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를 뜨나?”
“뭐 그런 셈이지. 근데 그냥 바닥에서 초를 뜨면 섬세하지 못해. 특히 운격 같은 자의 그림은 윤곽선이 없으니 더더욱 힘들지. 그래서 준비한 것이 이거다! 며칠 전에 영규한테 제작하라고 지시한 것이야.”
가슴을 피며 자랑하듯 보여준 것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유리로 만든 머릿장 같이 보였다. 커다란 유리 안에는 촛불이 들어 있었다. 천장에도 불을 매달아 높이를 조절하게 만들어놓았다.
“이게 뭐야?”
“뭐, 생각 좀 해봤다는 거지. 어르신이 이런 그림만 안 들고 왔어도 생각해 볼일 없었는데. 유리로 만든 탁자정도로 생각하면 돼. 탁자 밑에는 불을 넣어서 밑에서 빛이 올라오게 했고. 그 위에 그림을 올려놓는 거다. 촛불과 탁자의 거리는 상당해서 이정도 빛과 열기로는 그림이 상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업시간은 최대한 단축해주는 게 좋겠어. 어쨌든 안료는 빛에 약하니까.”
“한번 보시는 게 더 빠릅니다. 화공님.”
영규가 씩 웃으며 그림을 유리탁자 위로 올렸다. 그러자 밑에서 빛이 올라와 그림의 윤곽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거 서역에다 팔면 돈 좀 벌 것 같은데. 큭큭. 어때? 훨씬 잘 보이지?”
“이 위에서 초를 뜬다고?”
“그렇지. 뭐 일단 해봐.”
민찬이 옮길 종이를 그림위에 덮었다. 전보다 살짝 희미해지긴 했지만 바닥에서 초를 뜰 때 보다 섬세했다.
“우선 최대한 빨리 초를 뜨고, 채색을 하는 거지.”
“평소 쓰던 목탄으로 하면 너무 두꺼워서…….”
“걱정 마세요. 화공님. 진작 준비해둔 것이 있죠.”
영규가 씩 웃으며 꺼낸 것은 연필이었다.
“이게 뭐야?”
“바다 건너서 온 것. 목탄의 일종이야. 무척 가늘지. 나무심 안에 있어 손에도 안 묻지. 섬세하게 할 수 있어.”
“손에 안 익어서 쓸 수 있을까?”
“그러니 연습이지. 장인이 연장 탓 하는 거 봤어? 몇 번 연습하다 보면 손에 익는다. 무엇보다 이런 그림에 목탄은 물러서 잘 부러지고 거칠고, 쉽게 지저분해진다. 초를 뜨기엔 적합하지 않아.”
다연은 연필을 잡았다. 어색한 감촉. 하지만 몇 번 종이에 그려보니 어렵지 않게 사용했다.
“거봐. 별거 아니래도. 조선식 연필도 개발 중에 있지. 아무리 그래도 저건 목탄이 아니다. 목탄이 필요한 곳엔 목탄으로 그려야지.”
다연은 크게 숨을 내쉬고 초를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번 어색하던 손놀림이 금세 자연스럽게 변했다.
“오늘은 먼저 초만 떠. 불앞에서 작업하는 게 쉽지만은 않으니까.”
그림을 사온 채경은 몇 시간 째 고민에 빠졌다.
“육촌이라고. 하아 참. 그래서 그날 불쑥 찾아와서 예의상 말해줬다고 하는 거야? 하아. 기가 막혀.”
경상 육의전에 그림을 거래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시회를 하고 싶을 만큼 완벽한 화공이었기 때문이다. 화공이 누구냐고 강세훈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민찬에게 물어보기도 싫었다. 답답함에 화가 났다.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짜증나는 육촌 어딨는지 알아봐. 율. 그날 갖고 온 그림이 도유라는 자의 것이었다니. 그걸 그렇게 놓친 내가 바보지.”
“네, 아가씨.”
채경은 열이 받는지 쥘부채를 펼쳐 부채질을 요란하게 했다. 홍연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아가씨, 더우면 수박 내오라고 할까요?”
“너는, 내가 수박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큭큭, 그래도 그렇게 열 받아선 좋은 소식도 좋게 안 들릴 거예요.”
“뭔 좋은 소식?”
홍연은 벌떡 일어나서 숨겨둔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구하기 힘든 것이죠. 유화보다야 쉽지만.”
“설마…….”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상인들 통해서 얻어온 copperplate prints입니다.”
“뭐? 동판화라고?”
채경은 민찬의 일이라곤 지워버린 듯 상자 앞으로 달려 들어와 벌컥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국의 풍경이 그려져 있는 작은 그림이 여럿 있었다.
“경매에는 서역의 그림도 내보려고 생각 중이야.”
“그래서 많이 원하셨군요?”
“구하기 쉬운 편이니까. 동판화에 비해 유화는 보존하면서 옮기기 힘드니까. 청에는 서양화가들이 궁에서 일하고 있지. 그에 비해 조선은 이제 겨우 눈을 뜨고 걷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일 뿐. 아버님께 고맙다고 전해드려.”
채경의 눈은 밝게 반짝였다.
아침 일찍 도성에 갖다온 민찬은 싱글벙글 웃으며 전낭을 들고 걸어왔다. 다연은 어색한 민찬의 미소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이지. 자 받아라!”
민찬이 전낭을 던지자 다연은 부랴부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저번 참외처럼 바닥에 곤두박질하지 않고 손안에 안전하게 떨어졌다.
