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채경은 대청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율을 노려봤다.
“오늘도 시위한다니?”
“그런 것 같습니다만…….”
“왜 말을 하다 말아?”
율은 채경의 눈치를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조사해본 결과 역시 대부분이 경상쪽에서 매수한 자들이었습니다. 신분이야 하나같이 공명첩으로 양반된 중인들이죠.”
“역시…….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훼방하는 걸까? 경상쪽 상태는 어때?”
“그림쪽 시장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딱히 짐작되는 것은 현재로써 없습니다. 화방이나 지전등 경영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채경은 수박을 다 먹었는지 내려놓고 생각에 빠졌다.
“눈에 보이는 문제가 아닐걸. 좀 더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지. 경상쪽 그림유통을 더 철저히 조사해봐. 문제가 없지 않고선 계집이 조금 장사하는 거에 이런 짓까지 벌릴 리가 없으니…….”
“네, 아가씨.”
조문우는 사헌부 집의로써 쌓인 업무를 하고 있었다. 도장을 쾅쾅 내리 찍으면서 씩 웃었다.
“자네가 말한 그림경매에 나도 한번 가봤다네.”
“어떠셨습니까?”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물어오는 관리를 무시하기 어려웠는지 문우는 도장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주 재밌는 곳이었어. 큭큭, 곧 조선의 그림 시장은 바뀔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입니까? 하긴, 그래서인지 요즘 시끄럽긴 합니다. 사대부들이 기방 앞에서 소리 지르는 모양새도 문제구요.”
“반 이상이 쭉정이들뿐인데 뭐. 그걸 인정하기엔 우리 조선은 아직 준비가 안 됐으려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됐네, 자네 일이나 하시게. 그래도 자네 말대로 수습이 빨리 안 된다면 조정이 나서겠지.”
문우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다시 안건들을 훑어보았다.
다연은 어느새 위작 채색의 마무리단계에 들어갔다. 몇 군데만 더 칠하면 끝이었다. 빠르게 채색을 마무리하고 힘들었는지 기지개를 활짝 폈다.
“채색화 위작은 너무 힘드네. 이걸로 네 개 째인가?”
“네, 이것만 하면 끝입니다.”
“벌써, 끝이라고? 빠르네. 콩알.”
콩알이란 단어에 다연은 고개를 돌렸다. 민찬이 하늘빛 모시 답호를 흩날리며 서있었다.
“무슨 일로 왔어?”
“그림 그려놓은 건 없나 해서지. 더 내놓으라고 성화다. 제법 양반네들한테도 소문이 돌기 시작하나봐.”
다연의 얼굴에 미소가 잔뜩 떠올랐다. 환한 다연의 미소에 민찬은 괜히 얼굴을 붉혔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으흠. 뭐, 내가 뭐랬냐. 최고의 화공으로 만들어준다고 그랬지. 흠흠. 이 형님만 믿어라.”
“형님은 무슨.”
다연은 채색을 마무리하고 붓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완성.”
“수고하셨습니다. 화공님.”
다연은 작업실에서 나와 문 앞에 서있는 민찬을 바라봤다. 날렵한 콧날 사내치고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그러다 지난밤 일이 생각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너,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민찬은 재빠르게 다연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 열은 무슨.”
다연이 민찬의 손을 잡아떼자 민찬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여자라고 의식하니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웠다.
“사, 사내새끼가 비리비리 해가지고. 얼, 얼른 가서 쉬어.”
“괜찮다니까.”
“뭘, 괜찮아 며칠 내내 그림 그리느라고 피곤한 거 다 알아.”
“도련님, 왜 오늘따라 화공님한테 자상하세요?”
영규의 말에 민찬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더욱 분위기는 이상해졌다.
“내, 내가 뭐! 나, 나 원래부터 자상했어. 나 김민찬. 자상 빼면 시체인거 모르냐?”
“아이고,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도련님.”
“영규 이자식이!”
민찬이 소리치자 영규는 그림을 들고 빠르게 사라졌다.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뭐가?”
“……뭐, 여기 산 속이고 여러모로 불편하잖아. 으흠.”
“뭘, 새삼스럽게…….”
다연은 갑작스런 민찬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산 내려갈 일 있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으흠.”
“……고마워.”
민찬은 다연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괜히 부채를 펼쳐 세게 부쳤다.
율은 할 일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우선 민찬의 행방을 찾아야했고, 경상 쪽 동태도 조사해야했다.
“내게 물어도 내 아들놈 소식이 나오지 않는다니까요.”
“행수께서 모르면 누가 압니까?”
명월관 청월에게 먼저 묻는 게 순서라 찾아왔지만 아들 소식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는 뭐, 조선을 뜬다나 뭐라나 어디서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고 있는지 나야 모르죠.”
“연락은 없습니까?”
“뭐, 가끔 사나흘에 한 번씩 주막마냥 명월관에서 자고 가니까 또 오게 되면 연통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율이 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였다.
경상 쪽에는 사람을 심어놓았다. 상단 호위무사인 율의 얼굴은 익히 알려져 있어서 쉽게 접근이 불가했다.
“아가씨께서 명월관 시위 쪽은 어떻게 해결하신다고 하십니까?”
“많이 심합니까?”
“오늘도 보시다시피 저렇죠. 낮부터 저렇게 몰려들어와 있으니 조정이 아는 것도 시간문제 아닐까요?”
