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위작
1화
“하, 꼬마아가씨가 어려서 그러는데 감히 어따대고 위작이라고 말하고 있어? 너 같은 게 뭘 안다고. 어디서 왕시민이라는 이름 하나 듣고서는……. 그리고 니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낙서겠지. 썩 집에나 가.”
“우리 집에 왕시민 그림이 몇 갠대! 아저씨야말로 그림 하나 볼 줄 모르면서 그림을 팔아요?”
“이 꼬맹이가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재수 없게!”
주인과 다연이는 실랑이를 벌였다. 저자에 나온 사람들이 전부 둘만 바라보았다. 쪼꼬만 어린 계집애와 싸움구경 난게 다들 신기한 눈치였다. 주인은 남의 장사 다 말아먹은 다연이 괘씸해 가게 앞에서 쫓아냈다.
“썩 집에 가거라!”
“당신 뭐하는 거예요!”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또 쇤네 속 뒤집어지는 거 보시려고 작정했습니까? 갑자기 사라지셔서 온 저잣거리 다 뒤졌습니다! 그리고 당신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버럭버럭 소리치는 거요?”
“어느 귀한 집 아가씨인지 그딴 거 난 모르오! 귀한 집 아가씨면 남의 집 물건 함부로 평해도 되는 것이오? 덕분에 우리 가게 평판만 나빠졌다고! 아줌마, 이게 내가 얼마주고 구한 그림인데 재수 없게 가짜라고 해대니 속이 안 뒤집히겠어? 어?”
막금은 샌님 같은 주인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림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대제학 문형의 하나뿐인 따님인데 위아래도 모르는 사내가 괘씸했다.
“아가씨가 가짜라고 했으면 가짜요! 아가씨는 세 살에 천자문을 다 때고 여섯 살 때 왕시민인지 왕신민인지 하는 사람 작품을 한번보고 똑같이 그린 분이오! 그림 장사할거면 그 정도는 당신도 그릴 수 있겠지? 설마 못 그리시오? 그리고말야, 이분이 어떤 분인데! 대제학 대감의 하나 뿐은 따님이오! 이 샌님 같은 아저씨야! 어따 대고 아줌마래!”
주인은 대재학 딸이라는 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주변 싸움구경하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조선 실세 중의 실세 홍석주 대감을 모르면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은 사색이 돼서 바들바들 떨었다.
“소인이 몰라 뵙고…… 송구 합니다요.”
“당신, 오늘 죽다 살은 줄 아시오. 아가씨 이제 갑시다!”
“아저씨 이 그림 누구한테서 구하신건지 모르겠지만, 돈 돌려달라고 하세요.”
다연은 싱긋 웃으면 막금을 바라보았다. 막금은 다연을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얼굴이 새카맣게 어두웠다.
“아.가.씨. 집에 가서 봅시다. 쇤네가 오늘은 쉽게 안 봐드릴 겁니다. 제가 손 꼭 잡으라고 했었죠? 네?”
막금은 다연의 손을 억세게 붙잡고 집으로 향했다. 다연은 막금의 눈치를 보면서 자꾸만 뒤돌아 화방(畵房)을 계속 바라봤다. 그 부드럽고 힘찬 산수화가 눈에 아른거렸다.
별채로 돌아온 다연은 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빛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저자에서 있었던 사건을 막금이 고해버린 것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종아리 걷어라!”
“한 번만 봐주세요. 한 번만요. 어머니!”
“걷으라고 했다!”
연향은 단호하게 내질렀다. 다연은 울상을 지으며 치맛단을 걷어 올렸다. 하얗고 가는 종아리가 보였다.
“후우.”
한숨을 짧게 내쉬던 연향은 회초리를 휘둘렀다. 다연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종아리가 불 붙은 듯 화끈거렸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막금이 걱정시킨 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잘난 재주 하나 믿고 짧은 세치 혀 놀린 게 두 번째 잘못이다. 세 번째 잘못은…….”
“흑.”
종아리에 시뻘건 줄이 쫙쫙 가고 나서야 회초리가 멈췄다.
“그림 잘 그리기 전에 주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알아야 사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쭉 볼을 타고 흘렀다. 연향은 말없이 다연을 품에 안아주었다.
다연은 성규의 제안이 선뜻 내키지 않았는지 고개를 세차게 젓고 수저를 들었다.
한편, 닷냥을 주고 산 그림을 뚫어지게 채경은 바라보았다. 낙관도 무엇도 없는 그림이다. 쉽게 주인을 찾을 것 같지 않았다.
“율, 그 가게에 사람을 붙여. 농아가 또 오면 뒤를 밟아서 그림 주인을 찾아봐.”
“네, 아가씨.”
다시 봐도 그림 속 꽃과 새가 생동감이 넘쳤다. 그때 방문을 열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붉은 머리가 너풀너풀 대고 초록빛 눈이 빛나는 양인(洋人)이었다.
“홍연아.”
“아가씨, 그림 왔습니다.”
홍연은 문밖에 세워둔 그림을 들고 왔다. 밖에는 이미 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달빛에 빛나는 그림은 조선의 것이 아니었다.
“책으로만 보다 직접 보니 신기하네. 이것이 유화(油畵)라는 거군. 두께감이 저마다 다르네.”
“구하기 무지 힘들었습니다.”
“수고했어. 홍연아. 아버님에게도 고맙다고 전해드려.”
“이제 저 한동안 쉬어도 되겠죠?”
채경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자매 같은 홍연은, 조선이 개항하고 얼마 안 돼 영국인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왔다. 송상의 거두 한홍윤 밑에 서역과의 교류, 통역을 맡고 있는 게 홍연의 아버지였다.
