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산에는 밤이 더 빨리 찾아왔다. 다연은 처소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그림이나 그리라던 민찬의 말이 귓가를 멤돌았다. 흔들리는 촛불이 위태로워보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를 걷고 붓을 들었다. 먹물을 붓에 듬뿍 묻혔다. 하얀 종이 위에 붓이 지나가자 소담한 모란꽃이 피어났다. 꽃잎 하나하나 정성을 들이며 그렸다. 그렇게 한참을 그릴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드세요. 화공님.”
영규의 목소리에 다연은 문을 발칵 열었다. 밖에는 영규와 함께 서있는 민찬이 있었다. 연보랏빛 답호가 밤바람에 흩날렸다. 연보랏빛이 민찬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게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달빛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는지 해사해보였다.
“밥 안 먹냐? 콩알. 쪼꼬만 게 잘 먹어야지.”
콩알이란 말에 다연의 눈빛이 짙어졌다. 순간 도련님이 생각났다. 다연은 얼른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나이도 같은데 걸핏하면 무시하는 김민찬이었다.
“콩알콩알. 내가 왜 콩알인데.”
“어이구, 두 분 그만 투닥거리십쇼. 며칠 쨉니까! 밥 식어요. 화공님. 도련님도 같이 먹겠다며 온 거잖아요!”
영규는 밥상을 다연의 방안에 놓고 나갔다.
“두 분 맛있게 드십쇼.”
민찬은 다연 앞에 앉아 숟가락을 쓱 들었다.
“왜 내방에 와서 먹는 건데?”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다.”
크게 밥을 한 숟갈 떠 넣으면서 고개를 돌려 바닥에 놓인 모란도를 흘깃 보았다. 다연은 민찬이 자신의 그림을 보는지 모른 채 입술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집었다.
“이어 니아 으린어냐?”
“뭐? 입에 든 거 다 먹고 나서 말하지?”
민찬은 대접을 들고 국물을 쭉 들이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모란도 니가 그렸냐고.”
“어, 아까 그림이라도 그리라고 했잖아.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모란도 그렸다.”
“흐응…… 나쁘지 않네. 낙관은 왜 아직 안 찍었냐?”
“낙관은 무슨…….”
“화공이 자기 그림에 낙관 찍는 걸 하찮게 생각해서야 되겠냐. 사내애가 몸만 비리비리 한 게 아니라 정신도 비리비리해. 밥은 또 왜 깨작깨작 먹는 거야. 팍팍 좀 먹어!”
민찬은 성을 버럭 내더니 상에 올라온 수육을 집어서 다연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쪼꼬만게 많이 먹어야 더 크지. 이 형님처럼 말야.”
“형님은 무슨, 얼어죽을 …….”
다연은 투덜거리며 민찬이 올려준 수육을 집어먹었다. 육즙이 흐르는 게 맛있었다. 김민찬과 겸상한다는 사실만 빼곤 매우 훌륭한 저녁이었다.
“밥 다 먹고 낙관 찍어서 나 줘, 표구해서 내가 좀 팔아보마.”
“당신이 뭔데 내 그림을 팔아준대는 거야?”
“얘가 이 형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네. 일본놈들이랑 거래할 때도 내가 일본말로 다 팔고다니고, 뭐, 꼴은 이래도 안동 김씨 떨거지거든. 송상 행수가 되고 싶었지만 뭐, 서출이란 게 이도저도 아니지 뭐.”
서출이란 말에 다연은 순간 몸이 굳었다.
“큭큭, 뭐 그렇게 보지마. 내 어머니가 명월관 청월이지. 그러니 뭐 제대로 족보에 올려주나. 사람취급이 안되니 이러고 있지. 나도 돈 모아서 일본으로 갈 거야. 지긋지긋한 조선 땅.”
“나랑 비슷하네……. 내 어머니도 기생이었는데.”
“그러냐.”
어느새 둘은 식사를 마치고 밥상을 물렸다. 영규를 닦달해 얼마 안남은 술을 그러모아 둘은 달빛을 안주삼아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이 많이 변했지. 양인들이 조선 땅에 활보하고, 양인 말을 배워야 출세할 거라는 말도 나돌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지. 뭐, 세상이 바뀐다고 다 잘 되는 법도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고 자존심 꺾어가며 위작을 그리고 있는데…….”
민찬은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본 놈에게 서슴없이 털어놓는 자신이 신기했다.
“콩알, 너 이름이 뭐냐? 영규도 모른다고 하고 어르신도 도유도유 거리고.”
다연은 순간 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이런 질문을 지금껏 받아본 적이 없어서 머리를 싸매었다.
“홍……윤. 홍윤.”
“홍가 사람이었냐. 뭐, 니 말대로 언젠가는 되겠지. 넉넉히 이룬다. 도유(到裕). 니 낙관처럼…….”
민찬은 어느새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문 밖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연도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명월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채경의 명에 율이 미리 연통을 넣어놔 명월관은 오늘 일찍 문을 닫았다. 사대부 여인이 기방에 드나드는 모습이 밖으로 보여선 좋을 게 하나 없다. 하물며 방계라 하더라도 현재 중전의 가문인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채경은 푸른 장옷을 뒤집어 쓴 채 명월관 뒷문으로 율의 호위 속에 들어갔다. 청월은 기다렸다는 듯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채경은 장옷을 푹 뒤집어 쓴 채 청월에게 말했다. 이곳에는 사정을 아는 율과 청월 뿐이었건만 혹시 모를 이목을 피해 몸을 사려야했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 할지라도…….
청월이 채경을 안내해 명월관 깊은 곳에 모시자 채경은 장옷을 벗어던졌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가뜩이나 밤이라 뭐 보이지도 않는데.”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번에 말씀하셨던…….”
