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 여인의 만남
1.
도성 밖 불법 도박소에선 오늘도 노름꾼들이 가득 있었다. 패를 보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를 들었는데, 요즘 그림이니 위작이니 시끄럽잖어.”
사내는 엽전 5냥을 더 던지며 씩 웃었다.
“저기 뒷산이 수상하더라고, 내가 산삼 캐러 산타다 봤는데, 심상치가 않어. 위작공장 같은 게 있는 것 같으이.”
“니미, 뭔 위작공장이여. 그딴 게 요 뒷산에 있다구라? 개패(안 좋은 패)면 퍼뜩 뒈질 것이지. 헛소리를 씨부리고 자빠졌어.”
“헛소리 아니여. 뭔 수레도 왔다갔다하고 그려.”
그 말을 듣던 다른 사내의 눈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민찬은 어머니 청월에게서 채경이 윤을 보고 싶다는 연통을 받아 위작공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늘 익숙하게 타던 산길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뭐야.”
섬뜩한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애써 무시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치만 자꾸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에 닭살이 돋았다.
“아, 뭐야? 설마…….”
설마 위작공장의 위치가 들킨 건 아닌가 싶자, 심장이 요동쳤다. 이대로 평소처럼 가다간 공장의 위치가 그대로 노출될 것이 뻔했다.
“으흠……. 공기가 차암, 좋구만.”
괜히 민찬은 다른 얘기를 하며 평소와는 다른 길로 향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이상한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공장으로 올 수 있었다.
“어, 도련님.”
“어, 영규야. 어르신 어딨냐?”
“어르신이요? 그야 늘 안채에…….”
영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찬은 쌩하니 안채로 달려갔다. 영규는 민찬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물가에서 붓을 씻고 있던 다연은 영규를 바라봤다.
“쟤 왜 저래?”
“그러게요. 뭐,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봐요.”
다연은 낯선 민찬의 태도에 걱정되었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채에 도착한 민찬은 대뜸 문을 발칵 열며 소리쳤다.
“어르신!”
“김민찬, 너 뭐야. 사람이 예의도 없이…….”
민찬은 성규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애체를 무심히 올리고 성규는 민찬을 바라봤다.
“공장 경계는 어떻습니까.”
“어떠냐니. 평소와 같지.”
“특별한 보고는 없습니까?”
“없다만, 왜 무슨 일 있는 거냐?”
성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민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게 확실했다.
“오늘 산에 올라오는 길에 수상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더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노출 된 거라면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겠군. 알았다. 이만 가봐.”
“네, 어르신.”
민찬은 인사를 올리고 안채에서 나왔다. 안채 마당에선 걱정되는 눈빛으로 민찬을 기다리고 있던 다연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
민찬은 수상한 시선에대해 말하려다 괜히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아,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 하얗게 얼굴 질려선 안채로 뛰어갔었으면서.”
“괜찮대도.”
민찬은 다연의 머리를 헝클었다. 다연은 둥근 눈으로 민찬을 올려다보았다. 민찬은 웃으며 다연을 안심시켰다.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응?”
민찬은 다연의 손목을 덥석 잡고 그녀의 처소로 향했다. 다연은 민찬의 손에 잡힌 손목이 불에 대인 듯 화끈화끈 거렸다.
다연의 처소에 도착하자 민찬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연락이 왔어.”
“무슨?”
“저번에 말한 거. 널 실컷 그림 그리게 해줄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널 보고 싶다고 하네.”
“그, 그게 무슨.”
민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뭐, 내 육촌 누이인데. 수완이 좋아. 만나러 가는 날, 언제가 좋겠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연은 일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너는…….”
“뭐, 저번에 말했잖아. 난 여기서 계속 돈 벌어야지. 조금만 더하면 목표한 금액 다 모으고…….”
“그, 그게 아니라…….”
다연은 말을 삼켰다. 같이 가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봐. 빠르면 빠를 수가 좋겠지. 내 마음 같아선 다음 주쯤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너 하자는 대로 할 게.”
“그래? 알았어. 다음 주중으로 날 잡을게. 뭘 그렇게 풀 죽은 얼굴하고 있어? 콩알.”
민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채경이라면 자기보다 더 잘 키워줄 수 있을 것이었다.
명월관 정문 앞의 시위대들이 모두 사라진지 며칠이 지났다. 운향은 그동안 너무 시끄러워 괴로웠는지 명월관 마당을 행복하게 걷고 있었다.
“행수님, 완전 살 것 같습니다.”
“좋으냐?”
“아아,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몇날 며칠 몇 시간을 쉬지도 않고 떠들어 대니…….”
“큭큭, 네가 고생이 많았다.”
운향은 해맑게 웃었다.
“미안하군.”
멀리서 세훈이 걸어오고 있었다. 운향은 놀라 허겁지겁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직 경매장 열 시각이 아니옵니다만…….”
“그래서 온 것이지.”
청월은 싱긋 웃었다. 며칠 전 채경을 통해 환전을 맡을 경상 쪽 인물이라 들었을 땐 놀랐지만, 며칠 새 세훈의 수완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경상의 환전업무야 차질 없이 되고 있습니다.”
“안채로 안내시켜주면 안될까? 행수? 그간의 괘씸죄로 마당에 서서 말해야한다면 그리 하겠네.”
세훈의 넉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청원을 안채로 손짓했다.