“그래, 한동안 이곳에 있어. 삼복더위에 힘들었을 텐데……. 율, 술 좀 내와. 오랜만에 홍연이랑 마시게.”
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술잔이 비었다. 사내는 술상을 밀어두고 화구통에서 종이를 꺼냈다.
“나리, 오늘도 술값대신 그림입니까?”
“뭐, 어떠냐. 청월이도 좋다하는데. 네가 뭔 걱정이냐. 아니면, 네 몸에 그려줄까?”
“나리도 참! ……낙관도 없는 그림이 제값이야 하겠습니까?”
“심심풀이 낙서에 낙관은 무슨. 낙관은 네 입술에 찍어 줄 테니 거문고나 뜯어보아라.”
조문우의 말에 기생 설향은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맑은 가락소리가 들리자 문우는 붓을 들었다. 하얀 화폭 위에 먹이 지나갔다. 갈필(渴筆), 윤필(潤筆)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 움직였다. 힘 있는 필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느새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문고 가락이 절정이 치달을 무렵 화폭에도 소나무도 거의 완성되어 갔다. 소나무의 잎을 표현하는 것을 끝으로 붓을 내려놓자 거문고의 연주도 끝이 났다.
“이정도면 술값으론 족하지.”
낙관도 찍지 않은 그림을 바닥에 내버려 두고 짐을 챙겨 그는 일어났다.
“나리.”
“잘 놀았다. 제법 거문고가 늘었구나. 그리고 니가 걱정하던 낙관.”
문우는 재빠르게 설향의 붉은 입술을 탐했다. 갑작스럽게 당한 설향이 놀라 버둥댔다. 문우는 씩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명월관 마당에는 청월이 서있었다. 청월은 명월관 행수답게 눈빛부터 다른 기생과 달랐다.
“가십니까? 나리.”
“잘 놀다 가네. 약속한대로 그림은 그려두었네.”
“제대로 마음먹고 그리시면 지금보다 더 잘하실 수 있는 분께서, 한낱 낙서라 하시니 이 년은 너무 아깝습니다.”
“놀이는 놀이일 뿐.”
조문우는 청월을 지나쳐 명월관을 나섰다. 청월은 사라져가는 그를 보며 인사를 올렸다. 달빛이 명월관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다연은 마음을 정했는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안료도 바닥이 나 이것이 마지막 그림이었다. 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손가락을 빨게 될 것이다.
“계십니까?”
효원 동자승의 목소리에 다연은 붓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서찰입니다.”
“누구에게서?”
“집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연은 서찰을 받았다.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홍주현이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다연은 치가 떨려 거칠게 서찰을 내던졌다.
- 지금 생각해본다면 네 어머니의 죽음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구나. 오늘 아버지가 쓰신 일기를 보니 아버지께서도 이상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그러나 증좌가 없다고 하시며 너를 불쌍히 여기셨다. 심증이라면 새어머니가 범인이겠지만 확실치 않다.
콩알, 다만 이것을 전하는 이유는 너에겐 염치없지만, 그래도 길러준 어머니니 성정이 그런 분이시더라도 효(孝)를 다하는 것이 유학자의 도리 아니겠느냐. 모든 것이 명명백백 드러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너를 더 도와주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그리 되시고 우리 집안은 정쟁에서 물러나 많이 어렵구나. 너는 강한 아이니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간간히 칠복이 통해 안부 전해주거라.-
도망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가 기대고 있었다. 그림 실력하나면 돈을 긁어모을 줄 알았다. 그건 세상물정 모르는 규방 아가씨나 할법한 생각이었다는 걸 다연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런 사람도 길러준 어미라 효(孝)를 다해야한다면, 그런 성리학 따위 없는 곳으로 가주겠어. 그깟 모사 하면 되잖아!”
산을 내려온 다연은 익숙하게 화방을 찾았다.
“어이쿠,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가?”
“……박성규란 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박성규라는 말에 주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시게.”
다연은 주인이 안내해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다. 다연은 조심히 한쪽에 앉았다. 주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부랴부랴 차를 내왔다.
“이, 이거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시게. 금방…… 박가 놈 올 터이니. 밖에 석삼이 있느냐?”
“네, 주인어르신.”
주인의 부름에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박성규를 불러오라는 심부름을 들은 석삼은 재빠르게 가게 밖으로 나갔다. 다연은 주인이 준 싸구려 녹차를 마시며 기다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가게 안으로 파란 답호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마음이 바뀌었는가? 만 하루도 되기 전이라니.”
“비꼬시는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도유, 자네가 일할 곳을 소개해주도록 하지. 따라오시게.”
성규는 가게를 나갔다. 다연은 성규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퍼런 답호자락을 흩날리며 성규는 빠르게 길을 걸었다.
성규를 따라 도착한곳은 주막 마굿간이었다. 말 두필이 나란히 묶여 있었다.
“말 정도야 탈 줄 아시겠지?”
“네.”
“그럼 가세.”
위작공장을 도성 안에 만들 수야 없었는지 성규는 도성 밖으로 말을 몰았다. 다연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바짝 쫓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이를 악물었다. 한참은 더 달려 산중턱까지 오자 성규가 멈췄다.
“오느라 고생했네. 여기일세.”
그가 가리킨 곳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몰래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여기 산 입구 쪽에도 우리 건물이 있네. 자세한 건 차차 알게 될 것이네. 우선 들어오시게.”
“네.”
다연은 성규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암자는 생각보다 넓고 컸다. 산을 거의 깎다 시피하여 만들어진 규모였다. 깊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견고해졌다. 성규를 보자 다들 깍듯이 인사했지만 처음 보는 다연의 모습에 경계심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