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여기가 자네가 쓸 작업실이지.”
암자 가장 깊은 곳이자 제일 좋은 가옥이었다. 성규가 문을 열어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 안에는 다양한 종이와 붓 등을 비롯하여 어디다 쓰는지 모를 물건들도 잔뜩 있었다.
“당신 누구야?”
“네? 아, 저…….”
“영규야, 버릇없기는. 화공이시다.”
“아, 당신이 새로 그림그릴 화공이십니까? 완전 호리호리하게 생겼네. 계집 여럿 울리게 생겼네.”
“어허! 이 아이는 영규라고 하네. 작업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은 대부분 이아이가 제작하고 있지. 지금 오자마자 당장 부탁할 일은 이 그림일세.”
박성규가 가리킨 곳에는 다연의 눈을 의심케 할 그림이 있었다.
“이, 이것은?”
“역시 높은 안목. 공현의 그림이지.”
“이 적묵법. 쉽게 따라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이네. 말한 대로 선금 300냥. 나머지 잔금 1000냥. 어떠한가?”
1000냥이라면 기왓집 99칸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었다. 다연은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위작을 제대로 그려본 적은 없겠지. 작업방식은 영규가 잘 설명해 줄 테니 그리 아시게. 복남아 갖고 오거라!”
성규의 부름에 나무상자를 들고 사내가 나타났다. 성규는 나무상자를 다연의 손에 들려주었다.
“300냥일세.”
다연은 상자를 열어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더니 영규란 어린 소년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위작은 처음이십니까?”
“네.”
“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저런 산수화는 기본 모사입니다. 똑같은 종이에 똑같은 먹과 붓으로 똑같은 화풍으로 그리면 아무도 몰라보는 가짜가 되는 거죠.”
“하아?”
영규는 신이 난 얼굴로 종이 꾸러미를 들고 왔다.
“저 그림은 명나라 말쯤 만들어진 종이입니다. 이것과 같은 시기의 종이는 저희가 보관한 것중 이만큼 있고. 저 먹도 보유 중이죠.”
한쪽 벽 찬장에는 먹이 종류별로 즐비했다.
“뭐니뭐니 해도 화공님 실력이죠. 얼마나 똑같이 모사가 가능하냐입니다만……. 뭐, 종이도 많은데 시험 삼아 해볼까요?”
영규는 씩 웃으며 원본 그림과 같은 크기의 종이를 펼쳤다. 원본은 왼쪽에 두고 먹과 붓을 준비했다.
“한 번 그려 보시죠. 화공님.”
시험당하는 기분이었지만 다연은 말없이 붓을 집어 들었다. 공현의 산수화는 적묵법이 핵심이다. 다연은 준비해준 회색빛이 도는 옅은 담묵(淡墨)을 붓에 묻혔다. 먹으로 그리는 그림은 채색화와 달리 일필휘지로 그려나가야 했다. 종이 가득 들어오는 산맥들을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지켜보던 영규의 표정이 진지했다.
옅은 회색빛의 먹물로 산봉우리들을 그려나갔다.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짙은 먹으로 다시 위에 덧칠했다. 고고하게 서있는 나무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먹을 계속 겹쳐 칠하자 층층이 쌓인 먹이 중후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그것이 적묵법의 묘미이기도 했다.
“우와.”
다연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게 느껴졌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몇 시간째 그리고 있는지 몰랐다. 붓을 눕혀서 점을 찍어가며 산을 표현하자 영규의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 이거 쌀처럼 점찍는다 해서 미점(米點)이라고 하는 거 맞죠! 이렇게 거침없이 찍는 화공님은 처음 보네.”
“시끄러워요.”
“죄, 죄송합니다.”
다연은 산을 미점준으로 표현하고 나서 붓을 내려놓았다. 굽어진 허리를 겨우 일으키자 으드득 소리가 났다. 다연은 인상을 잔뜩 쓴 채 영규를 노려봤다.