“맞아. 그 일 때문에 왔어. 그림을 팔 거다. 심미안이 있는 그런 높으신 분들 위주로 모아서 경매를 하는 거지.”
청월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채경은 명월관의 주인이다. 명월관의 기생들을 관리하고 운영하는건 청월이었지만 명월관의 소유주는 채경이었다. 채경이 명월관의 기생들을 데리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한대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경매라니요.”
청월의 말에 채경은 싱긋 웃었다.
“조선에서 그림을 제대로 판매하는 사람이 있어? 거간꾼이 중간에 껴서 소개해주고 소개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가지. 그렇게 산 그림이 제대로 된 거면 모르지만, 거의 태반은 위작이야. 왜냐, 사는 사람은 감식안이 없으니까. 볼 줄도 모르면서 양반들이 사재끼니까 중인들도 사재끼는 거야.”
“그렇지만 제대로 된 그림을 모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거야, 감식안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거나, 감식안이 있는 사람들뿐이라는 거지.”
채경은 아는 사람들끼리 그림을 향유하는 것이 싫었다. 좋은 그림은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 조선은 누군가의 그림을 보려면 소유자의 집에 찾아가거나 빌려서 보거나 해야 한다. 문제는 또 빌려주면 빨리 보고 돌려줘야하는데 몇 년씩 가지고 있다가 뒤늦게 생각나서 돌려주기도 한다.
“그림을 아는 사람만이 즐기는 게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지요.”
“그것이 문제야! 왜,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조선의 그림은 틀에 갇혀있어. 도화서 화원이라는 자들을 봐. 맨날 똑같은 그림만 그려대고 있어. 국가가 인정한 화공이란 사람들의 그림이 다 똑같다니 이상하잖아. 더군다나, 위작에 대한 규제도 심각하지 않아. 그러니 가짜를 파는 사람이 수두룩한 거야. 그리고 보는 눈이 없어서 가짜를 집 한 채 값으로 사는 거지.”
“그것이 왜 문제라는 것입니까?”
“당연히 문제지, 청월, 나는 방계지만 안동 김씨 집안과 연관이 있어. 대대로 화공을 후원해주는 집안이지. 그런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집안사람 중 누구도 위작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제도를 만들고 시장을 바꾸려 하질 않아. 그렇다면 뭣 하러 예술가들을 키우고 후원한 거야? 정말 그림을 아낀다고 말할 수가 없잖아. 자기네들 잇속 채우려고 해왔다는 거밖에 더돼?”
청월은 채경에게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 집안을 권력과 탐욕에 물든 집안이라고 하는 주인에게 반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경매를 하는 것은 더욱 적극적으로 화공들을 길러내고 그림을 지켜내는 것이야. 가짜를 팔면서 돈을 갈취하는 거간꾼도 없어지고, 감식안이 없어도 사기 당할 리도 없지. 무려 송상이 감식해 증명하는 거야. 송상의 이름도 높아지는 거지.”
“경매라니 너무 생소합니다. 양반들이 참여할까요?”
“좋은 그림이라면 하나 걸어두고 모여서 밤새 술 마시며 감상하는 게 양반들이야. 얼마나 자기가 대단한지 자랑하고 싶어 하는 자들인데, 가장 비싼 그림을 낙찰 받았다는 사실로 자부심을 느낄 거야. 너도나도 궤짝으로 돈을 갖고 와서 경매한다고 난리칠걸.”
청월의 머리로는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경매할 그림은 있습니까?”
“몇 점 모아둔 것들이 있지. 경매는 청월 자네가 맡아서 해줘. 그림을 잘 아는 그런 자들로만 골라서 경매에 참여하게 해야 해.”
“알겠습니다.”
채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달빛에 빛나는 그림을 발견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아아, 술값대신 그려주고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 누구야?”
“조광백 대감의 장남 조문우 나리시죠.”
채경은 장옷을 세게 쥐었다. 닷냥을 주고 사와 율을 미행까지 시켜서 얻어낸 정보는 조광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공을 만나고 싶었다. 전시회를 하고 싶었다. 찾고 찾았던 그림의 주인이 너무나 쉽게 밝혀졌다. 무려 9년을 찾아다녔는데……. 그렇게 찾고도 절대 가질 수 없는 화공이었다. 상대는 풍양 조씨다. 채경이 죽어 남자로 태어난다 해도 협력이 불가능한 가문이었다.
“아가씨?”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경이 걱정된 듯 율이 물어왔다. 채경은 손사레를 쳤다.
“괜찮아. 조금 기분이 나빠서……. 풍양 조씨 가문인줄도 모르고 그간 그렇게 찾아다녔다니. 정말 송상의 수치로군.”
“아가씨.”
“가자, 율. 율 편으로 그림은 나중에 보내겠네. 경매에 참석할 양반들 명단이나 나중에 보내줘.”
“네, 아가씨.”
채경은 장옷을 푹 뒤집어쓰고 명월관을 나갔다.
날이 밝았다. 문우는 관복을 정제하고 입궐할 채비를 했다.
“도련님.”
“며칠 전 뒤를 밟는 자가 있었다고? 역시 꼬리가 길면 잡히는 건가. 장난은 그만 해야겠네. 수고했다. 인환아.”
인환이라 불린 자는 며칠 전 율의 목에 단도를 댄 사내였다. 거렁뱅이 옷은 내다 버렸는지 지금은 멀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문우는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왔다. 사헌부 집의인 그는 지금 조선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내였다. 대비의 집안인 풍양 조씨로 세도가이자 판정승이 되려면 한번은 거쳐야하는 사헌부 집의다. 더군다나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뭇 조선팔도 처녀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가자. 인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