“웬 돈이야?”
“모란도 팔리셨어요. 화공님. 약속대로 대금은 반띵했다.”
“뭐? 정말이야?”
“응, 저번 잉어도도 팔렸다고 하더라. 같이 넣어놨어.”
다연은 전낭을 열어봤다. 상평통보와 함께 어음이 들어있었다.
“저, 정말 이만큼 팔린 거야?”
“내가 뭐라 했냐? 널 최고의 화공으로 만들어줄 거라 했지? 쉬지 말고 그림이나 그려. 오늘은 그 화조화 채색해야 하잖아. 정신 바짝 차려라.”
“어련하시겠습니까. 나리. 큭큭.”
다연이 장난치자 민찬은 다연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다연의 상투가 흐트러졌다.
“콩알 주제. 이 형님을 놀리고 있어.”
“형님은 개뿔.”
민찬이 다연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 아파! 아우씨.”
이마를 문지르며 다연은 작업실로 향했다.
“내가 그림 팔아줘서 딱밤 용서해주는 거야. 걸핏하면 형님이래.”
“형님이고 말고. 석 달 먼저 태어났으니 형님이지.”
“네네, 형님. 메롱.”
다연은 혓바닥을 내밀고 약 올리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 안에는 영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화공님이 참으세요. 도련님 유치한 거 한 두 번도 아니고. 안료는 준비해 놓았습니다.”
“알았어.”
다연은 자리에 앉았다. 초는 다 떴기 때문에 빛나는 유리탁자는 필요가 없었다. 익숙하게 호분을 개어 아교랑 섞었다. 그냥 안료를 물에 개어 바르면 접착력이 없어서 마르면 우두두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채색화에는 반드시 안료를 아교와 섞어야 했다. 거기다 여러 번 채색을 해야 색이 제대로 나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발색을 위해서 그리고 물이 번져 종이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호분을 꼭 밑바탕에 칠해야하는 것이 채색화의 기본이었다.
붓을 들어 호분에 적셔 정성스럽게 칠해 나갔다. 영규는 다연이 그리는 것이 재밌는지 계속 붙어 작업하는 것을 구경했다.
“연필이란 거 목탄보다 정말 좋네. 이렇게 채색해나가면 정말 윤곽선은 안보일 것 같네.”
“그렇죠? 큭큭.”
아침부터 사헌부는 시끄러웠다. 문우는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들었는가? 명월관에서 그림경매를 한다는 군.”
“경매? 그것이 무엇인가?”
“가장 높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이 그림을 사간다는 군. 그림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이 쫙쫙 벌어지는 화공들 것이고.”
“시끄럽군. 이곳이 저자거린가? 아침부터 무슨 수다들이야.”
사헌부 집의 조문우의 일갈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집의나리.”
문우는 서류더미에 고개를 돌렸다.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막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림경매, 그것도 명월관에서 하는데 자신은 소식 한통 제대로 듣질 못했다.
“큭큭, 그림경매라. 조선 최고의 감식안인 날 빼놓고 일을 벌려? 재밌군.”
조문우. 그는 씩 웃으며 도장을 서류에 쾅쾅 찍어댔다.
조용히 차를 즐기고 있던 채경에게 율이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율.”
“명월관 청월에게서 온 연통입니다.”
율이 서찰을 내밀자 채경은 재빠르게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급했는지 글자는 날아오르듯 흐트러졌다. 서찰의 내용은 경매가 상상이상으로 잘되어 시도 때도 없이 양반들이 와 그림을 내놓으라고 밤낮으로 성화라는 것과 출입패를 받지 못한 양반들까지 몰려와 명월관이 터져나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하아, 산 넘어 산이구만. 이렇게 소문이 빠를 줄이야. 짐작도 못했어.”
“시위하는 양반 반 이상은 경상쪽 사람일 겁니다.”
“그래, 경상 강세훈. 서찰 끝에는 경상쪽에서 이 분란을 조장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명월관 분위기는 어때?”
“북새통입니다. 밤낮이고 시끄럽게 구는 통에 정작 본업인 술장사를 못할 지경이랍니다.”
채경은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몇 주 전만 해도 시집이나 가라며 무시했던 주제 대놓고 영업방해를 하고 있었다.
“이유가 도대체 뭘까. 몇 주 전만해도 계집애라며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였는데. 빨리 이일을 수습하지 않으면 평판이 떨어질 거야. 경매뿐만이 아니라 명월관이라는 간판자체에 타격을 입을 거야. 하아. 강세훈. 어디든 남자는 이 모양 이 꼬라지지. 김민찬부터 시작해서 이젠 강세훈이라니. 머리로 안 되니 실력행사라는 건가.”
장사가 잘되는 가게 앞에 왈패를 풀어 방해하는 것쯤이야 예삿일이었다. 상단 밥 먹은 채경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일은 달랐다. 단순히 가게 앞에서 왈패를 푸는 것과 조선 사대부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하아. 강세훈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진 않을 거야. 청월에겐 평소대로 계속 기방 문을 열라고 해. 나는 최대한 빨리 이유를 찾아볼 테니……. 아, 그리고 이 동판화 청월에게 갖다 줘. 경매에 올리라고 해. 그림에 대한 설명도 같이 넣어 놨어.”
“네, 아가씨.”
율은 나무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텅 빈 방안. 채경이 한숨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