“이만하면 합격점이신가요?”
영규가 입을 열려할 때 뒤에서 박성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군.”
다연은 고개를 돌려 올려봤다. 애체를 낀 사내는 기쁜 듯이 씩 웃고 있었다.
“정말 훌륭해. 도유. 약속한 잔금은 영규 통해서 보내주지. 화공께 처소를 안내하여라. 민찬이에게 소개 시켜주고.”
“네, 어르신. 가시죠. 화공님.”
다연은 영규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 찬 밤바람이 불어왔다. 영규가 민찬의 처소로 다연을 데려갔다.
“도련님, 새로오신 화공님입니다.”
“그래?”
처소 문이 벌컥 열리고 민찬이 나타났다. 민찬은 지난 밤 사찰에서 얼핏 본 사람이 서있자 짧은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다연도 마찬가지였다.
“아! 당신은…….”
한편, 율은 채경의 명에 며칠째 화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벙어리는커녕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허탕일 것 같았지만 아침부터 화랑을 지켜보았다. 그때 화랑으로 어느 사내가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내밀자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전낭에서 돈을 꺼내더니 사내에게 쥐어주었다. 사내는 말없이 받아 화랑을 나갔다.
율은 재빨리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그 사람이지? 말 못한다는 사람.”
“네네, 맞죠.”
율은 화랑을 뒤로 한 채 재빨리 쫓아갔다. 사내는 저자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율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한 번 재빠르게 달려갔다. 벙어리라 귀도 안 들릴 테니 소리쳐봤자 소용이 없었다.
“헉헉, 아우 씨! 뭔 걸음이 저렇게 빨라.”
율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겨우 따라잡아 조심히 뒤를 밟았다. 사내의 뒤를 밟는 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단지 거렁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내의 보폭은 무인(武人)을 닮아있었다. 사내는 골목을 꺾어 들어가고 있었다. 율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뒤를 밟았다.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조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율의 목에 순식간에 단검을 갖다 대었다. 율은 조심스럽게 허리에 찬 장검에 손을 댔다.
“왜 뒤를 밟지?”
“…….”
율은 사내를 바라봤다. 벙어리라고 하는 건 순 연기였나. 무엇을 위해 위장한 것인가.
“그림의 주인이 궁금하였을 뿐.”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 이상 말해 줄 수는 없다. 호기심 따위 접어라.”
“…….”
사내는 단검을 치우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율은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허리춤에 찬 장검을 쥔 채 다시 골목을 바라봤을 땐 사내는 없었다.
“젠장.”
골목 안에 눈에 제일 띄는 것이라곤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었다. 율은 골목에서 나오는 아낙네를 붙잡아 말을 걸었다.
“저 집은 누구 댁이오?”
“모르시오? 조광백 대감댁이잖소.”
“조광백.”
율은 싸늘하게 대문을 노려보았다.
위작공장에 온지 사흘이 넘은 다연은 차츰 적응하고 있었다. 영규가 소개해준 김민찬이란 작자 빼고는 모두 좋았다.
“완전 초짜를 대려와 놓고선 어르신도 참.”
“초짜라니!”
다연이 소리를 높였다. 민찬은 혀를 차며 흘겼다.
“그림 하나는 잘 그린다고 인정하지. 하지만 위작의 위자도 모르는 초짜지. 더군다나 셈은 왜 이리 느려터진 거야? 돈 계산 그따위로 해서 언제 모을래?”
“하아, 돈 계산은 둘째 치고 위작 만드는 게 자랑은 아닐 텐데?”
민찬은 다연을 보다 코웃음을 쳤다.
“왜? 어차피 보는 눈 하나도 없는 어중이들이다. 허영심만 그득 차서 그림 모으다 가산 탕진한 양반 놈들이 한둘인 줄 아냐? 그런 양반들보다야 일본놈들에게 팔아 치우는 게 빠르지.”
“일본이라니? 왜(倭)?”