“가시죠.”
안채로 세훈을 모신 청월은 차를 따랐다.
“이제 이 시각에 찾아오신 이유를 말씀하셔도 될 듯 합니다만.”
“그런가.”
차를 한 모금 마신 세훈은 한동안 뜸을 드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풍양 조씨 쪽과 연관된 건 알겠지?”
“경상은 풍양 조씨, 송상은 안동 김씨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죠.”
“큭큭, 그런가. 그래서 자네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네.”
“이 천것이 도와드릴 게 무엇이 있다구요.”
청월은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향긋한 향이 코끝을 건드렸다.
“세자저하께 경매장 출입패를 하나 내드려야겠네.”
청월은 마시던 차를 순간 뿜을 뻔했다. 간신히 찻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방,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자저하께 경매장 출입패를 줄 수 있냐고 했네.”
“세, 세자저하라니…….”
세훈 또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인지 턱을 매만졌다.
“출입패야 많지만, 이 것은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자네한테 온 거지. 풍양 조씨쪽 부탁인데 한채경한테 말 꺼냈다간, 뭔 소리를 들으려고…….”
“그래도, 세자저하 관련이라면 일이 다릅니다. 아니, 그 전에 무슨 일로 경매장에 오신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내가 시위대 푼 것 때문인 듯 해. 그래서 더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야.”
청월은 속이 답답한지 차를 들이켰다.
민찬은 산을 내려와 육촌 채경의 집 대문을 두들겼다. 율이 대문을 열어주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누이님, 계신가?”
민찬의 소리에 채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채에서 나왔다.
“시끄럽습니다.”
“좋은 소식 들고 왔는데 너무 까칠 게 굴지 마.”
“좋은 소식이라니요?”
“화공에 대한 거지.”
화공이라는 말에 채경의 눈이 커졌다.
“어서 들어오세요. 뭐하고 그리 멀뚱히 서있습니까?”
“나보다 화공 소식이 반갑다 이거지. 어련하시겠습니까.”
민찬이 안채에 앉아 채경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민찬의 말만 기다렸다.
“사흘 뒤 이 시간쯤 데리고 올게.”
“좋습니다.”
“키우기로 확실히 정한거야?”
“뭐, 마음 같으면 조선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 싶습니다만, 그건 화공을 만나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일단은 전시회를 하고 싶습니다. 이건, 상인이 아니라 그림을 사랑하는 자로써의 마음입니다. 오라버니는 어쩔 겁니까?”
“나? 나는 왜?”
채경은 인상을 쓰며 민찬을 노려봤다.
“좋은 화공을 소개시켜준 점을 사 제 밑에서 일하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요즘 뭐하고 계신지요. 청월이 걱정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화공님과 같이 오신다면 뭐, 거처정도야 마련해드리죠.”
민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채경은 민찬을 한참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내 상황이 지금 안 좋아진다면 체면 불구하고 밑에 들어가 보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모르는 게 약이다.”
민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채를 빠져나가려고 하다 머뭇거렸다.
“……흠흠. 여, 여인들은 뭐, 뭘…… 좋아하냐?”
“네?”
채경의 반문에 얼굴이 시뻘게진 민찬은 육촌누이를 거칠게 노려보았다.
“아 씨, 뭘 좋아하냐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뭐 가락지나 노리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왜요? 좋아하는 여인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청월이 좋아하겠네요. 방랑벽인 육촌 오라버니를 사로잡은 여인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민찬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안채 문을 발칵 열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런 거 아닙니까. 딱 보아하니 좋아하는 여인 있으시면서…….”
“내, 내가? 걔, 걔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채경은 민찬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라면서 얼굴은 왜 빨개지셨습니까? 낮술이라도 하신 겁니까?”
민찬은 얼굴을 만져보며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훽 돌렸다. 도망치듯 채경의 집에서 나갔다. 민찬이 나가자 홍연이 안채로 들어왔다.
“사랑을 처음 알게 된 Boy 같아요.”
“소년은 개뿔, 저런 건 둔탱이라고 하는 거다.”
채경은 코웃음을 치며 잉어도를 쓰다듬었다.
도망치듯 채경의 집에서 나온 민찬은 저자거리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채경의 낭랑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댔다.
‘뭐가, 그런 거 아닙니까. 딱 보아하니 좋아하는 여인 있으시면서…….’
‘딱 보아하니 좋아하는 여인 있으시면서…….’
‘좋아하는 여인 있으시면서…….’
‘좋아하는 여인.’
“아아아악!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야! 내가 그 콩알을?”
저자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민찬을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보며 수군덕댔다. 마치 미친놈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민찬은 상황판단이 안됐는지 씩씩대며 걸었다.
“내가? 걔를?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그냥 나는…….”
그냥 그림실력이 뛰어나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 왜 선물을 사려고 했냐고 마음속에 누군가가 떠들어댔다.
“그, 그건. 이제, 헤어지니까…….”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멎었다. 숨을 쉬는 방법을 까먹은 듯했다. 삼복더위의 뜨거운 햇살이 민찬을 오롯이 감쌌다.
“후우……. 그래서 그런 거야. 그냥 순수하게 이별 선물이라고!”
민찬은 씩씩대면서 방물점으로 향했다. 계속 자신은 순수하게 이별 선물을 사는 거다. 라고 뇌까리며 좌판에 깔린 물건을 둘러보았다.