꼬마아가씨. 뭘 그리 보시우? 아가씨가 어려서 그림을 볼 줄이야 아시우?”
샌님 같이 생긴 남자가 가게 안에서 나와 다연이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흐음……. 아저씨, 이거 왕시민의 그림 같긴 한데 너무 조잡하지 않아요? 설마 이거 파는 건 아니죠? 차라리 나는 이 산수화가 좋아요. 하지만 나보단 못 그리는데.”
어린아이 주제 그림을 평가하듯 말하고 있으니 주인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시뻘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