“일본이라고 바뀐지가 언젠데. 에휴, 그래 그 왜놈이다. 영규에게 듣자하니 청국가려고 돈 모은다며?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으면 일본으로 가라.”
민찬은 중얼거리며 이번 서역에서 들어온 확대경으로 그림을 뚫어지게 살펴보고 있었다. 위작공장의 기물들은 민찬이 주도하여 연구하고 실제 제작은 손기술 좋은 영규가 만든 것들이 태반이었다.
성격은 삐딱해도 격물(格物)의 능력은 민찬이 타고났다. 그림을 보고 안료를 비롯한 종이, 붓의 종류까지 파악해내는 것은 민찬의 몫이었다.
“할일 없으면 그림 연습이나 하지? 걸리적거려.”
“…….”
“……평생 위작 그리면서 먹고 살 거 아니면, 니 그림도 틈틈이 그려. 뭐, 잘 그리면 내가 팔아 줄게.”
다연은 생각지도 못한 민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민찬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영규에게 소리 지르며 지시하고 있었다.
율은 채경의 처소로 돌아왔다. 보고를 받은 채경의 표정을 딱딱히 굳어갔다.
“뭐? 조광백? 그 농아가 조광백 대감 집으로 갔다?”
“네, 아가씨.”
채경은 초조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오산도 이런 오산이 없었다. 상인이 계산을 잘못하다니 그것도 송상의 상인이. 가문의 수치였다. 조광백은 풍양 조씨의 실세였다. 현재 대비가 풍양 조씨 사람이었다. 물론, 현재 중전의 집안 안동 김씨가 채경의 집안이었지만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방계였다. 아무리 방계라 하더라도 경쟁가문의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큭큭큭, 웃기네. 전시회에 대한 것은 일단 미루고 가진 물량으로 예정된 계획대로 하는 수 밖에 없겠네. 율, 오늘 저녁 명월관에 찾아간다고 연락해놔.”
“네, 아가씨.”
풍양 조씨 사람의 그림이라면 그 실력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에서 예술가를 후원하는 가문은 안동 김씨 다음으로는 풍양 조씨였다. 역량 있는 예술가를 키우고 후원하고 나아가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가문에서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뜻이 같다고 친하게 지낼 수야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서로 세자빈에 자기 가문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아가씨 인상 쓰면 이마에 주름져요. 한번 주름지면 답 없는 거 아시죠?”
“홍연.”
“서역에서 들어온 화장품으로도 해결이 안 돼요.”
“시끄러워, 너 내가 내 밑에서 일할 거면 좀 조용히 하라고 했지?”
“아가씨 밑에서 일하지만 제가 종복은 아니잖아요. 파트너죠.”
“너란 아이랑 동업자라니 내 팔자야.”
홍연은 빨간 머리를 흩날리며 방안에 걸린 그림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역시 조선 그림은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이 예쁘지도 않은 이상한 새는 왜 그리는 거예요? 거기다 뭔 글씨가 이렇게 많아. 도장은 왜 떡하니 가운데 찍어대는 거구요.”
채경은 홍연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양인의 시각으로 보는 조선의 그림은 이상할 수 있겠다싶었다.
“그 예쁘지도 않은 새는 니가 좋아하는 메추리인데.”
“메추리라니, 그 메추리알이요? 그 완전 작은 계란?”
“응, 너 메추리알 장조림 좋아하잖아.”
“그, 그 새를 왜 그리는 거예요!”
홍연이 흥분하며 소리치자 채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 속 메추리는 알을 낳는 암컷 메추리다. 메추리는 한자로 암(鵪)이라고 하는데 소리가 비슷한 편안할 안(安)으로 뜻을 써서 편안하다를 그린 그림이야. 뭐, 한마디로 양인들 머리로는 웬만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지.”
“뭐라고요?”
“됐다. 저녁 반찬으로 메추리알 잔뜩 해놓으라고 할 테니. 실컷 먹기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