“……경상 쪽에 사람을 심어놓았습니다. 며칠 내로 상황 파악이 될 겁니다.”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계속 시끄러워지면 아가씨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청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율 또한 속이 타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채경은 저자에서 사온 잉어도를 바라보았다. 화공을 만나고 싶었다. 탐이 났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육촌뿐이었다.
“맘에 안 들어.”
“뭐가요?”
홍연은 옆에 앉아 약과를 먹으며 물어보았다.
“결국 뭘 해도 짜증나는 육촌이랑 거래를 해야 하잖아. 순순히 화공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어?”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채경은 홍연을 바라보았다.
“여자에게 졌다는 걸 인정 못하는 유학자니까!”
괘씸한지 채경은 서안(書案)을 쾅 내리쳤다. 졌으면 깔끔하게 승복할 것이지. 사사건건 시비 아닌 시비였다. 서자라 제대로 된 관직을 못 얻는다고 불만인 것도 결국 입신양명하고 싶은 것이 꿈이니까 그런 것이었다.
“그래, 조선 땅에서 남자로 태어나 관직에 나아가는 것 모두 다 꿈꾸는 것이겠지만, 유학을 무시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유학자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잖아. 사농공상(士農工商) 천한 상업을 하고 싶어라 하면서도 여자에겐 져서도 질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이 유학자가 아니면 뭐겠어.”
“그 유학이란 거 역시 어려워요. 이해가 안 돼요. 영국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나도 이해가 안 가. 여자가 어때서. 여자가 무엇을 잘 못했는데 뭐든 여자는 안 된다는 거지? 뭐, 양인인 너 앞에서 이런 말 해봤자 소용도 없겠지.”
민찬은 얼마 후 훌쩍 또 산을 내려와 다연이의 그림을 경상에 넘겨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너, 민찬이냐?”
연두빛 도포자락을 흩날리는 사내가 서있었다.
“오랜만이다?”
“연락도 없고, 어디서 뭐하고 지냈냐? 이렇게 도성 육의전 거리에서 볼 줄이야.”
오래된 친우 윤조현이었다. 같은 서자 출신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송상 행수 경연에서도 대패하여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냈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냐?”
“뭐, 어머니 보러 가려고 했었지.”
“아아, 명월관?”
“그렇지. 너는?”
민찬의 물음에 조현은 씩 웃었다.
“요즘 너 그림경매가 유행인거 모르냐? 지금 가려고 하던 참인데 같이 가자.”
“뭐? 어딜 가?”
“좋은 게 좋은 거다. 이 형님이 좋은 구경 시켜주마. 경매 끝나고 명원관에서 술이나 한잔 하면 좋지.”
조현은 덥석 민찬의 손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민찬은 질질 끌려갔다.
경매라기에 명원관으로 가나 했더니 도착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도성 밖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겉으로는 객점 같은 곳으로 보였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조선을 한창 뒤흔들고 있는 그림경매. 명월관만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명월관에 초대 받지 못한 나으리들. 모두모두 잘 오셨습니다요.”
으슥한 건물 내부에는 밀실이 있었다. 그 안에는 번쩍거리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태반이었고 그들 앞에서 떠드는 사내는 영락없는 약장사처럼 보였다.
“이게 뭐야?”
“잠자코 있어봐. 곧 그림경매 시작할 거야.”
조현이 이끄는 곳에 앉아 민찬은 앞을 주시했다. 얍실하게 생긴 사내놈이 한참 인사를 하더니 그림을 소개했다. 뭐라 뭐라 한참을 떠들며 명나라 시대 그림이라고 말을 하는데 민찬의 다년간의 안목으로도 위작은 아닌 듯 했다.
“그럼 이제 경매 시작합니다요.”
사내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잣거리처럼 변했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서찰이 왔다갔다하고 별천지도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
“큭큭, 어떠냐? 재밌지? 요즘 좀 잘나간다 하는 양반님네들은 다 경매하기 바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명월관에 초대받지 못한 사대부나 중인들이야.”
“이렇게 많다고?”
“내가 알기로는 여기 말고도 도성 밖에 몇 군데 더 있는 걸로 알아.”
민찬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림의 안목은 있어서 사는 걸까. 어이가 없었다.
“네, 5000냥에 낙찰 되었습니다요!”
5000냥이라는 소리에 민찬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명나라 시절 그림이래도 저 정도 값은 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가산을 탕진해 길바닥에 내앉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저걸 5000냥 주고 산다고?”
“솔직히 여기 오는 자들은 돈은 많은데 명월관엔 못가니 오는 사람들이지. 안목이고 뭐고 알게 뭐냐. 그저 흐름에 뒤떨어진다는 걸 인정 못하는 자들뿐이지.”
“기가 막히는군.”
곧 다음 그림이 경매에 올랐다. 그림을 보는 민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건…….”
위작이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년 전 자신의 주도하에 그려진 것이었으니까. 진품은 이미 바다건너 일본에 있는지 오래였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조현의 물음에 민찬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위작제작에 참여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여기 경매장 주인은 그림을 어디서 갖고 올까 하는 생각에…….”
“듣기로는 그림 팔려고 하는 양반들하고 연결 돼있다고 하고. 수익은 나눠 갖는 것 같아.”
“……그렇군.”
민찬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좋지 않다. 불안을 말로 얘기하는 건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위작공장은 곧 문을 닫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